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점일획


"전도"에 대한 묵상

우진성
2024-03-18
조회수 1808

"전도"라는 말이 성경에 직접 나타나지는 않는다. 새번역 기준으로 두 번 나타나기는 하는데, 다음과 같다. 


골로새서 4:3 또 하나님께서 전도의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셔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할 수 있도록, 우리를 위해서도 기도하여 주십시오. 

디모데후서 4:17 주님께서 내 곁에 서셔서 나에게 힘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나를 통하여 전도의 말씀이 완전히 전파되게 하시고, 모든 이방 사람이 그것을 들을 수 있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사용된 "전도"에 해당하는 헬라어가 없다. "전도"가 아닌 다른 말을 의역하여 "전도"라고 번역한 것이다. 디모데후서 말씀에 나타난 "전도"는 케리그마κήρυγμα이다. 케리그마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짧게 압축한 말씀 전승인데, 그것을 마땅히 번역할 말이 없으니 "전도"라는 말로 번역한 것이다. 골로새서에서 "전도"로 번역된 헬라어는 로고스λόγος이다. 어떤 말씀인지는 뒤에 바로 따라오는데, 그리스도의 비밀(신비.미스테리)을 전하는 말씀이다. 이 말씀을 "전도"라고 번역한 것도 분명 의역이다. 

성경 앱의 검색 기능 한계 안에서 말하자면, 신약에는 "전도"라는 단어가 나타나지 않는다. "전도" 대신 "전도자"라는 단어는 몇번 나타나는데 예를 들어, 사도행전 21:8, 에베소서 4:11, 디모데후서 4:5 등이다. 여기에 "전도자"에 사용된 헬라어 단어는 공통적으로 εὐαγγελιστής(유앙겔리스테스)이다. 

따라서 성경에서 "전도"의 뜻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헬라어 εὐαγγελι-(유앙겔리-) 어근을 살펴보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고 하겠다.  εὐαγγελι-(유앙겔리-)어근에서 파생된 단어는 위의 성구들에서 "전도자"로 번역된 εὐαγγελιστής(유앙겔리스테스. 복음전파자가 더 좋은 번역 아닐까?)가 있고, 가장 널리 알려진 εὐαγγέλιον(유앙겔리온.복음)도 있다. 그리고 동사로 사용되는 εὐαγγελίζω(유앙겔리조)가 있다. 

전도를 "유앙겔리-" 어근과 연결시키는 것은, 전도의 의미를 "기쁜소식-복된소식을 전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의 꼬리를 잡고 왔다면, 묻게 되는 질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전한 기쁜 소식이 무엇이었을까?"이다. 이번 글에서는 εὐαγγελι-(유앙겔리-) 가족 중 동사 εὐαγγελίζω(유앙겔리조)의 성경 용례를 살펴보며,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전도하다"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좋을지 묵상할 것이다. 


유앙겔리조 : 신약 이전의 용례들 


유앙겔리조의 뜻은 "기쁜소식-복된소식을 전하다"이다. 처음부터 유앙겔리조가 종교적 신앙적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는 아니었다. 오히려 널리 알려진 예들은 전쟁에서 승리한 소식과 같은 것이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기쁜소식"의 예화는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 전사가 가져온 승전 소식의 경우일 것이다. 아테네의 군대가 마라톤 지역에 나가 페르시아 대군과 맞서 싸우고 있다. 이 전쟁의 승패에 아테네의 운명이 달려 있다. 기다리던 아테네 시민들에게 들려온 승전보, 그 소식이 기쁜 소식(유앙겔리온)의 예이다. 사실, 역사적으로 그런 승전보가 있었는지 의심받고 있다. 송동훈이 쓴 <에게해의 시대>(시공사)에 따르면 그런 승전보는 없었다. 그러나 설사 마라톤에서 아테네까지 40 km를 달려 승전보를 전했다는 페이디피데스의 이야기가 지어낸 이야기라 할지라도, "기쁜소식-복된소식"이 무엇을 뜻하는지 보여주는 예로는 충분하다. 

유앙겔리조가 전쟁 승리의 기쁜소식으로 사용된 예는 구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사무엘서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사무엘상 마지막 장(31장)에는 사울왕의 시신을 발견한 블레셋 사람들이 블레셋 땅 사방에 전령들을 보내어 승리의 소식을 전하는 장면이 나온다. "소식을 전하다"(9절)에 사용된 70인역 성경의 헬라어가 유앙겔리조이다. 사무엘하 18장에는 요압이 압살롬을 죽이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나서서 자신이 이 기쁜소식을 다윗에게 전하겠다고 말하는데, 그 장면에 사용된 헬라어 역시 유앙겔리조(19절)이다. 

비슷한 용례가 요세푸스 전쟁사(3:503)과 고대사(7:245, 250)에도 나온다. 이런 용례를 보자면, 유앙겔리조와 연결된 기쁜소식-좋은소식의 내용은 고대사회에서는 주로 "전쟁 승리"의 소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유앙겔리조 : 신약의 용례들 


신약에서 나타난 유앙겔리조의 용례에서 "전쟁 승리의 소식"을 "복된 소식"이라고 전하는 예는 나타나지 않는다. 신약에서 사용된 유앙겔리조를 하나씩 따라가 보면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하는데, 유앙겔리조는 그 소식이 무엇이든 간에 듣는 사람에게 기쁘고 복이 되는 소식을 전해주는 행위를 말한다는 것이다. 전해주는 내용은 특정되어 있지 않다. 듣는 사람에게 복되고 기쁜 소식인 것이 유앙겔리조의 요체이다. 신약에서 유앙겔리조가 나타날 때, 무슨 이야기를 들여주었을까? 다양하다. 하나씩 살펴보자. 각 구절을 읽고 필요하다면 설명을 단 후, "=>" 표시 뒤에 유앙겔리조의 목적어(내용)를 명기하겠다.   


1) 누가복음 1장 19절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인데, 나는 네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해 주려고 보내심을 받았다." 


"이 기쁜 소식"의 내용이 무엇일까? 원문에서는 ταῦτα(이것들)이라는 대명사로 표현되었는데, 이 대명사가 받는 내용은 문맥상 13절 이하에 나와 있다.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 아들의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는 내용이다.  

=> 득남 


2) 누가복음 2:10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여 준다. 


이 구절이 말하는 "기쁜소식"의 내용은 11절에 따라 온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서 너희에게 구주가 나셨으니,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 

=> 구세주 탄생


3) 누가복음 4:43

그러나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 하나님 나라


4) 누가복음 8:1 

그 뒤에 예수께서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그 기쁜 소식을 전하셨다.


=> 하나님 나라 


5) 사도행전 8:35

빌립은 입을 열어서, 이 성경 말씀에서부터 시작하여, 예수에 관한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


"예수에 관한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는 헬라어로 εὐηγγελίσατο τὸν Ἰησοῦν(유엥겔리사토 톤 예수)인데, 예수에 관한 소식이 아니라 예수가 목적어이다. "예수라는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가 더 나은 번역이다. 

=> 예수


6) 사도행전 10:36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을 보내셨는데,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평화를 전하셨습니다. 


εἰρήνην διὰ Ἰησοῦ Χριστοῦ(에이레네 디아 예수 크리스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선사받은 평화"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렇게 해석하면 이 구절은, 하나님의 선물은 평화이고 그 평화는 예수를 통하여 이루어졌다는 말이 된다. 

=> 예수를 통한 평화 


7) 사도행전 15:35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 머물러 있으면서, 다른 여러 사람과 함께 주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였다.


주님의 말씀(τὸν λόγον τοῦ κυρίου 톤 로곤 투 퀴리우)은 문맥에서 이해할 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라기 보다는 주님에 관한 말씀에 가깝다. 

=>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 


8) 사도행전 17:18

그리고 몇몇 에피쿠로스 철학자와 스토아 철학자도 바울과 논쟁하였는데, 그 가운데서 몇몇 사람은 “이 말쟁이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는 것인가?” 하고 말하는가 하면, 또 몇몇 사람은 “그는 외국 신들을 선전하는 사람인 것 같다” 하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것은 바울이 예수를 전하고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었다.


=>예수와 그의 부활


9) 고린도전서 1:17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이 되지 않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세례를 주라고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다" 부분의 헬라어는 οὐ . . . βαπτίζειν ἀλλὰ εὐαγγελίζεσθαι(우 밥티제인 알라 유앙겔리제스타이)이다. 한글 번역을 보면, "복음"으로 특정된 무엇이 있어서 그것을 전하라고 보내신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 번역인데, 원문의 뜻은 그것이 아니라 (듣는 사람에게) 복이 되고 기쁨이 되는 소식을 전하라고 보내셨다는 말이다. 듣는 사람에게 복이 되고 기쁨이 되는 소식이 무엇인가? 22-23절에 그 내용이 나온다. "22유대 사람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으나, 23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10) 고린도전서 15:1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복음을 일깨워 드립니다. 여러분은 그 복음을 전해 받았으며, 또한 그 안에 서 있습니다.


번역상의 문제가 있다. 먼저 γνωρίζω(그노리조)의 번역 문제인데, 새번역의 "일깨워드립니다" 보다는 개역의 "알게 하노니"가 더 좋은 번역이다. 그노리조는 알고 있었던 것을 일깨워 준다는 뜻이 아니라, 상대가 잘 모르는 내용을 설명하여 알게 한다는 뜻이다.  이 구절에는 "복음"(유앙겔리온)이 유앙겔리조의 목적어로 등장한다. "내가 전한 복음"이라는 표현이 그것이다. 그러나 여기 사용된 유앙겔리온은 "꿈을 꾸다"에서 "꿈"이 그러하듯이 동족목적어로 사용된 것이지, "복음"이라는 명사 자체가 특정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복음이 무엇인지 설명하여 알게 하겠다"고 말문을 여는 것이다. 이 구절에서 언급한 복음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3절 이하에 나온다. 소위 "케리그마"라고 알려진 부분인데, 요점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이다. 


=>예수의 부활 


11) 고린도후서 10:14, 11:7 

10:14 그러므로 우리는 여러분에게로 가지 못할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까지 가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것은, 한계를 벗어나서 행동한 것이 아닙니다.

11:7 나는 여러분을 높이기 위하여 나 자신을 낮추었고, 또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였습니다. 그렇게 한 것이 죄라도 된다는 말입니까?


다시 한번 유앙겔리조(복된 소식을 전하다)의 목적어로 유앙겔리온(복음)이 등장한다. "복음"이 홀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나님의 복음"이라는 관용적 표현으로 등장하였다. 그런데 복음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문맥에서 특정되어 있지 않다. 아마 그 내용은 무엇인지 특정하지 않아도 듣는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복음의 내용이 특정되지 않은 경우는 이 구절 말고도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9:6, 20:1, 로마서 15:20)


12) 갈라디아서 1:16 

그 아들을 이방 사람에게 전하게 하시려고, 그를 나에게 기꺼이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 그 아들 예수 


13) 에베소서 2:17

그분은 오셔서 멀리 떨어져 있는 여러분에게 평화를 전하셨으며,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도 평화를 전하셨습니다. 


=> 그리스도가 주신 평화


14) 에베소서 3:8 

하나님께서 모든 성도 가운데서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셔서, 그리스도의 헤아릴 수 없는 부요함을 이방 사람들에게 전하게 하시고, 


=>헤아릴 수 없는 그리스도의 부요함 


15) 데살로니가전서 3:6

그런데 지금 디모데가 여러분에게서 우리에게로 돌아와서, 여러분의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전하여 주었습니다. 


=>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과 사랑 


결론


이상에서 신약에서 유앙겔리조가 나타난 본문 15개를 살펴보았다. "복된 소식"의 내용이 무엇인지 특정되지 않은 본문이 아니라 특정된 본문들을 살폈다. 살핀 결론을 요약하자면, 


  1. 살펴본 본문들 중에 "득남"과 같은 내용이 복음으로 제시된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소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세례자 요한의 출생이 복음의 내용이 된 것도, 그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할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살펴본 유앙겔리조 용례 전체는 예수님과 연결된다.  

  2.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집중하는 케리그마나, 어떤 교리적 설명 안에 예수님 이야기를 요약하려는(가두려는) 시도들(예를 들어 4영리)과 달리, 신약에 나타나는 복된 소식은 예수 이야기 전체를 포괄하고 있다. 예수님에 관한 교리가 도그마화 되기 이전에, "예수를 믿게 하려는 사람에게" 혹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누어진 생생한 예수 이야기는 모두 유앙겔리조의 내용이 되었다. 유앙겔리조의 내용이 되는 예수 이야기는 풍성하고 생생하였다. 

  3. 복음의 내용이 풍성해진 것은 위의 데살로니가전서 용례에서 보듯이, 예수님에 관한 직접적인 이야기 뿐만 아니라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유앙겔리조의 내용이 되었기 때문이다. 

  4.  내가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예수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설명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내게 복이 되고 기쁨이 된 예수 이야기를 내 경험에 바탕하여 전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 방식으로 유앙겔리조의 내용은 풍성해 진다. 거기에, 개인의 이야기 뿐만 아니라, 예수 공동체인 교회의 이야기가 더해지면 복음의 내용은 더욱 풍성해진다. 

  5.  이상에서 살펴본 유앙겔리조에 관한 논의를 우리에게 친숙한 표현인 전도와 연결시켜 보자. "전도 한다"는 의미는, 예수님 때문에 내 삶에 일어난 복되고 기쁜 일들을 중심으로 예수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라고 하겠다. 

  6. 신약의 용례들을 고려할 때, 이 나눔의 대상은 이미 예수님을 믿는 이도 되고, 믿지 않지만 앞으로 믿을 수 있도록 초대하고 싶은 이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