일전에 쓴 파레시아에 대한 일점일획 말씀묵상 후편이다.
파레시아παρρησία는 말speech하는 방식에 관한 언어이다. "파레시아로 말한다"παρρησίᾳ는 것은 "솔직하게" "자유롭게" "용기있게" "담대하게" 말한다는 뜻이다. 예수께서 파레시아로 말씀하셨고, 초대교회 사도들과 성도들도 파레시아로 말하였다. 성경은 이 점을 거듭 강조한다. (예문은 지난번 일점일획을 참조하시라.)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이긴 하지만, 파레시아παρρησία의 뜻은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를 배경으로 이해해야 한다. 파레시아는 도시국가(πόλις 폴리스)의 시민들(πολίτης 폴리테스)이 말하는 방식이다. 시민이면 누구라도 솔직하게 용기있게 말할 수 있었다. 누구 앞에서라도, 설사 왕 앞에서라도 말이다. "파레시아로 말한다"παρρησίᾳ는 그리스인들이 도시국가를 운영하는 방식이었고, 이것이 그들의 큰 자랑이었다. "파레시아로 말한다"παρρησίᾳ는 점에서 그리스인들은 주변 다른 문화권과 구별되었고, 이것이 그들의 정체성이었다. 그들이 주변 강국의 침략에 강력히 맞선 것은 자유롭고 담대하게 말할 수 있는 이 자유를 지키기 위함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마라톤 전투나 테르모필레 전투처럼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진 전투가 보여주는 것처럼, 페르시아 제국은 그리스의 오랜 숙적이었다. 페르시아는 절대군주제였고 이는 당시 대부분의 나라에서 다르지 않았다. 그리스를 침공한 다리우스나 크세르크세스, 성경을 통해 우리가 익숙하게 아는 고레스는 모두 페르시아의 절대 군주였다. 절대 군주라는 말은 그 앞에서 누구도 자유롭게 용기있게 담대하게 솔직하게 말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 점이 페르시아로 대표되는 동방 문화와 그리스로 대표되는 서방 문화가 갈라지는 지점이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 자유롭게 말할 자유, 파레시아가 놓여 있는 것이다. 동방의 수직적 문화가 뿌리 깊은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는, 아무리 서구화된 삶을 산다할지라도 서방의 이 파레시아 전통을 이해하기 어렵다. 우리는 여전히 대통령 앞에서, 목사 앞에서, 상급자 앞에서, 선생님 앞에서, 선배 앞에서, 또 그 누구 앞에서 자유롭게 말하기 어려운 문화 속에 살고 있다. 파레시아는 그런 우리가 추정하기 힘든 큰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신약성서 전체에서 파레시아가 가장 많이 나타나는 책은 요한복음이다. 요한복음에는 "파레시아로 말하는 것"이 플롯을 이끄는 하나의 주제가 된다.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는 길에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된 병자를 고치셨다(5:1이하). 그리고 나서 벌어진 유대인들과의 논쟁에서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파레시아로) 말씀하셨고 이로 인하여 유대인들이 처음으로 예수를 죽이려 하였다. 죄목은 신성모독이었다(5:18). 이후 예수께서는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내려 가셨고, 거기서 가르치시되 내놓고 가르치지(파레시아) 않으시고 "생명의 빵"과 같은 감추어진 비유로 제자들을 가르치셨다(6:22-59). 파레시아로 말하지 않는 예수의 가르침 때문에 많은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를 떠났다(6:66). 예수께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유대 지방에서는 자신을 잡아 죽이려 하고, 갈릴리 지방에서는 제자들에게 버림받았다. 그러니 초막절이 되었는데도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길 꺼리신다(7:6). 예수님의 형제들이 이런 상황에 처한 예수님을 찾아와 용기를 내어 떳떳하게 자신을 (말로) 나타낼 것(ἐν παρρησίᾳ 엔 파레시아)을 권면한다. 결국 예수님은 형제들의 조언을 받아들여 용기를 내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고,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 아무도 예수에 대해 드러내놓고(μέντοι παρρησίᾳ멘토이 파레시아) 말조차 할 수 없는(7:13) 엄혹한 상황 속에서도 내놓고 가르치셨다(7:14). 유대 사람들이 예수님의 학식에도 놀랐지만, 더 놀란 것은 그의 담대함이었다. 그래서 서로 말하였다. "보십시오. 그가 드러내 놓고 말하는데도(παρρησίᾳ 파레시아), 사람들이 그에게 아무 말도 못합니다. 지도자들은 정말로 이 사람을 그리스도로 알고 있는 것입니까?"(7:26). "파레시아로 말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증거로 작용한 것이다.
5장에서 7장 사이의 플롯을 파레시아가 끌고 가고 있는 것이 흥미롭지 않은가? 예수님의 어정쩡한 제자들은 그 다음 절기 때 성전에서 예수님을 만나자 그리스도인지 아닌지 분명하게(παρρησίᾳ 파레시아) 말해 줄 것을 요청한다(10:24). 예수께서는 이미 그들에게 "파레시아로" 말하셨지만, 그들이 믿음이 없어서 알아듣지 못한 것이다(10:25). 나사로가 죽었을 때 살리러 가시면서 예수께서는 다시 한번 "파레시아로" 말씀하셨다. 이 일을 통하여 비로소 그 믿음없는 제자들의 믿음이 자랄 것이라고. 예수님의 파레시아한 행보는 나사로를 살린 이후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이기 위해 본격적으로 모의를 시작한 다음 끝난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οὐκέτι παρρησίᾳ περιεπάτει"(우케티 파레시아 페리에파테이) (11:54). 새번역은 이 구절을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셨다"고 번역하였다. 몰래 숨어다녔다는 말로 들리지만, 그것이 아니라 파레시아한 행보를 끝내셨다는 뜻이다.
파레시아가 그리스 전통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이해할 때 요한복음에 사용된 파레시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요한복음 저자는 그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고, 그래서 파레시아를 그의 복음서의 중심 주제로 이렇게 사용한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인으로 파레시아하게 말하는가? 우리 교회는 파레시아의 가치가 통용되는 공간인가? 우리 사회는 파레시아로 말하는 사람들에게 귀기울이고 그 말을 경청하는가? 묻게 된다.
일전에 쓴 파레시아에 대한 일점일획 말씀묵상 후편이다.
파레시아παρρησία는 말speech하는 방식에 관한 언어이다. "파레시아로 말한다"παρρησίᾳ는 것은 "솔직하게" "자유롭게" "용기있게" "담대하게" 말한다는 뜻이다. 예수께서 파레시아로 말씀하셨고, 초대교회 사도들과 성도들도 파레시아로 말하였다. 성경은 이 점을 거듭 강조한다. (예문은 지난번 일점일획을 참조하시라.)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이긴 하지만, 파레시아παρρησία의 뜻은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를 배경으로 이해해야 한다. 파레시아는 도시국가(πόλις 폴리스)의 시민들(πολίτης 폴리테스)이 말하는 방식이다. 시민이면 누구라도 솔직하게 용기있게 말할 수 있었다. 누구 앞에서라도, 설사 왕 앞에서라도 말이다. "파레시아로 말한다"παρρησίᾳ는 그리스인들이 도시국가를 운영하는 방식이었고, 이것이 그들의 큰 자랑이었다. "파레시아로 말한다"παρρησίᾳ는 점에서 그리스인들은 주변 다른 문화권과 구별되었고, 이것이 그들의 정체성이었다. 그들이 주변 강국의 침략에 강력히 맞선 것은 자유롭고 담대하게 말할 수 있는 이 자유를 지키기 위함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마라톤 전투나 테르모필레 전투처럼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진 전투가 보여주는 것처럼, 페르시아 제국은 그리스의 오랜 숙적이었다. 페르시아는 절대군주제였고 이는 당시 대부분의 나라에서 다르지 않았다. 그리스를 침공한 다리우스나 크세르크세스, 성경을 통해 우리가 익숙하게 아는 고레스는 모두 페르시아의 절대 군주였다. 절대 군주라는 말은 그 앞에서 누구도 자유롭게 용기있게 담대하게 솔직하게 말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 점이 페르시아로 대표되는 동방 문화와 그리스로 대표되는 서방 문화가 갈라지는 지점이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 자유롭게 말할 자유, 파레시아가 놓여 있는 것이다. 동방의 수직적 문화가 뿌리 깊은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는, 아무리 서구화된 삶을 산다할지라도 서방의 이 파레시아 전통을 이해하기 어렵다. 우리는 여전히 대통령 앞에서, 목사 앞에서, 상급자 앞에서, 선생님 앞에서, 선배 앞에서, 또 그 누구 앞에서 자유롭게 말하기 어려운 문화 속에 살고 있다. 파레시아는 그런 우리가 추정하기 힘든 큰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신약성서 전체에서 파레시아가 가장 많이 나타나는 책은 요한복음이다. 요한복음에는 "파레시아로 말하는 것"이 플롯을 이끄는 하나의 주제가 된다.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는 길에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된 병자를 고치셨다(5:1이하). 그리고 나서 벌어진 유대인들과의 논쟁에서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파레시아로) 말씀하셨고 이로 인하여 유대인들이 처음으로 예수를 죽이려 하였다. 죄목은 신성모독이었다(5:18). 이후 예수께서는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내려 가셨고, 거기서 가르치시되 내놓고 가르치지(파레시아) 않으시고 "생명의 빵"과 같은 감추어진 비유로 제자들을 가르치셨다(6:22-59). 파레시아로 말하지 않는 예수의 가르침 때문에 많은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를 떠났다(6:66). 예수께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유대 지방에서는 자신을 잡아 죽이려 하고, 갈릴리 지방에서는 제자들에게 버림받았다. 그러니 초막절이 되었는데도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길 꺼리신다(7:6). 예수님의 형제들이 이런 상황에 처한 예수님을 찾아와 용기를 내어 떳떳하게 자신을 (말로) 나타낼 것(ἐν παρρησίᾳ 엔 파레시아)을 권면한다. 결국 예수님은 형제들의 조언을 받아들여 용기를 내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고,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 아무도 예수에 대해 드러내놓고(μέντοι παρρησίᾳ멘토이 파레시아) 말조차 할 수 없는(7:13) 엄혹한 상황 속에서도 내놓고 가르치셨다(7:14). 유대 사람들이 예수님의 학식에도 놀랐지만, 더 놀란 것은 그의 담대함이었다. 그래서 서로 말하였다. "보십시오. 그가 드러내 놓고 말하는데도(παρρησίᾳ 파레시아), 사람들이 그에게 아무 말도 못합니다. 지도자들은 정말로 이 사람을 그리스도로 알고 있는 것입니까?"(7:26). "파레시아로 말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증거로 작용한 것이다.
5장에서 7장 사이의 플롯을 파레시아가 끌고 가고 있는 것이 흥미롭지 않은가? 예수님의 어정쩡한 제자들은 그 다음 절기 때 성전에서 예수님을 만나자 그리스도인지 아닌지 분명하게(παρρησίᾳ 파레시아) 말해 줄 것을 요청한다(10:24). 예수께서는 이미 그들에게 "파레시아로" 말하셨지만, 그들이 믿음이 없어서 알아듣지 못한 것이다(10:25). 나사로가 죽었을 때 살리러 가시면서 예수께서는 다시 한번 "파레시아로" 말씀하셨다. 이 일을 통하여 비로소 그 믿음없는 제자들의 믿음이 자랄 것이라고. 예수님의 파레시아한 행보는 나사로를 살린 이후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이기 위해 본격적으로 모의를 시작한 다음 끝난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οὐκέτι παρρησίᾳ περιεπάτει"(우케티 파레시아 페리에파테이) (11:54). 새번역은 이 구절을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셨다"고 번역하였다. 몰래 숨어다녔다는 말로 들리지만, 그것이 아니라 파레시아한 행보를 끝내셨다는 뜻이다.
파레시아가 그리스 전통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이해할 때 요한복음에 사용된 파레시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요한복음 저자는 그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고, 그래서 파레시아를 그의 복음서의 중심 주제로 이렇게 사용한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인으로 파레시아하게 말하는가? 우리 교회는 파레시아의 가치가 통용되는 공간인가? 우리 사회는 파레시아로 말하는 사람들에게 귀기울이고 그 말을 경청하는가? 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