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 소테르σωτὴρ
성경 66권 중에 "구원"σωτηρία(소테리아)이 가장 많이 나오는 책은, 122번 나오는 시편이고 그 다음 70번 나오는 이사야이다. 그리고 "구원"이라는 말이 세 번째로 많이 등장하고, 신약 27권 중에는 가장 많이 등장하는 책이 누가복음이다. 20번 등장하는데, 마태 마가에 9번, 요한에 5번 나오는 것을 감안한다면, 누가복음은 "구원의 복음서"라는 별명으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구원"에 대한 성경의 언급이 많다보니, 성경 전체가 말하는 구원을 하나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늘은 누가복음에 한정하여 과연 구원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 보겠다.
누가복음은 서론에서 아기 예수를 "구원" 모티브를 통해 "구원자"로 예고한다. 누가복음 2장에서 아기 예수의 정결예식을 행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가족이 예루살렘에 올라왔을 때에, 예수님 가족은 금식과 기도에 힘쓰던 여선지자 안나를 만났다. 그녀는 아기 예수를 보자마자, 예루살렘에서 "구원을 기다리던 모든 사람들에게" 이 아기 예수에 관하여 이야기하였다.(2:28) 아기 예수가 장래에 구원을 성취할 것이라 말했을 것이다. 예루살렘에는 메시야를 기다리던 선지자 시므온이 있었는데, 그가 아기 예수를 보고,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2:30)라고 말했다. 예수를 "하나님의 구원"이라고 말한 것이다. 누가복음 3장으로 넘어가면 세례자 요한 이야기가 나온다. 세례자 요한은 세례를 받으러 오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그 길을 곧게 하여라" 선포하면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을 볼 것이다"(3:6)라고 예언하였는데, 그가 말하는 "하나님의 구원"이 곧 예수였다. 이렇게 누가복음은 그 시작부터 여러 예언자를 등장시켜, 예수님이 오시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τὸ σωτήριον τοῦ θεοῦ(토 소테리온 투 쎄우)이 임하는 것이라는 점을 거듭 선포하였다. 누가복음 서론의 이런 신학은 이 구절에 함축적으로 담겨 있다.
누가복음 2:11 오늘 다윗의 동네에서 너희에게 구주σωτὴρ(소테르)가 나셨으니,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
"
"예수님이 구주다"는 누가복음 이 선포는 누가복음 서론 전체를 요약한다. 이 선포 앞에 묻고 싶은 질문은, 구주 예수에게 구원을 받은 자는 누구이며, 그 "구원"의 내용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누가복음 속 네 이야기
이 두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을 수 있는 이야기 넷이 누가복음에 실려 있다. 이 네 이야기는 모두,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선포하시는 (혹은, 비슷하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는 선포) 장면으로 이야기가 끝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네 이야기는 모두 "구원"을 주제로 펼쳐지는 이야기인 것이다.
I. 7장 36~50
한 여인이 예수님의 식사 자리에 와서 귀한 향유가 담긴 옥합을 깨드려 예수님께 발라 드린 이야기는 사복음서 모두에서 만날 수 있다. 그런데 누가복음 외의 세 복음서 속 이야기는 병행되는 하나의 이야기로 취급되어 한글 성경에 병행구 표시(막14:3~9, 마 26:6-13, 요 12:1-8)가 있는 반면, 누가복음 속 이야기에는 병행구 표시가 없다. 한글 성경은 누가복음 7장의 이야기를 완전히 다른 이야기로 취급하는 것이다. 보통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이 나누어 지는데, 이 이야기는 마태, 마가, 요한이 서로 상응하고, 누가가 홀로 떨어진 점이 특이하다. 아래 세 가지 점에서 누가복음은 다르다.
사건의 공간: 다른 세 복음서는 공통적으로 이 일이 베다니에서 일어났다고 보도한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 베다니는 나병환자 시몬을 고쳐주신 장소로 등장하고, 그 집에서 식사 중일 때 사건이 일어났다고 전한다. 요한복음에서 베다니는 죽은 나사로를 살려 주신 장소로 등장하고, 그 나사로의 집에서 식사 중에 사건이 일어났다고 전한다. 그런데 누가복음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전한다. 도시 이름은 명기되지 않은 채, 어느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초대하여 그 집에서 식사 중이라고 전한다. 다른 복음서는 예수님께 호의적인 사람의 집에서 식사 중이라면, 누가복음의 식사 자리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식사 자리였을 것이다.
여인의 정체: 요한복음은 향유를 부은 여인이 나사로의 동생 마리아라고 전한다.(12:3)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은 그저 "한 여인"이라고만 전한다.(막14:3, 마26:7) 반면 누가복음은 "죄인인 한 여자"라고 이 여자를 소개한다. 우리는 이 여인이 왜 죄인이라 불렸는지 그 구체적인 이유는 알지 못한다. 다만, 그 시대가 제시하는 도덕적 종교적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에게 죄인이라는 딱지가 붙었다는 것은 알고 있다.
이야기의 결말: 요한복음에는 여자와 관련된 결말이 없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온 세상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서, 그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으로 이야기가 끝난다. 누가복음에서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ἡ πίστις σου σέσωκέν σε(헤 피스티스 수 세소켄 세)는 말씀으로 끝난다. 소테리아의 동사형 소조σῴζω(소조)의 완료형이 사용된 것이다.
누가가 전하는 향유부은 여인의 이야기는 "의인 대 죄인" 사이의 강력한 대비를 보여준다. 율법을 잘 지켜 스스로를 의롭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바리새인의 집에, 죄인이라 불리는 여인이 찾아 갔으니 말이다. 그 구도 안에서 예수님께서 죄인이라 여겨지던 여인에게 "구원"을 선포하는 이야기인 것이다.
II. 8장 43~48절
열두 해 동안 하혈하는 고통 속에 있는 여인이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그녀는 지나가시는 예수님의 옷에 손을 내었고, 그 결과 그녀의 출혈이 멈추었다. 예수님께서는 누군가가 자신에게 손을 대어 능력이 빠져나간 것을 아시고, 그 사람을 찾으셨는데, 결국 이 여인은 모든 사람 앞에서 왜 예수님께서 손을 댈 수 밖에 없었는지를 말하게 되었다. 여인으로서 수치스러울 수 있는 일에 관한 그녀의 간증이 끝났을 때,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말씀하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8:48) 다시 "구원"의 언어가 여기 나오는 것을 본다.
III. 17장 11~19절
갈릴리와 사마리아 사이 어디에서 예수님께서 열 명의 나병환자를 만나셨다. 그들이 멀찌기 서서 소리질렀다. "예수 선생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시고 말씀 하셨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그들이 가는 동안 그들 몸이 깨끗해졌다. 치유받은 열 명의 나병환자 중에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표한 사람은 딱 한 사람이었다. 그가 예수님에게 돌아와 그 발 아래 엎드려 진심어린 감사를 드렸을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 하셨다. "일어나서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17:19) 이 이야기는 이렇게, 나병이 나은 열 명 중 예수님께 감사드린 사마리아 출신 나병환자 한 사람에게만 구원이 선포되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IV. 19:1~10
나무에 올라간 삭개오를 마주하신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 머물겠다고 하셨다. 주변 사람들은 예수께서 "죄인"의 집에 머물러 가셨다고 수군거리지만, 삭개오는 예수님께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하여 갚아 주겠습니다."고 약속한다. 그 때 예수께서 삭개오에게 이르시길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하셨다.
이렇게 네 이야기 속에는 "구원자 예수님"에게 "구원받은 네 사람 이야기"가 담겨 있다. 누가복음에 "구원"이라는 단어가 20번 나타나지만, "구원" 사건을 명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이 네 이야기는 누가복음 속 "구원"에 대한 우선적인 묵상 자료가 된다.
구원받은 자
"구원" 받았다고 선언된 네 사람에 관해 다시 요약해 보자.
"죄인"이라 불리는 신세였지만, 바리새인 집에 계신 예수를 찾아가, 그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바른 여인.
12년 동안 하혈로 고생하다가 예수의 옷을 만져 치유받고, 많은 사람 앞에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간증한 여인.
치료 받은 열명의 나병환자 중 유일하게 예수를 다시 찾아와 감사의 인사를 드린 사마리아 출신 나병환자.
예수를 뵙기 원하여 나무에 올라갔고, 예수를 만난 이후에는 자발적으로 재산을 포기한 여리고 세리장 삭개오.
이 네 사람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당시 사회에서 "죄인"으로 취급된 사람들이다.
예수님에게 적극적으로 나아왔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행동으로 표현하였다.
이런 두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1도 중요하지만, 2 역시 주목해야할 점이다. 1의 형편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를 향하여 절박한 마음을 가질 가능성이 더 크다. 그러나 자신의 절박함을 표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절박함이 예수를 향한 믿음(신뢰와 사랑)으로 승화된 경우들이다.
구원
헬라어 소테리아σωτηρία/소조σῴζω의 일반적 의미는 자연재해나 병마, 전쟁이나 화재 같은 재난이 주는 곤경과 위험에서 목숨, 건강, 재산 상의 손실을 입지 않았거나 최소화 했다는 것이다. 이 단어가 종교적으로 쓰이면, 그런 구원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이 더해진다. 구약에서 이 단어는 역사적 사건 속에서 경험하는 하나님의 도움을 말하는 방식으로 사용된다. 특히, 원수의 손에서 구해주는 도움을 말하는데, 이스라엘 공동체 차원에서 사용되기도 하였고 개인적 차원에서 사용되기도 하였다.
신구약 중간기에 오면 소테르는 현실의 삶 속에서 경험하는 구원을 넘어 초월적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한다. 최후심판이나 부활의 개념을 포함하는 종말론의 출현이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예를 들어, 마지막 심판 때에 하나님께서 편들어 주시는 것이 "구원"이고, 부활이 "구원"이 되었다. 종말론이 출현한 배경은 박해와 절망인데, 박해 가운데 지켜주시는 것, 절망 가운데 개입하여 도우시는 것이 "구원"으로 받아들여졌다.
신약의 용례에는 위의 두 가지 모두가 포함되어 있지만, 주되게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신약의 "구원"이다. 이 때 하나님 나라는 1)이 땅에서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일 수도 있고, 2)인자가 올 때 이루어질 완성된 하나님나라를 말하는 것일 수도 있고, 3)벧전 1:9(여러분은 믿음의 목표 곧 여러분의 영혼의 구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등이 보여주듯이 죽어서 영혼이 가는 하나님 나라일 수도 있다.
이렇게 구원σωτηρία(소테리아)을 이해하고, 앞서 살핀 네 이야기 속에서 네 명의 주인공들에게 일어난 "구원"의 현실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그들에게 구원이 선포된 다음 일어난 변화는 무엇인가? 먼저 "아니다"라는 부정적 진술부터 해보자.
병자에게는 치유라는 눈에 보이는 변화가 일어났다. 그러나 치유 자체를 구원이라고 볼 수는 없다. 혈루증 여인과 나병환자를 생각해 보라. "구원"은 그들이 치유 받았을 때 선포된 것이 아니다. 혈루증 여인의 경우는 그녀가 예수님에게 손을 댄 이유와 또 곧 낫게 된 경위를 모든 백성 앞에서 밝힌 다음에 "구원"이 선포되었고, 나병환자의 경우는 그가 예수님에게 돌아와 감사를 표현한 다음에 선포되었다.
"구원"을 현실적인 이익이나 이득과 동일시 할 수 없다. 향유를 부은 여인이나 삭개오에게는 세속적 관점에서 돌아간 이익은 없다. 오히려 재산상의 손해를 감수하였다.
사회적 삶의 회복을 구원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병자들은 병이 나은 다음 사회적 관계가 회복될 수 있었겠지만, 그것을 "구원"이라 여겼다면 구원은 치유받고 자신의 공동체로 돌아간 것으로 추정되는 아홉 나병환자에게 선포되어야 했을 것이다. 거기다가 죄인 취급 받은 여인이나 세리장 삭개오가 "구원"이 선포된 이후 자신들의 공동체에서 달리 받아들여졌을 가능성은 없다고 보여진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일어난 구원은 무엇인가? 이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다. 구원이 임하였다는 말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다는 말이다. 지금 그대로의 모습을 하나님께서 수용해 주셨다는 말이다. 이런 언어는 "죄"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죄"는 어떤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1)하나님의 기준(뜻)에 미치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모든 인간은 죄인이다. 그러나 제사장 바리새인 율법학자들은 2)자신들이 기준을 세우고 거기 미치지 못한다는 이유로 일부의 사람들에게 "죄인"의 굴레를 씌웠다. 자신들은 의인이라는 자의식을 강하게 가지면서 말이다. 예수를 초대했던 바리새인 시몬이 향유 부은 여인을 향해 가졌던 마음, "이 여자는 죄인인데!"가 이런 이분법을 잘 드러내 준다. 누가복음에서 구원이 선포된 네 사람은 모두 그 사회에서 2)번 기준에 의해 "죄인"이라 여겨지던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자신을 향하여 보인 믿음의 진정성을 보시고, 그들에게 1)번 의미에서 "죄"가 사해졌다고 선포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구원"에는 말하자면, "세상의 정치-종교 기득권자들은 너희를 향하여 여전히 "죄인"이라 굴레를 씌우겠지만, 끄덕도 하지 마라. 하나님께서 너희를 더 이상 죄인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너희 모습 그대로 받아 주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우리가 추구하는 "구원"의 현실은 이런 것이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나, 믿음의 눈으로 볼 때는 그것이 전부인 것이다.
예수 소테르σωτὴρ
성경 66권 중에 "구원"σωτηρία(소테리아)이 가장 많이 나오는 책은, 122번 나오는 시편이고 그 다음 70번 나오는 이사야이다. 그리고 "구원"이라는 말이 세 번째로 많이 등장하고, 신약 27권 중에는 가장 많이 등장하는 책이 누가복음이다. 20번 등장하는데, 마태 마가에 9번, 요한에 5번 나오는 것을 감안한다면, 누가복음은 "구원의 복음서"라는 별명으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구원"에 대한 성경의 언급이 많다보니, 성경 전체가 말하는 구원을 하나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늘은 누가복음에 한정하여 과연 구원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 보겠다.
누가복음은 서론에서 아기 예수를 "구원" 모티브를 통해 "구원자"로 예고한다. 누가복음 2장에서 아기 예수의 정결예식을 행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가족이 예루살렘에 올라왔을 때에, 예수님 가족은 금식과 기도에 힘쓰던 여선지자 안나를 만났다. 그녀는 아기 예수를 보자마자, 예루살렘에서 "구원을 기다리던 모든 사람들에게" 이 아기 예수에 관하여 이야기하였다.(2:28) 아기 예수가 장래에 구원을 성취할 것이라 말했을 것이다. 예루살렘에는 메시야를 기다리던 선지자 시므온이 있었는데, 그가 아기 예수를 보고,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2:30)라고 말했다. 예수를 "하나님의 구원"이라고 말한 것이다. 누가복음 3장으로 넘어가면 세례자 요한 이야기가 나온다. 세례자 요한은 세례를 받으러 오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그 길을 곧게 하여라" 선포하면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을 볼 것이다"(3:6)라고 예언하였는데, 그가 말하는 "하나님의 구원"이 곧 예수였다. 이렇게 누가복음은 그 시작부터 여러 예언자를 등장시켜, 예수님이 오시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τὸ σωτήριον τοῦ θεοῦ(토 소테리온 투 쎄우)이 임하는 것이라는 점을 거듭 선포하였다. 누가복음 서론의 이런 신학은 이 구절에 함축적으로 담겨 있다.
누가복음 2:11 오늘 다윗의 동네에서 너희에게 구주σωτὴρ(소테르)가 나셨으니,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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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구주다"는 누가복음 이 선포는 누가복음 서론 전체를 요약한다. 이 선포 앞에 묻고 싶은 질문은, 구주 예수에게 구원을 받은 자는 누구이며, 그 "구원"의 내용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누가복음 속 네 이야기
이 두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을 수 있는 이야기 넷이 누가복음에 실려 있다. 이 네 이야기는 모두,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선포하시는 (혹은, 비슷하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는 선포) 장면으로 이야기가 끝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네 이야기는 모두 "구원"을 주제로 펼쳐지는 이야기인 것이다.
I. 7장 36~50
한 여인이 예수님의 식사 자리에 와서 귀한 향유가 담긴 옥합을 깨드려 예수님께 발라 드린 이야기는 사복음서 모두에서 만날 수 있다. 그런데 누가복음 외의 세 복음서 속 이야기는 병행되는 하나의 이야기로 취급되어 한글 성경에 병행구 표시(막14:3~9, 마 26:6-13, 요 12:1-8)가 있는 반면, 누가복음 속 이야기에는 병행구 표시가 없다. 한글 성경은 누가복음 7장의 이야기를 완전히 다른 이야기로 취급하는 것이다. 보통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이 나누어 지는데, 이 이야기는 마태, 마가, 요한이 서로 상응하고, 누가가 홀로 떨어진 점이 특이하다. 아래 세 가지 점에서 누가복음은 다르다.
사건의 공간: 다른 세 복음서는 공통적으로 이 일이 베다니에서 일어났다고 보도한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 베다니는 나병환자 시몬을 고쳐주신 장소로 등장하고, 그 집에서 식사 중일 때 사건이 일어났다고 전한다. 요한복음에서 베다니는 죽은 나사로를 살려 주신 장소로 등장하고, 그 나사로의 집에서 식사 중에 사건이 일어났다고 전한다. 그런데 누가복음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전한다. 도시 이름은 명기되지 않은 채, 어느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초대하여 그 집에서 식사 중이라고 전한다. 다른 복음서는 예수님께 호의적인 사람의 집에서 식사 중이라면, 누가복음의 식사 자리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식사 자리였을 것이다.
여인의 정체: 요한복음은 향유를 부은 여인이 나사로의 동생 마리아라고 전한다.(12:3)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은 그저 "한 여인"이라고만 전한다.(막14:3, 마26:7) 반면 누가복음은 "죄인인 한 여자"라고 이 여자를 소개한다. 우리는 이 여인이 왜 죄인이라 불렸는지 그 구체적인 이유는 알지 못한다. 다만, 그 시대가 제시하는 도덕적 종교적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에게 죄인이라는 딱지가 붙었다는 것은 알고 있다.
이야기의 결말: 요한복음에는 여자와 관련된 결말이 없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온 세상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서, 그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으로 이야기가 끝난다. 누가복음에서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ἡ πίστις σου σέσωκέν σε(헤 피스티스 수 세소켄 세)는 말씀으로 끝난다. 소테리아의 동사형 소조σῴζω(소조)의 완료형이 사용된 것이다.
누가가 전하는 향유부은 여인의 이야기는 "의인 대 죄인" 사이의 강력한 대비를 보여준다. 율법을 잘 지켜 스스로를 의롭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바리새인의 집에, 죄인이라 불리는 여인이 찾아 갔으니 말이다. 그 구도 안에서 예수님께서 죄인이라 여겨지던 여인에게 "구원"을 선포하는 이야기인 것이다.
II. 8장 43~48절
열두 해 동안 하혈하는 고통 속에 있는 여인이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그녀는 지나가시는 예수님의 옷에 손을 내었고, 그 결과 그녀의 출혈이 멈추었다. 예수님께서는 누군가가 자신에게 손을 대어 능력이 빠져나간 것을 아시고, 그 사람을 찾으셨는데, 결국 이 여인은 모든 사람 앞에서 왜 예수님께서 손을 댈 수 밖에 없었는지를 말하게 되었다. 여인으로서 수치스러울 수 있는 일에 관한 그녀의 간증이 끝났을 때,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말씀하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8:48) 다시 "구원"의 언어가 여기 나오는 것을 본다.
III. 17장 11~19절
갈릴리와 사마리아 사이 어디에서 예수님께서 열 명의 나병환자를 만나셨다. 그들이 멀찌기 서서 소리질렀다. "예수 선생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시고 말씀 하셨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그들이 가는 동안 그들 몸이 깨끗해졌다. 치유받은 열 명의 나병환자 중에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표한 사람은 딱 한 사람이었다. 그가 예수님에게 돌아와 그 발 아래 엎드려 진심어린 감사를 드렸을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 하셨다. "일어나서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17:19) 이 이야기는 이렇게, 나병이 나은 열 명 중 예수님께 감사드린 사마리아 출신 나병환자 한 사람에게만 구원이 선포되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IV. 19:1~10
나무에 올라간 삭개오를 마주하신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 머물겠다고 하셨다. 주변 사람들은 예수께서 "죄인"의 집에 머물러 가셨다고 수군거리지만, 삭개오는 예수님께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하여 갚아 주겠습니다."고 약속한다. 그 때 예수께서 삭개오에게 이르시길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하셨다.
이렇게 네 이야기 속에는 "구원자 예수님"에게 "구원받은 네 사람 이야기"가 담겨 있다. 누가복음에 "구원"이라는 단어가 20번 나타나지만, "구원" 사건을 명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이 네 이야기는 누가복음 속 "구원"에 대한 우선적인 묵상 자료가 된다.
구원받은 자
"구원" 받았다고 선언된 네 사람에 관해 다시 요약해 보자.
"죄인"이라 불리는 신세였지만, 바리새인 집에 계신 예수를 찾아가, 그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바른 여인.
12년 동안 하혈로 고생하다가 예수의 옷을 만져 치유받고, 많은 사람 앞에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간증한 여인.
치료 받은 열명의 나병환자 중 유일하게 예수를 다시 찾아와 감사의 인사를 드린 사마리아 출신 나병환자.
예수를 뵙기 원하여 나무에 올라갔고, 예수를 만난 이후에는 자발적으로 재산을 포기한 여리고 세리장 삭개오.
이 네 사람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당시 사회에서 "죄인"으로 취급된 사람들이다.
예수님에게 적극적으로 나아왔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행동으로 표현하였다.
이런 두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1도 중요하지만, 2 역시 주목해야할 점이다. 1의 형편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를 향하여 절박한 마음을 가질 가능성이 더 크다. 그러나 자신의 절박함을 표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절박함이 예수를 향한 믿음(신뢰와 사랑)으로 승화된 경우들이다.
구원
헬라어 소테리아σωτηρία/소조σῴζω의 일반적 의미는 자연재해나 병마, 전쟁이나 화재 같은 재난이 주는 곤경과 위험에서 목숨, 건강, 재산 상의 손실을 입지 않았거나 최소화 했다는 것이다. 이 단어가 종교적으로 쓰이면, 그런 구원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이 더해진다. 구약에서 이 단어는 역사적 사건 속에서 경험하는 하나님의 도움을 말하는 방식으로 사용된다. 특히, 원수의 손에서 구해주는 도움을 말하는데, 이스라엘 공동체 차원에서 사용되기도 하였고 개인적 차원에서 사용되기도 하였다.
신구약 중간기에 오면 소테르는 현실의 삶 속에서 경험하는 구원을 넘어 초월적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한다. 최후심판이나 부활의 개념을 포함하는 종말론의 출현이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예를 들어, 마지막 심판 때에 하나님께서 편들어 주시는 것이 "구원"이고, 부활이 "구원"이 되었다. 종말론이 출현한 배경은 박해와 절망인데, 박해 가운데 지켜주시는 것, 절망 가운데 개입하여 도우시는 것이 "구원"으로 받아들여졌다.
신약의 용례에는 위의 두 가지 모두가 포함되어 있지만, 주되게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신약의 "구원"이다. 이 때 하나님 나라는 1)이 땅에서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일 수도 있고, 2)인자가 올 때 이루어질 완성된 하나님나라를 말하는 것일 수도 있고, 3)벧전 1:9(여러분은 믿음의 목표 곧 여러분의 영혼의 구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등이 보여주듯이 죽어서 영혼이 가는 하나님 나라일 수도 있다.
이렇게 구원σωτηρία(소테리아)을 이해하고, 앞서 살핀 네 이야기 속에서 네 명의 주인공들에게 일어난 "구원"의 현실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그들에게 구원이 선포된 다음 일어난 변화는 무엇인가? 먼저 "아니다"라는 부정적 진술부터 해보자.
병자에게는 치유라는 눈에 보이는 변화가 일어났다. 그러나 치유 자체를 구원이라고 볼 수는 없다. 혈루증 여인과 나병환자를 생각해 보라. "구원"은 그들이 치유 받았을 때 선포된 것이 아니다. 혈루증 여인의 경우는 그녀가 예수님에게 손을 댄 이유와 또 곧 낫게 된 경위를 모든 백성 앞에서 밝힌 다음에 "구원"이 선포되었고, 나병환자의 경우는 그가 예수님에게 돌아와 감사를 표현한 다음에 선포되었다.
"구원"을 현실적인 이익이나 이득과 동일시 할 수 없다. 향유를 부은 여인이나 삭개오에게는 세속적 관점에서 돌아간 이익은 없다. 오히려 재산상의 손해를 감수하였다.
사회적 삶의 회복을 구원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병자들은 병이 나은 다음 사회적 관계가 회복될 수 있었겠지만, 그것을 "구원"이라 여겼다면 구원은 치유받고 자신의 공동체로 돌아간 것으로 추정되는 아홉 나병환자에게 선포되어야 했을 것이다. 거기다가 죄인 취급 받은 여인이나 세리장 삭개오가 "구원"이 선포된 이후 자신들의 공동체에서 달리 받아들여졌을 가능성은 없다고 보여진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일어난 구원은 무엇인가? 이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다. 구원이 임하였다는 말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다는 말이다. 지금 그대로의 모습을 하나님께서 수용해 주셨다는 말이다. 이런 언어는 "죄"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죄"는 어떤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1)하나님의 기준(뜻)에 미치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모든 인간은 죄인이다. 그러나 제사장 바리새인 율법학자들은 2)자신들이 기준을 세우고 거기 미치지 못한다는 이유로 일부의 사람들에게 "죄인"의 굴레를 씌웠다. 자신들은 의인이라는 자의식을 강하게 가지면서 말이다. 예수를 초대했던 바리새인 시몬이 향유 부은 여인을 향해 가졌던 마음, "이 여자는 죄인인데!"가 이런 이분법을 잘 드러내 준다. 누가복음에서 구원이 선포된 네 사람은 모두 그 사회에서 2)번 기준에 의해 "죄인"이라 여겨지던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자신을 향하여 보인 믿음의 진정성을 보시고, 그들에게 1)번 의미에서 "죄"가 사해졌다고 선포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구원"에는 말하자면, "세상의 정치-종교 기득권자들은 너희를 향하여 여전히 "죄인"이라 굴레를 씌우겠지만, 끄덕도 하지 마라. 하나님께서 너희를 더 이상 죄인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너희 모습 그대로 받아 주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우리가 추구하는 "구원"의 현실은 이런 것이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나, 믿음의 눈으로 볼 때는 그것이 전부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