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라어 성경에서 "병을 치료하다"는 의미로 사용된 단어 둘이 있다.
하나는 이아오마이ἰάομαι로 가장 직접적인 의미로 "병을 치료하다"는 의미를 가진다. (1)특별히 육체적 질병에 포커스가 맞춰진 단어이며, 그로부터 회복시키는 행위를 뜻한다. 누가복음-사도행전에 자주 등장하며(예를 들어, 눅 5:17, 6:19, 7:7, 8:47, 14:4, 17:15, 22:51, 행 9:34, 10:38, 28:8)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에서도 치료의 의미로 사용된 단어이다(마 8:8, 13, 15:28, 요 4:47). (2)좁은 의미로 병을 고친다는 의미로 주로 사용되었지만, 질병이 만든 상황으로부터 회복한다는 좀 더 넓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이사야서 61장을 인용하는 마태복음 13장 15절이나 요한복음 12장 40절 말씀의 경우가 그렇게 사용된 경우이다.
"치료하다"의 뜻을 지닌 두 번째 단어는 쎄라퓨오θεραπεύω이다. 영어 쎄라피therapy의 어원이 되는 단어이기 때문에 이아오마이보다는 친숙하다. 쎄라퓨오의 첫 번째 뜻은 "치료하다"가 아니라 "섬기다"serve인데, 특히 "신을 섬기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신약성서에서는 이 의미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는데, 사도행전에 17장에 용례가 있다.
또 하나님께서는, 무슨 부족한 것이라도 있어서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θεραπεύεται쎄라퓨타이) 것이 아닙니다.(행17:25a)
이런 원뜻으로부터 쎄라퓨오는, 단어 그 자체의 의미로 말하자면, 직접적인 치료 이상의 돌봄과 회복까지 포함하는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신약성서 속 실제 사용례에서 쎄라퓨오와 이아오마이에 어떤 의미상의 차이가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이아오마이를 누가-사도행전이 선호 하였다면, 쎄라퓨오는 마태가 선호하였다. 마태복음의 거의 모든 치유 기사에는 쎄라퓨오가 사용되었다.(마 4:24, 8:7, 16, 10:8, 12:15, 22, 14:14, 15:30, 17:16, 18, 19:2, 21:14) 그러나 이런 선호는 의미상의 차이 때문이라기 보다는 복음서 저자들의 단순한 선택으로 보인다.
누가복음의 경우 한 에피소드에서 이 두 단어 모두를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9장에서 열 두 제자를 파송하는 장면에서 그랬다. 1-6절에 서술된 이 에피소드에서 열 두 제자를 파송하시는 예수님께서 "병든 사람을 고쳐주라"고 명하시는 장면이 나오고(2절), 제자들이 [병 혹은 병자를] 고쳐주었다고 보도하는 장면이 나온다(6절). 2절에서는 이아오마이 동사가 사용되었고, 6절에서는 쎄라퓨오 동사가 사용되었다. 둘 사이의 의미상의 차이가 함의 되어 있지 않다.
이 에피소드에서 오히려 주목해야 되는 부분은, 치유가 단순한 육체적 질병의 회복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연결되고 또 복음과 연결된다는 점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신 이유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게"κηρύσσειν τὴν βασιλείαν τοῦ θεοῦ(케류쎄인 텐 바실레이안 투 쎄우, 2절)하려는 것이자, 같은 뜻이지만, "복음을 전하게"εὐαγγελιζόμενοι(유알겔리조메노이, 6절) 하시려는 뜻이었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방식과 복음을 전하는 방식이 이아오마이/쎄라퓨어였다. 병자를 치유하여 병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하나님 나라 운동의 중심이자 그것이 곧 복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며 병든 사람을 고쳐 주게 하시려고 그들을 내보내시며(눅 9:2)
제자들은 나가서, 여러 마을을 두루 다니면서, 곳곳에서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쳤다.(눅 9:6)
누가복음의 다음 장에서 일흔 두 사람을 파송할 때도 하나님 나라와 치유 사이의 연결이 부각된다.
그리고 거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주며 '하나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고 그들에게 말하여라.(눅 10:9)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이 있다. 예수님 당시의 메시아 기대는 묵시적/종말론적 메시아 기대였다. 메시아의 도래와 함께 세상 역사가 끝날 것으로 기대하였고, 메시아가 출현하여서 마지막 "심판"을 행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 기대는 다니엘서 7장 13절 이하에서 먼저 찾아볼 수 있는데, 심판에 대한 기대는 26절에 명시 되어 있다.
13 내가 밤에 이러한 환상을 보고 있을 때에 인자 같은 이가 오는데,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계신 분에게로 나아가, 그 앞에 섰다 . . . 26 그러나 심판이 내려서, 그는 권세를 빼앗기고, 멸망하여 없어질 것이다.
다니엘에 더하여 말라기와 신구약중간기의 묵시서인 에녹1서에도 "메시아=심판자"라는 기대가서려 있음을 볼 수 있다.
1 "내가 나의 특사를 보내겠다. 그가 나의 갈 길을 닦을 것이다. 너희가 오랫동안 기다린 주가, 문득 자기의 궁궐에 이를 것이다. 너희가 오랫동안 기다린, 그 언약의 특사가 이를 것이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2 그러나 그가 이르는 날에, 누가 견디어 내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살아 남겠느냐? . . . 5 내가 너희를 심판하러 가겠다.(말라기 3장)
그러므로 주님은 왕들과 통치자들과 고관들과 지주들에게 이렇게 말하 면서 명령하였다: “혹시 그 택한 자를 알아볼 수 있는지 너희의 눈을 뜨고 눈썹을 올려라!” 영혼들의 주님은 그의 영광의 보좌에 앉았고, 정의의 영이 그에게 부어졌다. 그의 입의 말씀이 죄인들에게 훈계하고 모든 억압자들은 그의 면전에서 소멸될 것이다. 심판의 날에 모든 왕들과 통치자들과 고관들과 지주들이 그를 보고 알게 될 것이다. (에녹1서 62:1 이하)
모두가 심판의 주가 오시길 기다리는 시대에 예수께서 메시아로 오셨다. 그런데 그는 전통적 의미의 승리하는 메시아로 오신 것도 아니었고, 묵시적 의미의 심판자 메시아로 오신 것도 아니었다. 예수께서 행하신 독특한 일은 약하고 아픈 사람들을 치유하고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린 것이다. 여기에 예수 하나님 나라 운동의 독특함이 있다.
이런 독특함 때문에 세례자 요한조차 예수가 메시아인지 아닌지 혼란스러워 하였다.(눅 7:18 이하)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의 행적(눅 7:1-17, 병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을 감옥에 있는 요한에게 보고 하였을 때, 요한은 제자 둘을 예수님께 보내어 예수님이 메시아가 맞는지 묻게 하였다.
"세례자 요한이 우리를 선생님께로 보내어 '선생님이 오실 그분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물어 보라고 하였습니다."(눅 7:20)
잘 생각해 보면 무척 인상적인 장면이다. 세례자 요한 조차, 치유하시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이다. "오실 그 분"이 오셔서 병자를 치유하고 죽은 자를 살리실 것이라는 기대는 메시아 기대 속에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래에 보이는 세례자 요한의 선포를 통하여 우리는, 세례자 요한 역시 "심판자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나는 여러분에게 물로 세례를 주지만, 나보다 더 능력 있는 분이 오실 터인데,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소. 그는 여러분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오. 그는 자기의 타작 마당을 깨끗이 하려고, 손에 키를 들었으니,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오."(눅 3:16-17)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 나라와 치유를 연결하신 누가복음 9장과 10장의 예수님의 파송사가 그 시대 정신 속에서는 몹시 낯설고 새로운 것이었으며, 치유자로 오신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고 영접하기 어려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뒤집어 말 하자면, "치유"는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독특한 특징이었고 예수님 하나님 나라 운동의 중심이었다.
치유를 단순히 육체의 질병을 치료하는 것을 넘어 하나님 나라 운동의 중심으로 이해하는 깊은 묵상이 필요하다.
헬라어 성경에서 "병을 치료하다"는 의미로 사용된 단어 둘이 있다.
하나는 이아오마이ἰάομαι로 가장 직접적인 의미로 "병을 치료하다"는 의미를 가진다. (1)특별히 육체적 질병에 포커스가 맞춰진 단어이며, 그로부터 회복시키는 행위를 뜻한다. 누가복음-사도행전에 자주 등장하며(예를 들어, 눅 5:17, 6:19, 7:7, 8:47, 14:4, 17:15, 22:51, 행 9:34, 10:38, 28:8)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에서도 치료의 의미로 사용된 단어이다(마 8:8, 13, 15:28, 요 4:47). (2)좁은 의미로 병을 고친다는 의미로 주로 사용되었지만, 질병이 만든 상황으로부터 회복한다는 좀 더 넓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이사야서 61장을 인용하는 마태복음 13장 15절이나 요한복음 12장 40절 말씀의 경우가 그렇게 사용된 경우이다.
"치료하다"의 뜻을 지닌 두 번째 단어는 쎄라퓨오θεραπεύω이다. 영어 쎄라피therapy의 어원이 되는 단어이기 때문에 이아오마이보다는 친숙하다. 쎄라퓨오의 첫 번째 뜻은 "치료하다"가 아니라 "섬기다"serve인데, 특히 "신을 섬기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신약성서에서는 이 의미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는데, 사도행전에 17장에 용례가 있다.
또 하나님께서는, 무슨 부족한 것이라도 있어서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θεραπεύεται쎄라퓨타이) 것이 아닙니다.(행17:25a)
이런 원뜻으로부터 쎄라퓨오는, 단어 그 자체의 의미로 말하자면, 직접적인 치료 이상의 돌봄과 회복까지 포함하는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신약성서 속 실제 사용례에서 쎄라퓨오와 이아오마이에 어떤 의미상의 차이가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이아오마이를 누가-사도행전이 선호 하였다면, 쎄라퓨오는 마태가 선호하였다. 마태복음의 거의 모든 치유 기사에는 쎄라퓨오가 사용되었다.(마 4:24, 8:7, 16, 10:8, 12:15, 22, 14:14, 15:30, 17:16, 18, 19:2, 21:14) 그러나 이런 선호는 의미상의 차이 때문이라기 보다는 복음서 저자들의 단순한 선택으로 보인다.
누가복음의 경우 한 에피소드에서 이 두 단어 모두를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9장에서 열 두 제자를 파송하는 장면에서 그랬다. 1-6절에 서술된 이 에피소드에서 열 두 제자를 파송하시는 예수님께서 "병든 사람을 고쳐주라"고 명하시는 장면이 나오고(2절), 제자들이 [병 혹은 병자를] 고쳐주었다고 보도하는 장면이 나온다(6절). 2절에서는 이아오마이 동사가 사용되었고, 6절에서는 쎄라퓨오 동사가 사용되었다. 둘 사이의 의미상의 차이가 함의 되어 있지 않다.
이 에피소드에서 오히려 주목해야 되는 부분은, 치유가 단순한 육체적 질병의 회복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연결되고 또 복음과 연결된다는 점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신 이유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게"κηρύσσειν τὴν βασιλείαν τοῦ θεοῦ(케류쎄인 텐 바실레이안 투 쎄우, 2절)하려는 것이자, 같은 뜻이지만, "복음을 전하게"εὐαγγελιζόμενοι(유알겔리조메노이, 6절) 하시려는 뜻이었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방식과 복음을 전하는 방식이 이아오마이/쎄라퓨어였다. 병자를 치유하여 병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하나님 나라 운동의 중심이자 그것이 곧 복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며 병든 사람을 고쳐 주게 하시려고 그들을 내보내시며(눅 9:2)
제자들은 나가서, 여러 마을을 두루 다니면서, 곳곳에서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쳤다.(눅 9:6)
누가복음의 다음 장에서 일흔 두 사람을 파송할 때도 하나님 나라와 치유 사이의 연결이 부각된다.
그리고 거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주며 '하나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고 그들에게 말하여라.(눅 10:9)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이 있다. 예수님 당시의 메시아 기대는 묵시적/종말론적 메시아 기대였다. 메시아의 도래와 함께 세상 역사가 끝날 것으로 기대하였고, 메시아가 출현하여서 마지막 "심판"을 행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 기대는 다니엘서 7장 13절 이하에서 먼저 찾아볼 수 있는데, 심판에 대한 기대는 26절에 명시 되어 있다.
13 내가 밤에 이러한 환상을 보고 있을 때에 인자 같은 이가 오는데,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계신 분에게로 나아가, 그 앞에 섰다 . . . 26 그러나 심판이 내려서, 그는 권세를 빼앗기고, 멸망하여 없어질 것이다.
다니엘에 더하여 말라기와 신구약중간기의 묵시서인 에녹1서에도 "메시아=심판자"라는 기대가서려 있음을 볼 수 있다.
1 "내가 나의 특사를 보내겠다. 그가 나의 갈 길을 닦을 것이다. 너희가 오랫동안 기다린 주가, 문득 자기의 궁궐에 이를 것이다. 너희가 오랫동안 기다린, 그 언약의 특사가 이를 것이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2 그러나 그가 이르는 날에, 누가 견디어 내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살아 남겠느냐? . . . 5 내가 너희를 심판하러 가겠다.(말라기 3장)
그러므로 주님은 왕들과 통치자들과 고관들과 지주들에게 이렇게 말하 면서 명령하였다: “혹시 그 택한 자를 알아볼 수 있는지 너희의 눈을 뜨고 눈썹을 올려라!” 영혼들의 주님은 그의 영광의 보좌에 앉았고, 정의의 영이 그에게 부어졌다. 그의 입의 말씀이 죄인들에게 훈계하고 모든 억압자들은 그의 면전에서 소멸될 것이다. 심판의 날에 모든 왕들과 통치자들과 고관들과 지주들이 그를 보고 알게 될 것이다. (에녹1서 62:1 이하)
모두가 심판의 주가 오시길 기다리는 시대에 예수께서 메시아로 오셨다. 그런데 그는 전통적 의미의 승리하는 메시아로 오신 것도 아니었고, 묵시적 의미의 심판자 메시아로 오신 것도 아니었다. 예수께서 행하신 독특한 일은 약하고 아픈 사람들을 치유하고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린 것이다. 여기에 예수 하나님 나라 운동의 독특함이 있다.
이런 독특함 때문에 세례자 요한조차 예수가 메시아인지 아닌지 혼란스러워 하였다.(눅 7:18 이하)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의 행적(눅 7:1-17, 병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을 감옥에 있는 요한에게 보고 하였을 때, 요한은 제자 둘을 예수님께 보내어 예수님이 메시아가 맞는지 묻게 하였다.
"세례자 요한이 우리를 선생님께로 보내어 '선생님이 오실 그분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물어 보라고 하였습니다."(눅 7:20)
잘 생각해 보면 무척 인상적인 장면이다. 세례자 요한 조차, 치유하시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이다. "오실 그 분"이 오셔서 병자를 치유하고 죽은 자를 살리실 것이라는 기대는 메시아 기대 속에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래에 보이는 세례자 요한의 선포를 통하여 우리는, 세례자 요한 역시 "심판자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나는 여러분에게 물로 세례를 주지만, 나보다 더 능력 있는 분이 오실 터인데,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소. 그는 여러분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오. 그는 자기의 타작 마당을 깨끗이 하려고, 손에 키를 들었으니,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오."(눅 3:16-17)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 나라와 치유를 연결하신 누가복음 9장과 10장의 예수님의 파송사가 그 시대 정신 속에서는 몹시 낯설고 새로운 것이었으며, 치유자로 오신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고 영접하기 어려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뒤집어 말 하자면, "치유"는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독특한 특징이었고 예수님 하나님 나라 운동의 중심이었다.
치유를 단순히 육체의 질병을 치료하는 것을 넘어 하나님 나라 운동의 중심으로 이해하는 깊은 묵상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