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대 사회에서 전형적으로 죄인으로 여겨지는 두 종류의 직업인이 있다. 하나는 세리이고, 다른 하나는 창녀이다. 세리만큼이나 창기는 바리새인들의 입장에서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으로 여겨졌다. 세리가 불특정 다수에게 불의의 돈을 거두어들였고, 그것을 온전히 되갚을 수 있는 회개의 방법이 없기에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 되는 것처럼, 창녀도 수많은 남자들에게 간통의 죄를 유발한 여자이기에 또한 온전한 회개가 불가능하다고 바리새인들은 간주한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세리와 창기, 죄인의 친구가 되신 예수는 그들의 죄를 용서하신다. 세리 마태를 제자로 삼으셨다. 누가복음 7장에서 주님께서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초청받아 식사하실 때, ‘동네에 죄를 지은 여인’이 찾아왔고, 그녀는 눈물로 주님의 발을 씻고 머리털로 닦고,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발랐다. 집주인 바리새인 시몬은 그녀가 죄인인데 주님의 몸을 만지게 한 것을 보고는 주님의 존재를 의심하였다. 여인은 바리새인들이 용서할 수 없는 창녀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지만, 주님은 창녀를 용서해 주셨다(7:48).
유대 사회는 결혼을 통한 성적 관계는 허용하지만, 결혼 외의 방법으로 성적 관계를 맺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였다. 그래서 이혼과 재혼을 통해서만 다른 여인과 성적 관계를 허용 받았기에 모세의 증서를 남발하는 유대인 남자들에 대하여 결혼의 신성함을 예수님이 강조하였던 것이다. 요한복음 7장에서 간음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에 대한 주님의 입장은 용서받을 수 없는 간통죄가 아니라, 누구의 죄이든 용서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여주시면서, 모두가 하나님 앞에 죄인인 사실을 드러내었다. 그러면서도 간통의 죄를 다시 짓지 못하도록 여인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이었다(요 8:11).
구약성경에서 창녀에 대한 히브리어는 זֹנָה(조나)이다(창 34:1; 38:15; 레 19:29). 창녀에 대한 율법의 부정적 입장은 음행을 온 땅에 퍼뜨리거나, 아버지의 집을 수치스럽게 만드는 존재로 인식하였기 때문이다(레 19:29; 신 22:21). 이뿐 아니라 구약성경은 가나안 땅의 풍속이었던 산당 혹은 신전의 남창(קָדֵשׁ, 카데쉬)의 존재를 경멸하였다(왕상 14:24; 15:12). 신명기의 법은 엄격하게 신전 창기의 존재를 금지하였지만(23:17), 이스라엘의 타락은 왕국 말년에 예루살렘 성전에도 남창의 집이 존재했음을 알려주고 있다(왕하 23:7).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성적인 방종, 포르네이아(πορνεία)를 비도덕적 죄들로 간주하고, 이 포르네이아(πορνεία)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는 죄라고 분명히 말한다(고전 6:9; 엡 5:5). 특별히 성적인 죄들은 우상숭배의 죄의 다음 목록(간음, 남창, 동성연애)에 들어갈 만큼 심각하게 여겼다(고전 6:9). 당시 헬라문화권에 속한 고린도 지역 분위기가 창녀의 존재를 ‘professional friend’ (ἑταίρα 헤타이라)로 여기며, 결혼 밖의 비밀스러운 성적 관계 맺는 것을 자유롭게 허용하던 헬라 사회의 자유분방한 성윤리를 바울은 거부한다.
고린도 교인 가운데 포르네이아(πορνεία)에 빠져 계모와 관계를 맺은 교인이 버젓이 행세를 하는 것에 바울은 그 음행자를 교회공동체에서 쫓아내라고 강하게 말한다(고전 5:2). 윤리적 도덕적 죄로서의 포르네이아(πορνεία)를 말하면서도, 또한 바울은 종교적 영적 음행자가 있을 것을 염려한다. 당시 고린도에 있던 아프로디테 신전의 1000여 명의 신전창기의 존재를 의식하여, 그들과 철저히 분리된 거룩한 삶을 살기를 교인들에게 요구하였다. ‘성령이 거주하는 몸’으로서 우상신전에서 몸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 창기와 합한다는 것은 결국 우상숭배에 참여하는 것과 같은 것임을 역설한다.
이스라엘의 왕국시대나 바울의 헬라문화권에 창기의 존재는 단순히 결혼관계 밖에서 성적 욕구를 채우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거기에는 종교적 영적 혼합과 방종이 관련되어 있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로마’를 큰 음녀(포르네πόρνη)라고 표현하였다(19:2). 로마는 예언자들과 성도의 피를 그 도성에서 흘린 음란한 창녀라는 것이다. 황제숭배를 거절하는 성도를 박해하고 죽이는 도시 로마를 창녀로 표현한 것이었다. 온 세상을 음행하게(πορνεύω) 만든 창녀(포르네πόρνη)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강조하는 요한계시록이다.
신약성경은 결코 자유로운 성윤리를 말하지 않는다. 성적 방종의 죄는 하나님 나라와 상관이 없다고 말한다. 창기, 창녀의 존재를 헬라문화권에서 비밀스러운 섹스 파트너 혹은 professional friend로 부르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한 사람의 성적 방종이 교회공동체를 더럽히는 큰 악이 될 것임을 바울은 엄격하게 가르쳤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직업적으로 그 일을 택한 사람들에 대한 주님의 사랑과 용서가 있었다는 것이다. 스스로를 의롭게 여기는 바리새인과 다르게 예수님은 세리와 창기를 용서하시고 품어 주시는 영혼의 친구가 되어 주셨다.
유대 사회에서 전형적으로 죄인으로 여겨지는 두 종류의 직업인이 있다. 하나는 세리이고, 다른 하나는 창녀이다. 세리만큼이나 창기는 바리새인들의 입장에서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으로 여겨졌다. 세리가 불특정 다수에게 불의의 돈을 거두어들였고, 그것을 온전히 되갚을 수 있는 회개의 방법이 없기에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 되는 것처럼, 창녀도 수많은 남자들에게 간통의 죄를 유발한 여자이기에 또한 온전한 회개가 불가능하다고 바리새인들은 간주한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세리와 창기, 죄인의 친구가 되신 예수는 그들의 죄를 용서하신다. 세리 마태를 제자로 삼으셨다. 누가복음 7장에서 주님께서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초청받아 식사하실 때, ‘동네에 죄를 지은 여인’이 찾아왔고, 그녀는 눈물로 주님의 발을 씻고 머리털로 닦고,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발랐다. 집주인 바리새인 시몬은 그녀가 죄인인데 주님의 몸을 만지게 한 것을 보고는 주님의 존재를 의심하였다. 여인은 바리새인들이 용서할 수 없는 창녀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지만, 주님은 창녀를 용서해 주셨다(7:48).
유대 사회는 결혼을 통한 성적 관계는 허용하지만, 결혼 외의 방법으로 성적 관계를 맺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였다. 그래서 이혼과 재혼을 통해서만 다른 여인과 성적 관계를 허용 받았기에 모세의 증서를 남발하는 유대인 남자들에 대하여 결혼의 신성함을 예수님이 강조하였던 것이다. 요한복음 7장에서 간음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에 대한 주님의 입장은 용서받을 수 없는 간통죄가 아니라, 누구의 죄이든 용서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여주시면서, 모두가 하나님 앞에 죄인인 사실을 드러내었다. 그러면서도 간통의 죄를 다시 짓지 못하도록 여인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이었다(요 8:11).
구약성경에서 창녀에 대한 히브리어는 זֹנָה(조나)이다(창 34:1; 38:15; 레 19:29). 창녀에 대한 율법의 부정적 입장은 음행을 온 땅에 퍼뜨리거나, 아버지의 집을 수치스럽게 만드는 존재로 인식하였기 때문이다(레 19:29; 신 22:21). 이뿐 아니라 구약성경은 가나안 땅의 풍속이었던 산당 혹은 신전의 남창(קָדֵשׁ, 카데쉬)의 존재를 경멸하였다(왕상 14:24; 15:12). 신명기의 법은 엄격하게 신전 창기의 존재를 금지하였지만(23:17), 이스라엘의 타락은 왕국 말년에 예루살렘 성전에도 남창의 집이 존재했음을 알려주고 있다(왕하 23:7).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성적인 방종, 포르네이아(πορνεία)를 비도덕적 죄들로 간주하고, 이 포르네이아(πορνεία)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는 죄라고 분명히 말한다(고전 6:9; 엡 5:5). 특별히 성적인 죄들은 우상숭배의 죄의 다음 목록(간음, 남창, 동성연애)에 들어갈 만큼 심각하게 여겼다(고전 6:9). 당시 헬라문화권에 속한 고린도 지역 분위기가 창녀의 존재를 ‘professional friend’ (ἑταίρα 헤타이라)로 여기며, 결혼 밖의 비밀스러운 성적 관계 맺는 것을 자유롭게 허용하던 헬라 사회의 자유분방한 성윤리를 바울은 거부한다.
고린도 교인 가운데 포르네이아(πορνεία)에 빠져 계모와 관계를 맺은 교인이 버젓이 행세를 하는 것에 바울은 그 음행자를 교회공동체에서 쫓아내라고 강하게 말한다(고전 5:2). 윤리적 도덕적 죄로서의 포르네이아(πορνεία)를 말하면서도, 또한 바울은 종교적 영적 음행자가 있을 것을 염려한다. 당시 고린도에 있던 아프로디테 신전의 1000여 명의 신전창기의 존재를 의식하여, 그들과 철저히 분리된 거룩한 삶을 살기를 교인들에게 요구하였다. ‘성령이 거주하는 몸’으로서 우상신전에서 몸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 창기와 합한다는 것은 결국 우상숭배에 참여하는 것과 같은 것임을 역설한다.
이스라엘의 왕국시대나 바울의 헬라문화권에 창기의 존재는 단순히 결혼관계 밖에서 성적 욕구를 채우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거기에는 종교적 영적 혼합과 방종이 관련되어 있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로마’를 큰 음녀(포르네πόρνη)라고 표현하였다(19:2). 로마는 예언자들과 성도의 피를 그 도성에서 흘린 음란한 창녀라는 것이다. 황제숭배를 거절하는 성도를 박해하고 죽이는 도시 로마를 창녀로 표현한 것이었다. 온 세상을 음행하게(πορνεύω) 만든 창녀(포르네πόρνη)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강조하는 요한계시록이다.
신약성경은 결코 자유로운 성윤리를 말하지 않는다. 성적 방종의 죄는 하나님 나라와 상관이 없다고 말한다. 창기, 창녀의 존재를 헬라문화권에서 비밀스러운 섹스 파트너 혹은 professional friend로 부르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한 사람의 성적 방종이 교회공동체를 더럽히는 큰 악이 될 것임을 바울은 엄격하게 가르쳤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직업적으로 그 일을 택한 사람들에 대한 주님의 사랑과 용서가 있었다는 것이다. 스스로를 의롭게 여기는 바리새인과 다르게 예수님은 세리와 창기를 용서하시고 품어 주시는 영혼의 친구가 되어 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