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점일획


noble death와 자기초월에 관한 묵상

우진성
2022-06-25
조회수 1291

예수의 죽음에 관하여 요한복음에서 두 번 반복되어 나타나는 표현이 있다. "예수께서 당하실 죽음이 어떤 죽음인지를 암시하셨다"는 표현이 그것이다(12:33, 18:32). 생물학적으로 보자면야, 모든 죽음은 공통적이라 할 수 있다. 심장이 멈추거나 뇌가 멈춘 상태처럼 말이다. 그러나 생물학적 죽음 정의를 넘어서면, 죽음에도 종류가 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예수가 어떤 종류의 죽음을 당하셨는지(ποίῳ θανάτῳ = what kind of death)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예수가 어떤 종류의 죽음을 당하셨는지 가장 잘 요약하고 있는 문장을 예수님의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이 어떤 죽음이 될 것인지 이렇게 암시하셨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12:24) 


한마디로 "타자에게 생명을 나눠주는 죽음"이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주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다"(눅22:19) 하셨을 때 역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이 어떤 죽음인지 분명히 말씀하신 것이다. 너희 곧 타자를 위한 죽음이다. 빵에 "자신의 생명"의 의미를 담아 나누어 주신 것이 상징적인 퍼포먼스를 통한 가르침이라면, 아래의 말씀에서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직접적이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인자는 . . .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마가복음 10:45)


분명하게 "타자를 위한 죽음"을 말하고 있다. 

더구나 그 타자는 누군가가 그들을 위해 생명을 희생해야 할만큼 위대하거나 훌륭한 존재들이 아니었다. 경건하지도 의롭지도 않은 사람들이었고 심지어 죄인이라 불릴만한 사람들이었다. 


우리가 아직 약할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제 때에, 경건하지 않은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의인을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더욱이 선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감히 죽을 사람은 드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로마서 5:6-8a)


왜?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바울 사도는 그 답을 하나님의 아가페에서 찾는다. 예수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보여졌다는 것이다.(롬5:8b) 


자, 예수님의 이런 죽음을 “어떤 죽음”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을까? 그리스 전통에서 이런 죽음에 붙여지는 영광스러운 타이틀은 noble death였다. "고귀한 죽음"이라 번역할 수 있지만, 번역해 버리면 "고귀한"이라는 한 수식어 안으로 이런 죽음의 의미가 한정되어 버리니 차라리 번역하지 않고 그냥 noble death라 부르는 것이 낫겠다. 

Noble death를 충족하는 조건은 무엇인가? 

그리스 문학 속에서 강조된 것은 "타자성"이다. 예를 들어 아킬레스에게 죽임당한 트로이 성의 왕자 헥터(일리아드 22장)의 죽음이 보여주는 것처럼 말이다. 친구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에 격노한 아킬레스가 트로이 성문 앞에서 친구를 죽인 헥터를 내놓으라 했을 때, 헥터는 자신이 아킬레스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성문 밖으로 나가 아킬레스의 창을 받았다. 트로이 백성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한 것이니,  한 사람의 죽음이 많은 사람을 살리는 제물이 된 첫 이야기이다. 

2세기 철학자 중 기독교를 반대한 셀서스Celsus는 예수의 죽음이 noble death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 때 그가  제시한 noble death의 기준은 "apatheia" 즉, 감정에 휩싸이지 않는 것이었다. 플라톤의 페이도Phaedo에서 묘사된 소크라테스의 죽음처럼, 감정적 동요조차 없이 조용히 죽음을 받아들이는 모습이야 말로 noble death라는 것이다. 죽음을 앞두고 두려워하였고, 십자가에서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다니?"를 부르짖은 예수의 죽음은 셀서스에게는 한낱 겁장이의 죽음을 뿐이지 noble death와는 거리가 멀었다. 

현대의 신학자 중에 그리스 전통과 순교자 전통을 연구하여 noble death의 기준을 제시한 Sleey라는 학자가 있다. 그는 noble death의 기준으로 다섯 가지의 특징을 제시하였다. 


  • obedience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

  • the overcoming of physical vulnerability 육체적 연약함의 극복

  • a military setting 군사적 폭력적 상황

  • vicariousness 타자성 

  • sacrificial metaphor 희생제사를 함의 


이상에서 noble death의 특징에 대하여 서술했지만, 이것이 noble death의 기준이 되어 예수님의 죽음이 noble death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것은 셀서스의 함정에 빠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수님의 죽음이 noble death의 가장 훌륭한 모범이자, noble death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는 표준이 되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noble death의 특징은 무엇인가? 


  • 하나님의 뜻에 순종: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죽음을 받아들이셨다. 소크라테스처럼 조용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끝내" 받아들인 것이 중요하다. 

  • 타자성: 자신의 잘못이나 이익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위해 혹은 타자 때문에 죽으셨다. 

 

다시 셀서스의 주장으로 돌아가 예수의 죽음을 생각해보자. “죽음을 받아들였다”면 충분하지 “조용히” 받아들이는 태도가 무에 그리 중요할까?  셀서스의 주장은 예수를 흠잡고 기독교를 반대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이해된다. 죽음을 조용히 받아들인 소크라테스 태도의 바탕에는 “소마세마” 즉 육체는 영혼을 가두는 무덤이라는 세계관이 놓여 있는 것이다. 죽음은 육신으로부터 영혼을 해방하는 과정이니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고. 예수에게 그런 세계관은 없었던 듯 보인다. 큰소리로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다니?"를 부르짖었다고 전하는 마가가 강조하는 것은, 철저하게 인간이기에 죽음 앞에 두려움을 느끼는지만 그러나 결국 그 죽음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인 예수의 모습이다. 마가가 전하는 예수의 죽음 이야기의 백미는 예수님의 부르짖음이 아니라 로마 백부장의 고백이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보았을 뿐인데, 그는 죽임당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하였다(15:39). 

로마 백부장이 예수께서 죽어가는 모습에서 본 것은 무엇일까? 인간의 약함을 그대로 하나님께 토로하는 진실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인 용기를 본 것 아닐까? 이 백부장에게는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이 가장 고귀한 죽음이 되었다. 이 고백이 사실상 마가복음의 끝이다. 부활 이야기는 따라올 필요조차 없다. noble death를 감당한 이를 하나님이 살리실 것이라는 점을 굳이 말할 필요가 있는가! 그래서 원마가에는(16:8까지) 부활의 이야기가 없다. noble death를 감당한 이를 신이 살려 하늘로 올리는 것은 그 시대에는 상식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순종과 타자성은 그리스도교 noble death의 기준이 되었고, 이를 보여주신 "예수와 같은 noble death"를 죽는 것이 예수를 따르는 이상적인 길로 제시되었다. 


내 계명은 이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복음 15:12-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자매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요한일서 3:16)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보아라, 악마가 너희를 시험하여 넘어뜨리려고,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감옥에다 집어넣으려고 한다. 너희는 열흘 동안 환난을 당할 것이다. 죽도록 충성하여라(박해를 당할지다로 죽기까지 믿음을 지키라) .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너에게  주겠다.(요한계시록 2:10)


특별히 박해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속사도 문서 중 하나로서 안디옥의 이그나티어스Ignatius가 매그네시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쓴 편지Magnesians에는, 순교의 죽음 없이 예수와 하나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표현까지 등장한다. 


두 개의 동전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의 것입니다. 각각의 동전 위에는 이미지가 새겨 있어서, 믿지 않는 자들은 세상의 이미지를 지니고, 믿는 자들은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이미지를 지닙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능한 것인데, 만일 우리가 고난을 통하여 죽는 길을 자발적으로 선택하지 아니한다면, 예수의 생명은 우리 속에 존재하지 않습니다.(Mag 5:2)


위에 제시한 구절에 담긴 죽음의 요구는 상징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육체적 죽음으로 보아야 한다.  예수께서 죽임당한지 얼마되지 않은 상황 속에서나, 박해 상황속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요청되는 죽음은 생명을 내놓은 죽음이었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막8:34) 명하셨을 때, "자기 십자가"를 그저 고난이나 부담 정도로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이 턱없이 가벼운 해석일 수 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본 뜻은 "나와 함께 올라가 죽자"는 뜻이다. 특히 이 말씀의 마태복음 병행구에서는 그 뜻은 더 분명해 보인다. 박해의 배경을 전제로 말씀하시는 10장에서 "자기 십자가를 나를 따르지 않는다면 내게 적합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셨을 때 그 때 십자가는 육체적 죽음에 대한 각오로 이해해야 한다.(마10:38) 

그러나 십자가 사건으로부터 시간이 과거의 사건이 되었고, 박해 시기가 아닌 때에, 예수의 죽음을 따르는 신앙은 의식ritual을 통하여 상징화 되었다. 실제 육체적 죽음에 대한 각오와 요구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선 반면, 더 넓은 지평 속에서 예수의 죽음을 이해하고 그리스도인들의 죽음을 신앙적으로 고백하게 된 것이다. 예수의 죽음과 하나가 되는 “세례”가(롬6:3-5) 그리스도교 입교 의식이 되었고, 그의 죽음을 기억하는 “주의 만찬”이(고전11:23-26) 초대교회 신앙생활의 중심에 놓였다.  이렇게 제의적으로 예수의 죽음 이야기를 되풀이하고mimetic, 그의 죽음에 참여하여 함께 죽는다는 의식을 반복하는 것이 그리스도교 예배의 핵심 요소였다. 

이를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얻게 된 것은 죽음의 공포를 극복한 것이다. 


또 일생 동안 죽음의 공포 때문에 종노릇하는 사람들을 해방시키시기 위함이었습니다.(히2:15)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우리는 감사를 드립니다.(고전15:55,57) 


죽음의 공포를 극복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신앙적이고 상징적인 차원의 죽음을 선언하면서 새로운 존재로 나아갔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감히 단언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고린도전서 15:31a)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갈라디아서 2:20)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은, 이제부터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들을 위하여 살아가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을 위하여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그분을 위하여 살아가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 . .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고린도후서 5:15, 17)


"예수의 죽음 - 예수와 함께 죽은 우리의 죽음 - 새로운 존재로의 변모"라는 공식은 그리스도인을 변화시켜 성숙으로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 과정을 한마디로 무엇이라 표현할 수 있을까? 부정의 언어로 표현하면 "자기중심적인 나의 죽음"이 될 것이고, 긍정의 언어로 표현하면 "자기 초월"이 될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 그가 보인 noble death에 참여하는 자는, 자기중심적인 나를 죽이고 하나님과 이웃을 향하여 나를 초월하여 나아갈 수 있는 능력을 얻는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정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