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전서 6장 6절은 이렇게 말한다.
6 자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경건은 큰 이득을 줍니다.
이 번역은 "자족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경건이 별 이득이 안된다"는 말처럼 들린다. 새번역과 달리 개역개정은 이렇게 번역한다.
6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경건에 자족하는 마음이 더해지면 큰 이익이 된다는 뜻입니다. 개역개정이 원문에 더 가까운 좋은 번역이다. 오늘 묵상의 주제는 이 구절에 등장하는 자족이다.
자족에 사용된 헬라어는 아우타르케이아αὐτάρκεια이다. 이 합성동사의 어근 동사는 ἀρκέω(아르케오)이다. "충분하다" "만족하다"라는 뜻을 지녔다. 여기에 재귀대명사 αὐτός(아우토스)가 앞에 붙어 합성어로 αὐτάρκεια를 이루었다. "그 자체로 만족하다", "그 자체로 충분하다"라는 기본 뜻을 지닌다. 이 단어를 조금 더 살펴보면 외적 의미와 내적 의미,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는 외적 의미로 "충분히 갖다" "소유가 적절하고 충분하다"는 뜻이 있다. 고린도후서 9장이 이런 뜻을 잘 보여준다.
8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온갖 은혜가 넘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하므로 여러분은 모든 일에 언제나, 쓸 것을 넉넉하게 가지게 되어서, 온갖 선한 일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쓸 것을 넉넉하게 가지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로 자족αὐτάρκεια이 사용되었다. 이 구절은 "자족"과 더불어 "모든 일에 언제나 모든 것을ἐν παντὶ πάντοτε πᾶσαν 넉넉하게 가졌다"라고 말함으로, "자족"이 "필요한 양보다 적게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 만족하는 마음"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자족αὐτάρκεια의 외적 의미는 충분히 쓸 것을 가진 상태를 말한다.
다음은 내적 의미인데, "지금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는 마음"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더 욕심내지 않는 마음이다. 이런 마음의 본을 그리스 철학자들과 구약의 인물들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리스 철학자 중 자족을 설파한 대표적인 인물로 견유학파의 대표적 인물로 고린토에 살았던 디오게네스(BC412~BC323)를 들 수 있다. 견유학파에서 견은 개 견자이다. 그리스어 κῠνῐκός퀴니코스(이 발음이 영어로 가면서 cynic이 되었고, cynical하다, Cynicism의 뿌리가 되었다. 이때 "cyn-" 어근은 헬라어 어근 "κῠν-"에서 온 것으로 "개" 혹은 "개처럼 행동하는"이라는 뜻이다.)에서 온 것이고, 개 처럼 아무 데서나 먹고 마시고 싸고 자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다. 견유학파는 그 정도로 문명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본성대로 사는 삶에 가치를 두었다. 최소한의 물질을 소유하며 자족하며 사는 삶이야 말로 본성대로 사는 삶이라 이해하였다. 디오게네스에 얽힌 유명한 일화가 고린도 바닷가에 세워진 동상을 통해 내려오고 있다. 알렉산더 대왕이 지혜자를 찾는 중 디오게네스를 찾아 왔다고 하는데, 알렉산더 대왕과 디오게네스 사이에 오간 대화는 자족을 잘 보여준다.
알:“디오게네스여, 나는 일찍이 그대의 지혜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어왔소. 묻건대, 내가 그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뭐 없겠소?”
디: “있습니다. 당신이 내 햇볕을 가리지 않게끔 옆으로 조금 비켜서 주시면 됩니다.”
위의 사진에서 디오게네스가 기대고 있는 술통은 그의 잠자리로 알려져 있다.
견유학파의 일원이던 크라테스가 그를 찾아온 제자와 나눈 대화도 자족의 삶을 잘 보여준다.
제: "철학자가 되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나요?"
크: "지갑을 좀 더 쉽게 열어서 손에 잡히는 대로 한 웅큼 쥐어 나누어 줄 수 있게 됩니다. 지금 당신은 지갑 쥔 손을 마비나 된 듯 떨고 있지만... 만일 지갑이 비어 있더라도 괴로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돈이 없으면 원하지 않을 것이고, 가진 것으로 만족하면서 가지지 못한 것을 바라거나 자신의 상황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스토아 학파도 비슷한 사상을 가지고 있다. 스토아 학파가 최고로 여기는 삶의 방식은 이성이 지배하는 삶, 질서와 균형이 잡힌 삶인데, 그 정반대에 있는 삶이 충동(ὁρμή오르메)이 지배하는 삶이다. 이때 충동은 자족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밖에서 받는 자극과 그 자극에 의해 격발된 격정과 정열을 말한다. 충동이 지배하면 내적인 이성의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되고, 자족하는 마음이 깨어진다고 설명한다. 가장 조심해야할 것이 바로 충동이고, 가장 이상적인 삶이 바로 자족이다.
이런 식으로 그리스 철학자들, 특히 국가나 사회 보다는 개인의 삶에 관심을 가진 철학자들은 좋은 삶을 영위하는 최선의 가치로 "자족" αὐτάρκεια을 꼽았다.
구약으로 넘아가 자족을 찾아보자.
창세기 45:28 "이제는 죽어도 한이 없다. 내 아들 요셉이 아직 살아 있다니! 암, 가고말고! 내가 죽기 전에 그 아이를 보아야지!" 하고 이스라엘은 중얼거렸다.
"죽어도 여한이 없는" 상태보다 자족을 잘 설명하는 표현은 없다. 야곱이 그의 아들들로부터 요셉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 소식이 얼마나 감사한지,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죽어도 한이 없다는 탄성을 질렀다. 요셉이 살아 있는 것으로 하나님께 받을 은혜를 다 받았다는 고백이다.
신명기 3장 26절에서는 주님께서 모세에게 자족의 경계를 그어주시는 장면이 나온다. 모세가 가나안 진입을 허락받지 못하자 주님께 "부디 저를 건너가게 하여 주싮시오."(3:25)라고 간구한다. 그 간구에 대한 주님의 응답이 26절에 나오는데, 주님의 응답 중에 이 말씀이 핵심이다. "이것으로 네게 족하니, 이 일 때문에 더 이상 나에게 말하지 말아라." 광야 40년 이스라엘을 이끌어 온 것, 그 과정에서 주님께서 동행하여 주신 은혜에 자족하라는 말씀을 모세에게 주신 것이다.
구약에서 한 군데 더 살펴볼 본문은 잠언 30장 8절의 말씀이다.
허위와 거짓말을 저에게서 멀리하여 주시고,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오직 저에게 필요한 양식만을 주십시오.
이 구절의 마지막 문장을 LXX로(σύνταξον δέ μοι τὰ δέοντα καὶ τὰ αὐτάρκη) 읽고 직역하면, 위의 새번역 번역과 조금 다른게, "내가 꼭 필요한 것만 갖게 하시고, 자족을 가르쳐 주십시오"가 된다. 잠언의 이 문장에 αὐτάρκεια(자족)의 외적 내적 의미 모두가 나온다. 위에서 말했듯이, 자족은 "꼭 필요한 것을 갖는 것"이라는 외적 의미와 "거기에 만족하는 마음"이라는 내적 의미를 갖는다. 왜 자족하는 것이 중요한가? 이어지는 9절이 이렇게 설명한다.
9 제가 배가 불러서, 주님을 부인하면서 '주가 누구냐'고 말하지 않게 하시고, 제가 가난해서, 도둑질을 하거나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거나, 하지 않도록 하여 주십시오.
구약에서 자족은, 스스로 욕심을 통제하며 살라는 윤리적 요청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미 받은 충분한 은혜와 사랑을 인정하라는 요청을 의미한다. 이 점이 앞서 살핀 그리스 철학자들의 자족과 구약의 자족이 다른 점이다.
자, 이제 바울 사도가 보여준 삶의 태도인 자족을 거쳐 디모데전서 본문으로 가 보자.
빌립보서 4:11 내가 궁핍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12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13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다고 할 때, 바울 사도는 αὐτάρκεια를 사용하였다. 자족하는 법을 배웠다는 말이다. 바울 사도가 말하는 자족의 태도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그 다음 이어지는 12-13절 두 절이 잘 설명하고 있다. 12절은 설명이 필요없으나, 13절은 그동안 명백히 잘못 사용되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님 주시는 능력 안에서 무엇이나 이룰 수 있다"는 식으로 해석되곤 하는데, 문맥이 보여주듯 바울 사도가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할 수 있다는 "모든 것"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어떤 상황 안에서도 자족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 것이다. 13절도 자족을 말하는 것이지, 기도의 능력이나 다른 무엇을 말하는 구절이 아니다.
자족하는 삶의 구체적인 모습을 빌립보서 4:11절 앞 절에서 나열하고 있어 귀하다.
4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다시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5 여러분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6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을 오직 기도와 간구로 하고,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기쁨", "수용", "기도와 간구" "감사" 등이 자족하는 태도의 특징으로 나열되어 있다.
자, 다시 디모데전서 6장으로 가보자. 위에서 사역하였듯이 "경건에 자족을 겸비하면 큰 유익이 된다"고, 자족할 것을 권면한다. 6절의 이 구절 앞 뒤 말씀은 자족에 대한 이해를 넓혀 준다.
5 그리고 마음이 썩고, 진리를 잃어서, 경건을 이득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 사이에 끊임없는 알력이 생깁니다.
5절에서는 경건을 이득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일으키는 갈등에 대한 진술이 나온다. 6절과 연결하여 이해하면 경건(신앙생활)이 이득을 추구하는 수단이 되지 않으려면 자족을 겸비해야 한다는 말이 된다. 자족은 진실한 신앙에 대한 실증이다.
7-8절은 자족의 기준을 보여준다.
7 우리는 아무것도 세상에 가지고 오지 않았으므로, 아무것도 가지고 떠나갈 수 없습니다.
8 우리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 가르쳐주신 기도의 언어로 8절을 달리 표현하면 "일용할 양식"이 된다. 일용한 양식이 있는 상태가 자족이다. 즉 삶을 살아가는데 기본적으로 필요한 물질을 가지고 있는 상태가 외적 의미의 자족이다. 그것이 갖추어 지지 않았다면 자족의 상태가 아니니, 그것을 갖추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갖추어졌다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그렇게 만족하며 감사하는 마음이 내적 의미의 자족이다.
디모데전서 6장 6절은 이렇게 말한다.
6 자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경건은 큰 이득을 줍니다.
이 번역은 "자족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경건이 별 이득이 안된다"는 말처럼 들린다. 새번역과 달리 개역개정은 이렇게 번역한다.
6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경건에 자족하는 마음이 더해지면 큰 이익이 된다는 뜻입니다. 개역개정이 원문에 더 가까운 좋은 번역이다. 오늘 묵상의 주제는 이 구절에 등장하는 자족이다.
자족에 사용된 헬라어는 아우타르케이아αὐτάρκεια이다. 이 합성동사의 어근 동사는 ἀρκέω(아르케오)이다. "충분하다" "만족하다"라는 뜻을 지녔다. 여기에 재귀대명사 αὐτός(아우토스)가 앞에 붙어 합성어로 αὐτάρκεια를 이루었다. "그 자체로 만족하다", "그 자체로 충분하다"라는 기본 뜻을 지닌다. 이 단어를 조금 더 살펴보면 외적 의미와 내적 의미,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는 외적 의미로 "충분히 갖다" "소유가 적절하고 충분하다"는 뜻이 있다. 고린도후서 9장이 이런 뜻을 잘 보여준다.
8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온갖 은혜가 넘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하므로 여러분은 모든 일에 언제나, 쓸 것을 넉넉하게 가지게 되어서, 온갖 선한 일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쓸 것을 넉넉하게 가지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로 자족αὐτάρκεια이 사용되었다. 이 구절은 "자족"과 더불어 "모든 일에 언제나 모든 것을ἐν παντὶ πάντοτε πᾶσαν 넉넉하게 가졌다"라고 말함으로, "자족"이 "필요한 양보다 적게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 만족하는 마음"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자족αὐτάρκεια의 외적 의미는 충분히 쓸 것을 가진 상태를 말한다.
다음은 내적 의미인데, "지금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는 마음"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더 욕심내지 않는 마음이다. 이런 마음의 본을 그리스 철학자들과 구약의 인물들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리스 철학자 중 자족을 설파한 대표적인 인물로 견유학파의 대표적 인물로 고린토에 살았던 디오게네스(BC412~BC323)를 들 수 있다. 견유학파에서 견은 개 견자이다. 그리스어 κῠνῐκός퀴니코스(이 발음이 영어로 가면서 cynic이 되었고, cynical하다, Cynicism의 뿌리가 되었다. 이때 "cyn-" 어근은 헬라어 어근 "κῠν-"에서 온 것으로 "개" 혹은 "개처럼 행동하는"이라는 뜻이다.)에서 온 것이고, 개 처럼 아무 데서나 먹고 마시고 싸고 자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다. 견유학파는 그 정도로 문명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본성대로 사는 삶에 가치를 두었다. 최소한의 물질을 소유하며 자족하며 사는 삶이야 말로 본성대로 사는 삶이라 이해하였다. 디오게네스에 얽힌 유명한 일화가 고린도 바닷가에 세워진 동상을 통해 내려오고 있다. 알렉산더 대왕이 지혜자를 찾는 중 디오게네스를 찾아 왔다고 하는데, 알렉산더 대왕과 디오게네스 사이에 오간 대화는 자족을 잘 보여준다.
알:“디오게네스여, 나는 일찍이 그대의 지혜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어왔소. 묻건대, 내가 그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뭐 없겠소?”
디: “있습니다. 당신이 내 햇볕을 가리지 않게끔 옆으로 조금 비켜서 주시면 됩니다.”
위의 사진에서 디오게네스가 기대고 있는 술통은 그의 잠자리로 알려져 있다.
견유학파의 일원이던 크라테스가 그를 찾아온 제자와 나눈 대화도 자족의 삶을 잘 보여준다.
제: "철학자가 되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나요?"
크: "지갑을 좀 더 쉽게 열어서 손에 잡히는 대로 한 웅큼 쥐어 나누어 줄 수 있게 됩니다. 지금 당신은 지갑 쥔 손을 마비나 된 듯 떨고 있지만... 만일 지갑이 비어 있더라도 괴로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돈이 없으면 원하지 않을 것이고, 가진 것으로 만족하면서 가지지 못한 것을 바라거나 자신의 상황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스토아 학파도 비슷한 사상을 가지고 있다. 스토아 학파가 최고로 여기는 삶의 방식은 이성이 지배하는 삶, 질서와 균형이 잡힌 삶인데, 그 정반대에 있는 삶이 충동(ὁρμή오르메)이 지배하는 삶이다. 이때 충동은 자족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밖에서 받는 자극과 그 자극에 의해 격발된 격정과 정열을 말한다. 충동이 지배하면 내적인 이성의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되고, 자족하는 마음이 깨어진다고 설명한다. 가장 조심해야할 것이 바로 충동이고, 가장 이상적인 삶이 바로 자족이다.
이런 식으로 그리스 철학자들, 특히 국가나 사회 보다는 개인의 삶에 관심을 가진 철학자들은 좋은 삶을 영위하는 최선의 가치로 "자족" αὐτάρκεια을 꼽았다.
구약으로 넘아가 자족을 찾아보자.
창세기 45:28 "이제는 죽어도 한이 없다. 내 아들 요셉이 아직 살아 있다니! 암, 가고말고! 내가 죽기 전에 그 아이를 보아야지!" 하고 이스라엘은 중얼거렸다.
"죽어도 여한이 없는" 상태보다 자족을 잘 설명하는 표현은 없다. 야곱이 그의 아들들로부터 요셉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 소식이 얼마나 감사한지,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죽어도 한이 없다는 탄성을 질렀다. 요셉이 살아 있는 것으로 하나님께 받을 은혜를 다 받았다는 고백이다.
신명기 3장 26절에서는 주님께서 모세에게 자족의 경계를 그어주시는 장면이 나온다. 모세가 가나안 진입을 허락받지 못하자 주님께 "부디 저를 건너가게 하여 주싮시오."(3:25)라고 간구한다. 그 간구에 대한 주님의 응답이 26절에 나오는데, 주님의 응답 중에 이 말씀이 핵심이다. "이것으로 네게 족하니, 이 일 때문에 더 이상 나에게 말하지 말아라." 광야 40년 이스라엘을 이끌어 온 것, 그 과정에서 주님께서 동행하여 주신 은혜에 자족하라는 말씀을 모세에게 주신 것이다.
구약에서 한 군데 더 살펴볼 본문은 잠언 30장 8절의 말씀이다.
허위와 거짓말을 저에게서 멀리하여 주시고,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오직 저에게 필요한 양식만을 주십시오.
이 구절의 마지막 문장을 LXX로(σύνταξον δέ μοι τὰ δέοντα καὶ τὰ αὐτάρκη) 읽고 직역하면, 위의 새번역 번역과 조금 다른게, "내가 꼭 필요한 것만 갖게 하시고, 자족을 가르쳐 주십시오"가 된다. 잠언의 이 문장에 αὐτάρκεια(자족)의 외적 내적 의미 모두가 나온다. 위에서 말했듯이, 자족은 "꼭 필요한 것을 갖는 것"이라는 외적 의미와 "거기에 만족하는 마음"이라는 내적 의미를 갖는다. 왜 자족하는 것이 중요한가? 이어지는 9절이 이렇게 설명한다.
9 제가 배가 불러서, 주님을 부인하면서 '주가 누구냐'고 말하지 않게 하시고, 제가 가난해서, 도둑질을 하거나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거나, 하지 않도록 하여 주십시오.
구약에서 자족은, 스스로 욕심을 통제하며 살라는 윤리적 요청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미 받은 충분한 은혜와 사랑을 인정하라는 요청을 의미한다. 이 점이 앞서 살핀 그리스 철학자들의 자족과 구약의 자족이 다른 점이다.
자, 이제 바울 사도가 보여준 삶의 태도인 자족을 거쳐 디모데전서 본문으로 가 보자.
빌립보서 4:11 내가 궁핍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12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13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다고 할 때, 바울 사도는 αὐτάρκεια를 사용하였다. 자족하는 법을 배웠다는 말이다. 바울 사도가 말하는 자족의 태도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그 다음 이어지는 12-13절 두 절이 잘 설명하고 있다. 12절은 설명이 필요없으나, 13절은 그동안 명백히 잘못 사용되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님 주시는 능력 안에서 무엇이나 이룰 수 있다"는 식으로 해석되곤 하는데, 문맥이 보여주듯 바울 사도가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할 수 있다는 "모든 것"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어떤 상황 안에서도 자족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 것이다. 13절도 자족을 말하는 것이지, 기도의 능력이나 다른 무엇을 말하는 구절이 아니다.
자족하는 삶의 구체적인 모습을 빌립보서 4:11절 앞 절에서 나열하고 있어 귀하다.
4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다시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5 여러분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6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을 오직 기도와 간구로 하고,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기쁨", "수용", "기도와 간구" "감사" 등이 자족하는 태도의 특징으로 나열되어 있다.
자, 다시 디모데전서 6장으로 가보자. 위에서 사역하였듯이 "경건에 자족을 겸비하면 큰 유익이 된다"고, 자족할 것을 권면한다. 6절의 이 구절 앞 뒤 말씀은 자족에 대한 이해를 넓혀 준다.
5 그리고 마음이 썩고, 진리를 잃어서, 경건을 이득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 사이에 끊임없는 알력이 생깁니다.
5절에서는 경건을 이득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일으키는 갈등에 대한 진술이 나온다. 6절과 연결하여 이해하면 경건(신앙생활)이 이득을 추구하는 수단이 되지 않으려면 자족을 겸비해야 한다는 말이 된다. 자족은 진실한 신앙에 대한 실증이다.
7-8절은 자족의 기준을 보여준다.
7 우리는 아무것도 세상에 가지고 오지 않았으므로, 아무것도 가지고 떠나갈 수 없습니다.
8 우리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 가르쳐주신 기도의 언어로 8절을 달리 표현하면 "일용할 양식"이 된다. 일용한 양식이 있는 상태가 자족이다. 즉 삶을 살아가는데 기본적으로 필요한 물질을 가지고 있는 상태가 외적 의미의 자족이다. 그것이 갖추어 지지 않았다면 자족의 상태가 아니니, 그것을 갖추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갖추어졌다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그렇게 만족하며 감사하는 마음이 내적 의미의 자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