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점일획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묵상 (출애굽기 3:14-15)

송민원
2024-03-29
조회수 2186

종교개혁 이후 지난 500년 간의 “믿음(피스티스)의 시대”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하나님을 믿느냐 안 믿느냐’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물어야 할, 어쩌면 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대체 어떤 하나님을 믿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믿는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으로 이해하는가가 그 신앙이 어떤 신앙인지를 결정합니다.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 ‘신실하신(한결같고 변함 없으신) 하나님,’ 혹은 ‘의로우신(정의와 심판의) 하나님’ 등, 우리가 사용하는 하나님에 대한 수식어들은 자신의 믿음을 표현하는 신앙고백입니다. ‘나는 어떤 하나님을 믿는가’ –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이 항상 스스로에게 되물어야 하는 질문입니다.


“스스로 있는 자” 혹은 “나는 곧 나다”


여기, 하나님께서 자신을 직접 소개하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바로 그 유명한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אֶהְיֶה אֲשֶׁר אֶהְיֶה)’입니다(출 3:14). 에흐예(אֶהְיֶה)는 히브리어에서 가장 흔하게 쓰이는 동사 중 하나인 하야(היה) 동사의 1인칭 형입니다. 이 동사의 의미는,

       1) ‘있다, 존재하다’

       2) ‘~이다’ (두 단어를 연결하는 계사((繫辭)로서)

이렇게 크게 두가지로 나뉘어집니다. 영어의 be동사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개역개정의 “스스로 있는 자”라는 번역은 이 단어의 ‘있다, 존재하다’라는 의미를 강조한 것이고, 새번역의 “나는 곧 나다”라는 번역은 ‘~이다’라는 후자의 의미를 강조한 것입니다. 사실 이 두 번역 모두 에흐예와 관계사와 또다시 에흐예로 연결되는 이 이상한 문장을 충실히 반영한 번역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히브리어를 비롯한 셈족어들을 오랫동안 공부한 저로서도 이 문장을 어떻게 이해하고 번역해야 할지 무척 난감합니다. 영어로 직역하면 ‘I am that I am’인데, 이 영어 문장을 보고 그 의미가 ‘나는 스스로 존재한다’라고 이해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요? 만약 ‘나는 곧 나다’라고 말하고 싶다면 그냥 “I am I”라고 표현하면 그만입니다. 관계사가 그 안에 들어가야할 이유는 없습니다.

어찌 보면 말장난 같기도 하고 수수께끼 같기도 합니다. 너무도 특이한 표현인데다 성경 전체에서 이 구절에서만 등장하기 때문에 그동안 해석자와 신앙인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를, 그것이 존재하게 된 원인이 존재하지 않는 ‘제1원인’으로서 “스스로 있는 자”로 이해하든, 하나님을 다른 것에 빗대어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나는 곧 나다”라고 해석하든, 이 두 해석은 모두 하나님의 ‘유아독존(唯我獨尊)’적 성격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신학적 표현으로는 절대타자(Absolute Other)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들을 창조하신 분으로서, 다른 무엇인가에 의해 창조된 분이 결코 아니라는 이해는 하나님을 피조세계 너머에 위치시킵니다. 하나님을 설명하거나 이해할 때 그분을 어떤 피조물에 빗대어 설명하는 것은 신성모독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라는 표현 외에 달리 어떠한 인간의 언어로 하나님을 온전히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묻는 모세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이 이상한 대답은 지난 2000년의 기독교 역사에서 수도없이 논의될 정도로 상상력을 자극하는 표현이면서, 동시에 모든 피조물과 피조세계 위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함과 그분의 신비를 나타내기에 너무나도 적합한 표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갑자기 궁금증이 생깁니다. 대체 왜 출애굽기 이후의 성경은, 선지서도 성문서도 복음서도 서신들도 출 3;14의 표현을 아무도 다시 인용하거나 그 구절의 의미를 설명하지 않는 것일까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를 뒤이어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표현이 하나 더 등장합니다. 너무 흔해 빠지고 너무 익숙한 표현이어서 아무런 신비감을 주지 못하는 신명(神名)입니다. 바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출 3:15)이라는 표현입니다. “스스로 있는 자” 혹은 “나는 곧 나다”라는 멋진 표현 뒤에 나오기에는 너무 빈약하고 초라합니다. 창세기가 증언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엄청 대단하고 이상적인 신앙인의 모습이라면 좀 이해가 될 듯도 한데, 우리의 “믿음의 조상”들은 사실 그렇게 훌륭한 믿음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살려고 아내를 팔아먹기도 하고 타인을 속여서 이득을 취하는 인간이기도 합니다. 특히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기원인 야곱이야말로 겁쟁이의 대명사입니다. 자기 딸이 강간당했을 때도 그에 대해 복수를 한 아들들에게 ‘너희 때문에 내가 죽게 생겼다’고 벌벌 떠는 사람입니다(창 34:30).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창 32:12)는 하나님의 약속을 전혀 믿지 않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소리입니다. 그의 말년까지도 자신의 배고픔과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 것이 더 우선인 사람이었습니다(창 43:2, 12-14).

그런데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하신 하나님이 이런 허접한 인간들의 하나님으로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하나님의 “영원한 이름”이자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라고 덧붙이십니다. 그 멋진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가 아니구요.


                 창 3:15-16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 너는 가서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돌보아 너희가 애굽에서 당한 일을 확실히 보았노라


“여호와/야훼”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3:14의 에흐예의 변형이라고 할지라도, 이 하나님은 “여호와”라는 이름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호칭과 연결시킵니다.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이 피조세계로부터 자신을 얼마든지 분리할 수 있습니다. 절대타자로서 그 어떤 피조물과도 분리된 채 홀로 존재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시궁창 같은 시간과 역사라는 영역에 굳이 발을 담그지 않으셔도 되는 분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은 유아독존하는 절대타자가 결코 아닙니다.

창조-타락-구속-회복이라는 도식은 창 3장의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단절되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창세기 3장 이후를 읽지 않은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소리입니다. 성경의 증언은 인간의 ‘타락’ 이후에도 끊임없이 인간의 삶에 개입하시고 역사 속으로 틈입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말합니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에게도 나타나시며, 동생을 죽인 가인에게도 말씀하시며, 계속해서 죄를 짓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끊임없이 잔소리와 협박과 가스라이팅을 해대시는 분입니다.


                레 26:44 그런즉 그들이 그들의 원수들의 땅에 있을 때에 내가 그들을 내버리지 아니하며 미워하지 아니하며 아주 멸하지 아니하고 그들과 맺은 내 언약을 폐하지 아니하리니 나는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이 됨이니라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인간들에게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지 그 이유를 레위기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내가 걔네들 하나님이니까.’ 

스스로 계실 수 있는 분이 홀로 계시기를 원치 않으시고 자신의 피조물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저 하늘 너머에 유유히 계시면 훨씬 멋있을 분이 끊임없이 이 세상으로 개입하시기로 결심하십니다. 모든 것을 독단적으로 결정하실 수 있는 분임에도, 인간의 반응을 기다리시고 인간과 대화하시고 질문하시고 때로는 인간에게 설득을 당하기도 하시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인류 역사상 단 한번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단절된 적이 없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자신이 창조한 이 세상을 너무도 사랑하셔서 기어이 사람의 모습으로 스스로를 드러내시는 하나님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는 표현보다 더 하나님과 피조세계를 연결하는 표현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요? 저는 “스스로 있는 자”나 “나는 곧 나다”라는 신명보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더 좋습니다. 그 이름이 더 소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