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점일획


“반드시 죽으리라” vs. “죽을까 하노라” – 하와를 위한 변명

송민원
2022-05-19
조회수 3092

1. 하와의 문제적 발언

말 한번 했다고 그렇게 비난 받은 사람이 하와 말고 또 있을까요? 하와는 성경 전체에서 딱 두 번 말을 합니다(창3:2-3, 창4:1). 그 중 첫 발언에서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창3:3, 개역개정)”는 표현은 하나님의 말씀(창2:17)을 심각하게 왜곡한 것으로 많은 비난을 받아왔습니다.


두 문장을 비교해 보자면,

창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창3: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는 둘 다 생명나무를 지칭하는 표현이라고 보더라도, 1) “반드시 죽으리라”에서 “반드시”가 빠져 있고, 2) “만지지도 말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없는데 하와가 임의로 첨가했으며, 3) “죽을까 하노라”라는 표현으로써 반드시 죽는다는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확정적인 말씀을 상대적이고 온건한 표현으로 왜곡하거나, 혹은 가능성의 수준으로 격하시켰다는 비난을 받습니다. 하와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의심의 영”으로 가득했고, 이렇게 말을 잘못 옮기는 것은 인류 최초의 여성으로부터 시작된 여자들의 고질적인 질병이며, 그래서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하는 것이라는 데까지 나아가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말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했을까요?


2. 원문 해석과 비교

문제가 되는 본문의 히브리어를 분석해 보겠습니다.


창 2:17 – 하나님의 말씀

וּמֵעֵץ הַדַּעַת טֹוב וָרָע לֹא תֹאכַל מִמֶּנּוּ כִּי בְּיֹום אֲכָלְךָ מִמֶּנּוּ מֹות תָּמוּת

“그러나 좋음(선)과 나쁨(악)의 지식(알게 하는)의 나무에 대해서는, 너는 그것으로부터 먹어서는 안 된다. 네가 그것으로부터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여기서 “반드시(개역한글 “정녕”)”라고 번역한 부분은 부사로 “반드시”란 말이 쓰인 것이 아니고, “너는 죽을 것이다 (תָּמוּת)”라는 동사의 부정사 절대형 (מוֹת)이 동사 앞에 쓰인 형태로, 문법적으로 말하자면 “부정사 절대형의 강조적 용법”이라고 합니다.


창 3:3 – 하와의 말

וּמִפְּרִי הָעֵץ אֲשֶׁר בְּתֹוךְ־הַגָּן אָמַר אֱלֹהִים לֹא תֹאכְלוּ מִמֶּנּוּ וְלֹא תִגְּעוּ בֹּו פֶּן־תְּמֻתוּן

“그러나 동산 한 가운데에 있는 나무의 열매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그것으로부터 먹어서는 안 되고 그것을 만져서도 안 된다, 너희가 죽지 않으려면.”


이 두 문장은 많은 표현들이 서로 다릅니다.

첫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직역: 좋음과 나쁨의 지식의 나무)”라는 표현이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로 바뀌었습니다.

둘째, “만지지 마라”는 표현은 2장의 하나님 말씀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셋째, “정녕 죽으리라”라는 말은 “죽지 않으려면/죽지 않기 위하여”라는 표현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넷째,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는 주어(인칭-성-수)의 변화입니다. 창세기 2장의 동사와 인칭어미는 2인칭 남성 단수(“너는”)인데 반해, 3장의 하와의 말은 2인칭 복수(“너희는”)로 되어 있습니다.


이 차이들을 위에서 제기한 문제들에 비추어 살펴보자면,

우선, 하와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타나는 강한 명령을 결코 완화시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문제는 하와의 פֶּן־תְּמֻתוּן(펜-테무툰)을 “죽을까 하노라”라고 번역한 개역성경에 있습니다. 히브리어 접속사 פֶּן־(펜-)은 “죽을 지도 모른다, 혹은 죽을 수도 있다”는 가정이나 가능성의 뜻이 아닙니다. “죽지 않기 위하여, 혹은 죽지 않으려면”의 뜻으로 영어로 주로 “lest – (should)”로 번역되는 접속사입니다 (참고: 공동번역/우리말성경 “죽지 않으려거든”; 새번역 “어기면 우리가 죽는다고 하셨다”).


하와의 표현인 “죽지 않으려면/죽지 않기 위하여(פֶּן־תְּמֻתוּן 펜-테무툰)”라는 말은 부정사 절대형을 사용한 “반드시(정녕) 죽으리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비해 그 강도가 결코 낮지 않습니다. 같은 의미를 다른 표현으로 썼을 뿐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이거 먹으면 죽어”라는 말이 “죽고 싶지 않으면 먹지 마”라는 말과 대체 얼마나 차이가 난다는 말인가요. 이 두 문장 사이에 어떤 문장이 더 강하고 어떤 문장이 더 약한지, 그 세밀한 뉘앙스의 차이를 판단할 수 있는 사람들은 성경 히브리어의 원어민들밖에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중 어느 누구 하나 지금까지 살아남아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혹여나 살아남았다고 해도 그 대답은 아마 사람들마다 똑같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한, 부정사 절대형이 들어간 표현이 하나님의 명령에 얼마만한 강세를 더하는지 판단할 수 있는 사람 역시 더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반드시/정녕 죽으리라"라고 말하면 100퍼센트 죽는 "강한 명령/단정"이고, 그냥 (부정사 절대형 없이) "죽으리라"고 말하면 살 가능성이 약간이나마 있는 "약한 명령/단정"이 되나요? 그렇다면 십계명의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등의 명령들은 부정사가 사용되지 않은 약한 명령이라 가끔 어겨도 괜찮은가요?


게다가 “만지지도 말라”는 하와의 첨가는 하나님의 명령의 강도를 보다 더 강하게 하면 했지 약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하와의 "죽을까 하노라"가 하나님의 명령의 강도를 약화시켰다고 비난하면서, 왜 "만지지도 말라"가 명령의 강도를 더 강하게 하는 사실은 외면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죽을까"로 번역된 תְּמֻתֽוּן(테무툰)의 마지막 자음 “n(눈)”은 “energic-nun”이라고 불리는 것인데, 전통적인 문법적 시각에서 동사의 의미를 강조할 때 쓰이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참고로, 현대의 비교셈어학적 관점에서는 일종의 고어체 정도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3. 하와 발언의 진정한 왜곡

두 문장의 차이를 히브리어 원문으로 살펴보면, 앞에서 말했지만, 가장 도드라진 변화는 “주어”의 변화입니다. 창세기 2장 17절의 하나님의 명령은 2인칭 남성 단수, 즉 아담에게 주는 명령입니다. 바로 그 앞 절 2장 16절은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로 시작함으로써, 2장 16-17절의 명령이 아담에게(만?) 주어지는 명령임을 분명히 합니다.

사실 하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 하와는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이 구절 다음에서야 “남자가 홀로 있음이 좋지 않다(18절)”고 하시며 여자를 창조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따라서, 하와는 2장 17절의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은 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말을 똑같이 반복하지 못했다는 비난을 하와 혼자만 감당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와에게 따로 전달하지 않았다면 분명 아담이 하와에게 전했을텐데, 전달 시에 오류가 발생했을 가능성도 고려되어야 형평에 맞을 듯 합니다.

문법적으로만 따지자면, 2장 17절의 명령은 하와에게는 해당사항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와는 2장의 “너”를 “너희”로 바꾸면서 남자에게 주는 명령을 자기 자신까지 포함한 명령으로 받아들입니다. 만약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했다고 한다면, 가장 커다란 왜곡의 지점은 바로 여기입니다. 자기 남자에게 주는 명령에 자신까지 포함시킨 죄.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3장 11절에서 하나님이 “네가 너에게 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나무로부터 너는 먹었느냐”라는 문장에서 다시 2인칭 남성단수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3장 17절의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나무로부터 네가 먹었은즉” 역시 2인칭 남성단수입니다. 즉, 하나님은 하와에게 왜 선악과를 먹었느냐고 질책하지 않습니다. 다만, 아담으로 하여금 선악과를 먹게 한 사실만 문제가 됩니다.


4. 정말 여자가 문제인가?

정말 여자가 문제일까요?

말을 잘못 옮기는 성향이 여성의 DNA에 흐르고 있다는 가정이 가능하다면,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3:12)”에서 잘 드러나듯이, 하나님과 여자에게 일타쌍피로 책임을 전가하는 찌질함이 모든 남성의 DNA에 내재되어 있을 것입니다.

만약 문제가 있다면, 자기 남자의 운명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인 여자에게 책임을 전가한, 그리고 그 여자를 자기에게 준 신에게까지 연대책임을 물어 면피하려고 한 인류 최초의 찌질남이, 그리고 자기들이 번역해 놓고 그 번역을 빌미로 지난 2천년간 여성들을 비난해온 찌질남의 후예들이 오히려 문제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