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의 저술은 초기 교회 제자들의 기억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유세비우스의 [교회사 3.39.12-16]에 따르면, Papias는 장로 요한의 말을 인용하며, 마가는 베드로의 통역자로서 예수의 말씀들과 사건에 대하여 베드로로부터 순서대로가 아니라 기억에 의존하여 기록했다고 전하면서, 그것이 마가복음의 자료가 되었다고 말한다. 기억은 예수와 기독교 전통에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기억 혹은 기념이라고 번역되는 헬라어 명사는 ἀνάμνησις(아남네시스)이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 단 네 군데에 사용되었다(눅 22:19; 고전 11:24, 25; 히 10:3). 이 단어와 같은 뜻으로 쓰인 명사는 μνημόσυνον(므네모수논, memory, remembrance)이다(마 26:13; 막 14:9; 행 10:4). 후자의 명사는 예술과 학문의 여신들인 뮤즈 여신들의 어머니, 곧 기억의 여신 Mnemosyne로부터 온 명사이다. 기억 혹은 기념이라는 관념이 인격화되고, 신격화된 의미로 발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고대 사회에서 기억 혹은 기념의 의미는 신적인 은혜와 혜택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누가복음의 저자는 그레코 로만의 신화와 문화를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저자라 할 수 있고, 또한 사도 바울도 그레코 로만 시대의 철학과 언어로 훈련받은 로마의 시민권자이다.
ἀνάμνησις(아남네시스, 기억)는 모든 학문과 지식의 기원이 되고, 심지어 종교활동을 만들어내는 근거라 할 수 있다. 성만찬의 기원이 되는 예수의 마지막 밤의 선포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기념하고 기억하라는 것이었다. 일상적으로 먹고 마시는 식사나, 혹은 심포지온에서의 먹고 마시는 행위에서 신적인 은혜와 축복을 기념하고 기억하는 특별한 의미가 부여된 것이었다. 지식활동으로서의 심포지온을 넘어서서, 일상에서 종교적 축제의 의미를 부여한 성만찬이 되었다. 성령의 역사로 탄생한 교회공동체는 모일 때마다 성만찬을 통하여 주님을 기억하게 만들었다:
«또 떡을 가져 감사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ἀνάμνησις) 하시고»(눅 22:19)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ἀνάμνησις) 하시고”(고전 11:24)
기억하고 기념하는 주체는 하나님의 백성, 곧 교회공동체이다. 특별히 초기 교회공동체에서 주의 성만찬만큼 기억되어야 할 이야기로 남겨진 것이 주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이야기이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인의 이야기를 전하고, 여자가 행한 일을 기억하도록 주님이 명하셨다. 주님의 이 특별한 명령은 사도들과 초기 교인들에게 기억 속에 남아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 일이 이루어진 시간과 장소, 여인의 정체가 복음서마다 조금씩 다른 것은 초기 교회공동체의 기억 속에 분명히 남겨지도록 주님이 명하셨지만, 기억에 의존한 기록은 결국 조금씩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음을 오히려 증명해 준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역사적 예수의 이야기와 깊이 관련된 것을 반증해 준다.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마 126:6; 막 14:4), 혹은 바리새인 시몬의 집(눅 7:36), 혹은 베다니 마리아의 집(요 11:1)에 여인의 행한 일의 장소로 등장하고 있는 것은 기억에 의존한 기록임을 보여주고 있다. 여인의 정체도 이름 없는 여인, 동네의 죄 많은 여인, 베다니의 마리아 등 다양하게 언급되고 있는 것도 기억에 의존한 기록임을 보여준다. 분명한 것은 복음의 전승과 공동체는 철저히 기억하고 기념하는 일에서 시작되고 있다.
초기 교회의 기억과 기념의 사건은 유월절을 전후한 것이었는데, 이것은 유월절 자체가 이스라엘 민족공동체의 기억과 관련된 종교축제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νημόσυνον, 므네모수논),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대로 지킬지니라”(출 12:14)
“이것으로 네 손의 기호와 네 미간의 표(기념물, νημόσυνον)를 삼고 여호와의 율법이 네 입에 있게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강하신 손으로 너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니”(출 13:9).
유월절 밤의 출애굽이나 예수의 마지막 밤의 만찬은 종교공동체의 기념과 기억이 되었다. 바울이 선교하며 탄생시킨 교회공동체도 이 ‘기억’의 전승을 소중히 여기도록 권면하였다(고전 11:24, 25). 이 기억은 신적인 역사와 은혜를 기억하고, 대대로 기념하게 하는 것이었다.
사순절을 보내며 고난주간에 우리는 기억과 기념의 공동체로 신앙의 공동체를 세워가야 한다. 은혜와 사랑에 대한 기억을 해야 하며, 망각이라는 실족에서 우리가 다시 회복되어야 할 것이다.
복음서의 저술은 초기 교회 제자들의 기억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유세비우스의 [교회사 3.39.12-16]에 따르면, Papias는 장로 요한의 말을 인용하며, 마가는 베드로의 통역자로서 예수의 말씀들과 사건에 대하여 베드로로부터 순서대로가 아니라 기억에 의존하여 기록했다고 전하면서, 그것이 마가복음의 자료가 되었다고 말한다. 기억은 예수와 기독교 전통에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기억 혹은 기념이라고 번역되는 헬라어 명사는 ἀνάμνησις(아남네시스)이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 단 네 군데에 사용되었다(눅 22:19; 고전 11:24, 25; 히 10:3). 이 단어와 같은 뜻으로 쓰인 명사는 μνημόσυνον(므네모수논, memory, remembrance)이다(마 26:13; 막 14:9; 행 10:4). 후자의 명사는 예술과 학문의 여신들인 뮤즈 여신들의 어머니, 곧 기억의 여신 Mnemosyne로부터 온 명사이다. 기억 혹은 기념이라는 관념이 인격화되고, 신격화된 의미로 발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고대 사회에서 기억 혹은 기념의 의미는 신적인 은혜와 혜택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누가복음의 저자는 그레코 로만의 신화와 문화를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저자라 할 수 있고, 또한 사도 바울도 그레코 로만 시대의 철학과 언어로 훈련받은 로마의 시민권자이다.
ἀνάμνησις(아남네시스, 기억)는 모든 학문과 지식의 기원이 되고, 심지어 종교활동을 만들어내는 근거라 할 수 있다. 성만찬의 기원이 되는 예수의 마지막 밤의 선포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기념하고 기억하라는 것이었다. 일상적으로 먹고 마시는 식사나, 혹은 심포지온에서의 먹고 마시는 행위에서 신적인 은혜와 축복을 기념하고 기억하는 특별한 의미가 부여된 것이었다. 지식활동으로서의 심포지온을 넘어서서, 일상에서 종교적 축제의 의미를 부여한 성만찬이 되었다. 성령의 역사로 탄생한 교회공동체는 모일 때마다 성만찬을 통하여 주님을 기억하게 만들었다:
«또 떡을 가져 감사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ἀνάμνησις) 하시고»(눅 22:19)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ἀνάμνησις) 하시고”(고전 11:24)
기억하고 기념하는 주체는 하나님의 백성, 곧 교회공동체이다. 특별히 초기 교회공동체에서 주의 성만찬만큼 기억되어야 할 이야기로 남겨진 것이 주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이야기이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인의 이야기를 전하고, 여자가 행한 일을 기억하도록 주님이 명하셨다. 주님의 이 특별한 명령은 사도들과 초기 교인들에게 기억 속에 남아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 일이 이루어진 시간과 장소, 여인의 정체가 복음서마다 조금씩 다른 것은 초기 교회공동체의 기억 속에 분명히 남겨지도록 주님이 명하셨지만, 기억에 의존한 기록은 결국 조금씩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음을 오히려 증명해 준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역사적 예수의 이야기와 깊이 관련된 것을 반증해 준다.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마 126:6; 막 14:4), 혹은 바리새인 시몬의 집(눅 7:36), 혹은 베다니 마리아의 집(요 11:1)에 여인의 행한 일의 장소로 등장하고 있는 것은 기억에 의존한 기록임을 보여주고 있다. 여인의 정체도 이름 없는 여인, 동네의 죄 많은 여인, 베다니의 마리아 등 다양하게 언급되고 있는 것도 기억에 의존한 기록임을 보여준다. 분명한 것은 복음의 전승과 공동체는 철저히 기억하고 기념하는 일에서 시작되고 있다.
초기 교회의 기억과 기념의 사건은 유월절을 전후한 것이었는데, 이것은 유월절 자체가 이스라엘 민족공동체의 기억과 관련된 종교축제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νημόσυνον, 므네모수논),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대로 지킬지니라”(출 12:14)
“이것으로 네 손의 기호와 네 미간의 표(기념물, νημόσυνον)를 삼고 여호와의 율법이 네 입에 있게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강하신 손으로 너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니”(출 13:9).
유월절 밤의 출애굽이나 예수의 마지막 밤의 만찬은 종교공동체의 기념과 기억이 되었다. 바울이 선교하며 탄생시킨 교회공동체도 이 ‘기억’의 전승을 소중히 여기도록 권면하였다(고전 11:24, 25). 이 기억은 신적인 역사와 은혜를 기억하고, 대대로 기념하게 하는 것이었다.
사순절을 보내며 고난주간에 우리는 기억과 기념의 공동체로 신앙의 공동체를 세워가야 한다. 은혜와 사랑에 대한 기억을 해야 하며, 망각이라는 실족에서 우리가 다시 회복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