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점일획


‘늙음(자껜 זָקֵן)’에 대한 묵상

송민원
2023-11-01
조회수 2134


잠 1:8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잠언은 부모가 아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의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아들”이라는 표현이 불편하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잠언의 내용이 반드시 아들에게만 해당되고 딸은 아무 상관없는가 하고 물으실 수도 있습니다. 사실 구약성경은 기본적으로 여성을 독자로 고려하고 있지 않습니다. 당시의 시대가 그러했으니까요. 우리는 여자를 교육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던 고대 이스라엘의 가부장적 문화의 한계를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동시에 고대 이스라엘의 언어를 21세기 대한민국에 문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새번역성경은 “아이들아”라고 남녀를 다 포함해서 번역하였습니다. 이 번역이 우리 시대를 잘 반영한 좋은 번역이긴 합니다만, 잠언의 모든 경우에 적용할 수 있는 번역은 아닙니다. 잠언의 내용 중 실제로 남성에게만 해당되는 내용도 상당하니까요.

‘늙은’이라는 의미의 형용사이자, 명사로는 ‘장로’로 번역되는 자껜(זָקֵן)은 어원적으로 ‘수염’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긴 턱수염을 가리키는 히브리어가 바로 자깐(זָקָן)입니다. ‘수염 난 사람’이 곧 ‘늙은’ 사람이고 ‘장로’입니다. 그렇다면 장로는 남자만 될 수 있나요?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그랬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시대가 다릅니다. 나이든 사람이라고 모두 수염을 기르는 것도 아니고, 나이 많은 남성만 ‘어른’으로서 사회의 대접을 받는 시대도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고대 이스라엘과 지금 우리 사회가 다르다는 사실을 분명히 염두에 두고서, 남성중심사회의 언어로 되어 있는 성경의 내용을 어떻게 우리 시대에 적용할 수 있을까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그러기 전에 먼저,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왜 “내 아들아” 같은 표현을 썼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잠 1:10 내 아들아 악한 자가 너를 꾈지라도 따르지 말라

             잠 1:11 그들이 네게 말하기를 우리와 함께 가자 우리가 가만히 엎드렸다가 사람의 피를 흘리자 죄 없는 자를 까닭 없이 숨어 기다리다가

             잠 1:12 스올 같이 그들을 산 채로 삼키며 무덤에 내려가는 자들 같이 통으로 삼키자


이 구절은 악한 세력이 젊은 아들을 나쁜 길로 꾀려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잠언을 이해하는 아주 중요한 가치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늙음”과 “젊음”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사회문화적 가치입니다. 고대사회와 현대는 이 지점에서 정반대의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과거지향적 세계관과 미래지향적 세계관


현대인은 기본적으로 미래지향적입니다. 우리는 아이들과 젊은이들에게 “너희 앞에 있는 미래”라는 표현을 씁니다. 미래는 앞에 놓여 있습니다. 이 말은 현대사회가 시간의 관점에서 미래를 바라보고 서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과거를 향해 서 있습니다. 과거지향적인 세계관입니다. 히브리어의 ‘께뎀’(קֶדֶם)이라는 단어는 장소적으로 동쪽을 가리키면서 동시에 앞쪽을 가리킵니다. 고대인들이 동쪽을 향해 서 있기 때문에 히브리어에서 오른쪽 ‘야민’(יָמִין)은 남쪽이 되고, 왼쪽 ‘세몰’(שְׂמוֹל)은 북쪽이 됩니다.

다음은 이 “께뎀”이라는 단어가 “앞”을 나타내는 의미로 쓰인 경우입니다.

            

시 68:26 가객은 앞서고 악사는 뒤따르나이다

             합 1:9 그들은 다 강포를 행하러 오는데 앞을 향하여 나아가며


동시에 이 “케뎀”이 시간적인 의미로 쓰일 때는 과거를 나타냅니다. 즉, 고대인들은 과거를 앞에 두고 서 있습니다.


             욘 4:2 내가 이전에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시 119:147 내가 날이 밝기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참고로, 요나서 4:2의 ‘끼담티’(קִדַּמְתִּי)를 개역한글과 개역개정은 “빨리”로, 새번역은 “서둘러”, 쉬운성경과 현대인의성경은 “급히”로 번역하였습니다만 이것은 그리 적절한 번역이 아닙니다. KJV의 “before”, CEB의 “earlier”, NRSV의 “at the beginning” 등이 보다 올바른 번역입니다.


과거를 향해 서 있기 때문에 미래는 뒤에 놓이게 됩니다. 창세기 9장 9절의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세우리니)”에서 “후손”이라는 번역의 히브리어 원어를 직역하면 “너희 뒤에 오는 너희 씨앗”입니다. 선조들이 과거를 향해 서 있기 때문에 후손들은 뒤에 위치하게 됩니다. 한자로 ‘뒤 후’(後) 자를 쓰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서양의 영향을 받기 이전의 한자문화권도 과거지향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미래지향적인 현대인에게 “영원”(eternity)이라는 단어는 일차적으로 아주 먼 미래를 상상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영원”이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올람’(עוֹלָם)의 본 뜻은 “아주 먼 과거, 태고적”을 의미합니다. 신명기 32장 7절은 ‘올람’의 본 뜻을 아주 잘 드러냅니다.


                [개역개정]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말하리로다

                [새번역] 아득한 옛날을 회상하여 보아라 조상 대대로 내려 온 세대를 생각하여 보아라. 너희의 아버지에게 물어 보아라. 그가 알려줄 것이다. 어른들에게 물어 보아라. 그들이 너희에게 말해줄 것이다.


여기서 “옛날”(개역개정), “아득한 옛날”(새번역)로 번역된 단어가 바로 ‘올람’입니다. 사람들이 과거를 향해 서 있는 세계에서는 과거를 기억하는 것이 아주 중요한 의무가 됩니다. 그래서 ‘올람’(옛날)에 더 가까이 서 있는 부모 세대와 조상들에게 과거에 대해 물어보라고 신명기는 가르치고 있습니다. 과거에 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늙음”의 가치


미래지향적인 문화권에서 갖는 “늙음”의 가치와 과거지향적인 세계관이 바라보는 “늙음”의 가치는 전혀 다릅니다. 미래를 향해 서 있는 현대사회에서 늙음은 “뒤쳐짐”과 “퇴보”, “쓸모 없음”과 “사라짐”을 뜻합니다. 사람은 늙을수록 효용가치와 존재가치를 잃어갑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으로 빠르게 변화되는 현대 정보사회에서 오히려 젊은 사람이 더 많이 알고 더 현명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늙어가는 과정을 늦추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노화’에는 ‘대책’이 필요하고 ‘노후’는 ‘대비’가 필요합니다. ‘안티에이징(anti-aging)’에 소홀히 하다간 나도 모르는 사이 주름과 살 처짐이 얼굴을 덮어버릴 것입니다.

  

반면에 과거지향적인 세계에서 늙는다는 것은 경험이 더 많아지고 더 지혜로워지고 하나님의 뜻을 더 잘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음의 문장은 미래지향적 세계관을 가지고서는 잘 이해되지 못합니다.


             창 24:1 아브라함이 나이가 많아 늙었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

             창 25:1 아브라함이 후처를 맞이하였으니 그의 이름은 그두라라

             창 25:2 그가 시므란과 욕산과 므단과 미디안과 이스박과 수아를 낳고


아브라함의 “늙음”을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늙음과 하나님의 축복을 연결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또한, 아브라함이 나이가 많이 “늙었음에도 불구하고” 후처를 맞이한 것으로 이해되기 쉽습니다. 하지만 고대인에게 늙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나보다 더 늙은 사람은 나보다 더 ‘앞서’ 있는 사람이고 나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나이든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패턴과 규범을 더 많이 경험했으며 더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잠언 1장 8절의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는 말씀은 이러한 과거지향적 세계관 속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과거지향적 세계관의 관점에서 보는 “젊음/청년”의 의미


여기서 “아들”로 상징되는 젊음과 젊은이는 아직 성년에 이르지 못한, 그래서 아직 지혜에 다다르지 못한 상태를 나타냅니다. 아직 완성단계에 이르지 못한 청년은 어디로 튈지 모릅니다. 그래서 잠언은 이 젊은이를 가운데 두고 지혜 세력과 그에 반하는 세력(무지/악인/음녀)이 서로 데려가려고 다투는 싸움의 구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1장 9-10절의 “내 아들아 악한 자가 너를 꾈지라도 따르지 말라”는 구절은 과거지향적 세계관이 젊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한편에서는 악인들이 젊은이를 유혹할 때 그 맞은 편에는 지혜가 청년을 부르고 있습니다.


잠 1:20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잠 1:21 시끄러운 길목에서 소리를 지르며 성문 어귀와 성중에서 그 소리를 발하여 이르되

잠 1:22 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 미련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니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잠 1:23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며 내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고대 이스라엘의 과거지향적 세계관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야 성경의 내용을 올바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고대인들의 언어적 특성을 이해하고, 그 언어 속에 담겨 있는 사회적, 문화적 독특성을 파악한 상태에서, 우선 그들의 시각과 가치관으로 성경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다”라는 문장이 과거지향적인 인간에게 주는 의미는 그것이 미래지향적인 인간에게 주는 의미와 같을 수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