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에서 80번 이상이나 빈번하게 나타나는 단어가 있다. 그것은 ‘약함’(ἀσθένεια 아스데네이아), 형용사 ‘약한’(ἀσθενής, 아스데네스), 동사 ‘약하다’(ἀσθενέω, 아스데네오)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의 반 이상이 바울서신에 나타나는 것을 보면, 바울의 신학을 “약함의 신학” “약함의 선교학”이라 할 수 있다. 바울이 이 단어를 통해 약한 자를 돌보시는 예수의 모습과 전승을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의 ἀσθένεια(아스데네이아, 약함)의 대표적인 모습이 병을 앓게 되는 육체이다. 신약성경에서 약함이라는 단어는 곧 질병을 의미하는 것으로 약 40번 이상 사용되었다(마 8:17; 막 6:56; 눅 4:40; 요 5:3; 행 4:9; 빌 2:26; 딤전 5:23; 딤후 4:20; 약 5:14). 질병을 뜻하는 다른 동어의가 있지만(마 8:17; 고전 11:30), ἀσθένεια(아스데네이아)는 질병을 뜻하였고, 쉽게 병드는 육신의 약함을 말하는 것이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는 깨어 기도하지 못하는 제자들을 향하여 말씀한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ἀσθενή, 막 14:38).
예수님은 육신의 약함에 긍휼의 마음을 가진 목자였다. 약한 자를 부르시는 특별한 호칭이 “작은 자” (μικρός, 미크로스)였다(막 9:42; 마10:42; 11:11; 18:6; 눅 9:48; 12:32; 요 13:33). 이 약함은 육신의 약함, 질병을 뜻하기도 하지만, 사회적으로 소외된 비천하고 낮은 사람들을 뜻하기도 하였다.
바울은 육신의 약함이 이해의 부족으로 나타난다고 말하고(롬 6:19), 또 인간의 약함을 죄성이라고 간주한다. 인간이 약하기에(ἀσθενής, 아스데네스), 예수 그리스도가 죄인들을 위해 죽으셨다고 말한다(롬 5:6). 죄의 권세에 굴복하는 육신을 가진 인간의 모습을 ‘약함’이라는 단어에서 강조한다. 또한 인간의 약함은 영적인 삶을 추구하지 못하기에, 인간의 연약함을 돕기 위해 성령이 역사하여 성도로 기도하게 한다고 말한다(롬 8:26).
바울에게 있어서 ‘약함’은 공동체 안에서도 나타나는데, 믿음의 연약함으로 믿음이 강한 성도와의 불필요한 불화로 이어지고 있음을 말한다(롬 14:1; 고전 8:11). 우상제물을 먹는 문제, 날과 절기를 지키는 문제에 대한 지식과 믿음이 약한 성도로 인한 공동체의 불화를 지적하면서, 바울은 약함을 받아주는 교회공동체가 될 것을 당부한다. 다른 사람의 약함을 이해하고 스스로 약하여 지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이고 삶이었음을 강조한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아스테네이아 ἀσθένεια)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아스데네오, ἀσθενέω),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고후 13:4).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약한 자의 대한 긍휼과 십자가를 지시는 약하게 되는 삶을 자신의 사도적 삶과 신학에 그대로 적용하였다. 육신의 병 때문에 고통 당하여 치유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하지만 원하는 대로 치유되지 못하였다. 하지만 바울은 주의 음성을 듣게 된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ἐν ἀσθενείᾳ)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a).
약한 육신이 약점이 되지 않고 오히려 사도의 삶을 완성해 가는 놀라운 은혜임을 알게 된 바울은 “내가 약한(ἀσθενῶ)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 12:10b)는 유명한 고백으로 약함의 신학을 완성하였다. 그래서 약한 것들, 곧 고난과 고통, 장애와 방해라고 생각되는 모든 것이 결국 성도의 삶을 완성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것이 약한 것들을 자랑하는 신학과 선교학이 되었다(고후 12:5, 9)
어떤 이들이 바울을 ‘육신이 약하고, 말도 시원하지 않다’(고후 10:10)라고 그의 약점들을 가지고 인신공격을 했다. 이 비방은 ‘육신이 병들어 있고, 존재감도 없다’(nobody)라며, 바울의 몸과 정신에 대해서 멸시하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십자가의 사건이 그리스도의 약하게 되심을 말하며, 오직 십자가만을 전하는 선교의 신학을 말한다.
약함 때문에 많은 사람이 자기비하와 자아상실의 고통을 겪고 있다. 하지만 약함을 강함이 되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신비를 알게 되면, 약함조차 자랑하는 긍정의 삶을 만들어낸다. 약한 자(작은 자)에 대한 주님의 사랑을 알고, 약하게 되신 주님의 희생을 알면, 우리는 약함 때문에 결코 좌절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신약성경에서 80번 이상이나 빈번하게 나타나는 단어가 있다. 그것은 ‘약함’(ἀσθένεια 아스데네이아), 형용사 ‘약한’(ἀσθενής, 아스데네스), 동사 ‘약하다’(ἀσθενέω, 아스데네오)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의 반 이상이 바울서신에 나타나는 것을 보면, 바울의 신학을 “약함의 신학” “약함의 선교학”이라 할 수 있다. 바울이 이 단어를 통해 약한 자를 돌보시는 예수의 모습과 전승을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의 ἀσθένεια(아스데네이아, 약함)의 대표적인 모습이 병을 앓게 되는 육체이다. 신약성경에서 약함이라는 단어는 곧 질병을 의미하는 것으로 약 40번 이상 사용되었다(마 8:17; 막 6:56; 눅 4:40; 요 5:3; 행 4:9; 빌 2:26; 딤전 5:23; 딤후 4:20; 약 5:14). 질병을 뜻하는 다른 동어의가 있지만(마 8:17; 고전 11:30), ἀσθένεια(아스데네이아)는 질병을 뜻하였고, 쉽게 병드는 육신의 약함을 말하는 것이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는 깨어 기도하지 못하는 제자들을 향하여 말씀한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ἀσθενή, 막 14:38).
예수님은 육신의 약함에 긍휼의 마음을 가진 목자였다. 약한 자를 부르시는 특별한 호칭이 “작은 자” (μικρός, 미크로스)였다(막 9:42; 마10:42; 11:11; 18:6; 눅 9:48; 12:32; 요 13:33). 이 약함은 육신의 약함, 질병을 뜻하기도 하지만, 사회적으로 소외된 비천하고 낮은 사람들을 뜻하기도 하였다.
바울은 육신의 약함이 이해의 부족으로 나타난다고 말하고(롬 6:19), 또 인간의 약함을 죄성이라고 간주한다. 인간이 약하기에(ἀσθενής, 아스데네스), 예수 그리스도가 죄인들을 위해 죽으셨다고 말한다(롬 5:6). 죄의 권세에 굴복하는 육신을 가진 인간의 모습을 ‘약함’이라는 단어에서 강조한다. 또한 인간의 약함은 영적인 삶을 추구하지 못하기에, 인간의 연약함을 돕기 위해 성령이 역사하여 성도로 기도하게 한다고 말한다(롬 8:26).
바울에게 있어서 ‘약함’은 공동체 안에서도 나타나는데, 믿음의 연약함으로 믿음이 강한 성도와의 불필요한 불화로 이어지고 있음을 말한다(롬 14:1; 고전 8:11). 우상제물을 먹는 문제, 날과 절기를 지키는 문제에 대한 지식과 믿음이 약한 성도로 인한 공동체의 불화를 지적하면서, 바울은 약함을 받아주는 교회공동체가 될 것을 당부한다. 다른 사람의 약함을 이해하고 스스로 약하여 지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이고 삶이었음을 강조한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아스테네이아 ἀσθένεια)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아스데네오, ἀσθενέω), 너희에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고후 13:4).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약한 자의 대한 긍휼과 십자가를 지시는 약하게 되는 삶을 자신의 사도적 삶과 신학에 그대로 적용하였다. 육신의 병 때문에 고통 당하여 치유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하지만 원하는 대로 치유되지 못하였다. 하지만 바울은 주의 음성을 듣게 된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ἐν ἀσθενείᾳ)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a).
약한 육신이 약점이 되지 않고 오히려 사도의 삶을 완성해 가는 놀라운 은혜임을 알게 된 바울은 “내가 약한(ἀσθενῶ)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 12:10b)는 유명한 고백으로 약함의 신학을 완성하였다. 그래서 약한 것들, 곧 고난과 고통, 장애와 방해라고 생각되는 모든 것이 결국 성도의 삶을 완성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것이 약한 것들을 자랑하는 신학과 선교학이 되었다(고후 12:5, 9)
어떤 이들이 바울을 ‘육신이 약하고, 말도 시원하지 않다’(고후 10:10)라고 그의 약점들을 가지고 인신공격을 했다. 이 비방은 ‘육신이 병들어 있고, 존재감도 없다’(nobody)라며, 바울의 몸과 정신에 대해서 멸시하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십자가의 사건이 그리스도의 약하게 되심을 말하며, 오직 십자가만을 전하는 선교의 신학을 말한다.
약함 때문에 많은 사람이 자기비하와 자아상실의 고통을 겪고 있다. 하지만 약함을 강함이 되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신비를 알게 되면, 약함조차 자랑하는 긍정의 삶을 만들어낸다. 약한 자(작은 자)에 대한 주님의 사랑을 알고, 약하게 되신 주님의 희생을 알면, 우리는 약함 때문에 결코 좌절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