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들은 유대교 전통에 맞추어 애가를 읽을 때 마치 노래를 부르듯 소리를 높여서 ‘애이카’라고 부르짖으며 읽기 시작한다. 지나온 역사 속에서 우리나라가 유대인들과 직접 관계를 맺은 적이 없기 때문에 관습이나 문화를 서로 보고 배우지는 않았지만, 애가가 시작되는 부분을 들으면 상여를 따라가면서 ‘아이고’하며 곡을 하는 사람들이 떠오른다. 이스라엘과 우리나라가 전혀 관계 없이 몇 천 년을 살아왔으나, 가슴속에 맺힌 슬픔이 목청을 울리며 밖으로 터져나오는 비명소리가 비슷하기 때문일까?” (윤성덕, “예레미야애가,” 연세신학백주년기념 성경주석, 9).
‘슬픔의 노래’라는 뜻의 ‘애가(哀歌)’라는 번역이 참 좋습니다. (예레미야)애가의 내용을 잘 담아 표현한 번역일 뿐 아니라 애가 원문의 첫 단어인 에이카(אֵיכָה)와도 소리가 비슷합니다. 개역개정의 음역 원칙을 따르자면 히브리어 에이카는 분명 ‘에가’로 음역되었을 것입니다. 히브리어 단어 에이카는 의문사입니다. ‘어떻게(how)?’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단어 자체에 ‘슬프다’라는 뜻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라는 슬픔과 탄식을 표현할 때 이 단어가 자주 사용될 뿐입니다.
사 1:21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에이카 אֵיכָה) 창기가 되었는고
정의가 거기에 충만하였고 공의가 그 가운데에 거하였더니 이제는 살인자들뿐이로다(개역개정)
에이카는 있을 수 없는 일, 벌어져서는 안 되는 일, 상상할 수조차 없던 일이 벌어진 현실을 아파하는 동시에 대체 왜 이런 일이 생긴 것인지 물음을 제기하는 의문사입니다. “신실하던 성읍”은 예루살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정의(미쉬파뜨 מִשְׁפָּט)와 공의(쩨데끄 צֶדֶק)가 가득하던 곳이 살인자들의 폭력으로 뒤덮이게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너무나도 고통스런 일입니다.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이사야의 입을 빌린 하나님의 탄식입니다.
애가서의 저자(예레미야로 알려져 있지만 근거가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는 이사야의 하나님이 내뱉으시는 탄식과 마찬가지로 에이카라는 단어로 아픔과 슬픔, 고통을 토로합니다.
애 1:1 슬프다 이 성이여 전에는 사람들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하게 앉았는고
전에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이 되었고
전에는 열방 중에 공주였던 자가 이제는 강제 노동을 하는 자가 되었도다(개역개정)
이 번역은 에이카라는 한 단어를 “슬프다”와 “어찌”로 나누어 번역한 것입니다. 이것을 좀 다르게 번역하면,
"아, 대체 어떻게 사람들로 가득 찼던 이 도시가 마치 남편 잃은 여자처럼 외로이 홀로 서 있게 되었단 말인가!
무엇보다 크던 도시가, 누구보다 고귀하던 공주가 대체 어떻게 강제노역에 시달리는 노예가 되었단 말인가!"
하나님의 도시가, 아니 하나님의 도시였던 곳이, 허망하게 남편을 읽고 망연자실한 아내처럼 되어버렸고 우리 집 귀한 자식이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게 된 것을 대체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애 4:1-2 슬프다 어찌(에이카) 그리 금이 빛을 잃고 순금이 변질하였으며 성소의 돌들이 거리 어귀마다 쏟아졌는고
순금에 비할 만큼 보배로운 시온의 아들들이 어찌(에이카) 그리 토기장이가 만든 질항아리 같이 여김이 되었는고 (개역개정)
‘변하지 않는 것’을 대표하므로 귀한 가치를 가지는 금이 그 빛을 잃어버린 현실은 대체 왜 발생한 것인가요? 하나님의 거룩한 곳을 받치고 있던 돌들이 시장 바닥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광경을 대체 어떤 눈으로 바라보아야 할까요? 금보다 귀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질그릇 조각처럼 취급 당하는 이 사태는 대체 왜 일어난 것일까요? 애가의 저자가 묻고 있는 질문입니다.
굳건한 신앙으로 이 고통을, 이 위기를 넘길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했으면 좋으련만, 애가는 그리 손쉬운 위로를 우리에게 주지 않습니다.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완전히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아예 버리신 것은 아닐까(애 5:20)? 하나님이 우리에게 화를 내시는 것이 너무 심한 것은 아닐까(애 5:22)? 애가의 마지막은 질문으로 끝납니다. 아마도 이것이 애가가 ‘불편한’ 이유일 테고, 기독교 전통 안에서 애가가 인용되거나 설교 되는 일이 드문 이유일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성경에 애가가 있어서 참으로 감사한 마음입니다.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라고 물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성경이 있어서 고맙습니다. 그 질문에 손쉬운 답변이나 값싼 위로를 주지 않아서 더욱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인생의 어두운 밑바닥을 헤매는 이들에게, 당신만 그런 것은 아니라고 애가는 말해줍니다.
만약 어떠한 고난이 닥쳐와도 주님만을 바라보며 소망을 잃지 않는 모범적인 신앙인들만 성경에 묘사되어 있었다면, 빛과 밝음, 기쁨과 행복이라는 “긍정의 힘”만이 유일한 성경적 가치라고 한다면, 지치고 좌절하고 무릎이 꺾이는 사람을 교회가 품어주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은 ‘어둠’을 ‘밤’이라 칭해 주십니다. 낮이 좋은 것이라는 사실이 밤을 나쁜 것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아침이 좋다고 저녁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아침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알게 하기 위해 저녁이 존재하는 것도 아닙니다. 저녁과 밤은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빨리 털어내는 것이 좋은 슬픔도 있고, 힘내라는 따스한 격려 한 마디면 다시 일어설 힘이 생기는 좌절도 있습니다. 하지만 또한 그 깊은 속으로 침잠해야만 하는 어둠도 있습니다. 충분히 슬퍼하고 끝까지 아파하지 않으면 안 될 때도 있습니다. 모든 고통이 그 이유를 깨달아야만 극복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대체 왜 이러십니까? 어떻게(에이카)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 질문에 꼭 답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슬퍼하고 애통하는 사람이 복되다고 말씀하십니다(마 5:4). 고통과 좌절을 '극복'한 사람이 복되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유대교 전통에 맞추어 애가를 읽을 때 마치 노래를 부르듯 소리를 높여서 ‘애이카’라고 부르짖으며 읽기 시작한다. 지나온 역사 속에서 우리나라가 유대인들과 직접 관계를 맺은 적이 없기 때문에 관습이나 문화를 서로 보고 배우지는 않았지만, 애가가 시작되는 부분을 들으면 상여를 따라가면서 ‘아이고’하며 곡을 하는 사람들이 떠오른다. 이스라엘과 우리나라가 전혀 관계 없이 몇 천 년을 살아왔으나, 가슴속에 맺힌 슬픔이 목청을 울리며 밖으로 터져나오는 비명소리가 비슷하기 때문일까?” (윤성덕, “예레미야애가,” 연세신학백주년기념 성경주석, 9).
‘슬픔의 노래’라는 뜻의 ‘애가(哀歌)’라는 번역이 참 좋습니다. (예레미야)애가의 내용을 잘 담아 표현한 번역일 뿐 아니라 애가 원문의 첫 단어인 에이카(אֵיכָה)와도 소리가 비슷합니다. 개역개정의 음역 원칙을 따르자면 히브리어 에이카는 분명 ‘에가’로 음역되었을 것입니다. 히브리어 단어 에이카는 의문사입니다. ‘어떻게(how)?’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단어 자체에 ‘슬프다’라는 뜻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라는 슬픔과 탄식을 표현할 때 이 단어가 자주 사용될 뿐입니다.
사 1:21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에이카 אֵיכָה) 창기가 되었는고
정의가 거기에 충만하였고 공의가 그 가운데에 거하였더니 이제는 살인자들뿐이로다(개역개정)
에이카는 있을 수 없는 일, 벌어져서는 안 되는 일, 상상할 수조차 없던 일이 벌어진 현실을 아파하는 동시에 대체 왜 이런 일이 생긴 것인지 물음을 제기하는 의문사입니다. “신실하던 성읍”은 예루살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정의(미쉬파뜨 מִשְׁפָּט)와 공의(쩨데끄 צֶדֶק)가 가득하던 곳이 살인자들의 폭력으로 뒤덮이게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너무나도 고통스런 일입니다.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이사야의 입을 빌린 하나님의 탄식입니다.
애가서의 저자(예레미야로 알려져 있지만 근거가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는 이사야의 하나님이 내뱉으시는 탄식과 마찬가지로 에이카라는 단어로 아픔과 슬픔, 고통을 토로합니다.
애 1:1 슬프다 이 성이여 전에는 사람들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하게 앉았는고
전에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이 되었고
전에는 열방 중에 공주였던 자가 이제는 강제 노동을 하는 자가 되었도다(개역개정)
이 번역은 에이카라는 한 단어를 “슬프다”와 “어찌”로 나누어 번역한 것입니다. 이것을 좀 다르게 번역하면,
"아, 대체 어떻게 사람들로 가득 찼던 이 도시가 마치 남편 잃은 여자처럼 외로이 홀로 서 있게 되었단 말인가!
무엇보다 크던 도시가, 누구보다 고귀하던 공주가 대체 어떻게 강제노역에 시달리는 노예가 되었단 말인가!"
하나님의 도시가, 아니 하나님의 도시였던 곳이, 허망하게 남편을 읽고 망연자실한 아내처럼 되어버렸고 우리 집 귀한 자식이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게 된 것을 대체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애 4:1-2 슬프다 어찌(에이카) 그리 금이 빛을 잃고 순금이 변질하였으며 성소의 돌들이 거리 어귀마다 쏟아졌는고
순금에 비할 만큼 보배로운 시온의 아들들이 어찌(에이카) 그리 토기장이가 만든 질항아리 같이 여김이 되었는고 (개역개정)
‘변하지 않는 것’을 대표하므로 귀한 가치를 가지는 금이 그 빛을 잃어버린 현실은 대체 왜 발생한 것인가요? 하나님의 거룩한 곳을 받치고 있던 돌들이 시장 바닥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광경을 대체 어떤 눈으로 바라보아야 할까요? 금보다 귀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질그릇 조각처럼 취급 당하는 이 사태는 대체 왜 일어난 것일까요? 애가의 저자가 묻고 있는 질문입니다.
굳건한 신앙으로 이 고통을, 이 위기를 넘길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했으면 좋으련만, 애가는 그리 손쉬운 위로를 우리에게 주지 않습니다.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완전히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아예 버리신 것은 아닐까(애 5:20)? 하나님이 우리에게 화를 내시는 것이 너무 심한 것은 아닐까(애 5:22)? 애가의 마지막은 질문으로 끝납니다. 아마도 이것이 애가가 ‘불편한’ 이유일 테고, 기독교 전통 안에서 애가가 인용되거나 설교 되는 일이 드문 이유일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성경에 애가가 있어서 참으로 감사한 마음입니다.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라고 물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성경이 있어서 고맙습니다. 그 질문에 손쉬운 답변이나 값싼 위로를 주지 않아서 더욱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인생의 어두운 밑바닥을 헤매는 이들에게, 당신만 그런 것은 아니라고 애가는 말해줍니다.
만약 어떠한 고난이 닥쳐와도 주님만을 바라보며 소망을 잃지 않는 모범적인 신앙인들만 성경에 묘사되어 있었다면, 빛과 밝음, 기쁨과 행복이라는 “긍정의 힘”만이 유일한 성경적 가치라고 한다면, 지치고 좌절하고 무릎이 꺾이는 사람을 교회가 품어주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은 ‘어둠’을 ‘밤’이라 칭해 주십니다. 낮이 좋은 것이라는 사실이 밤을 나쁜 것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아침이 좋다고 저녁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아침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알게 하기 위해 저녁이 존재하는 것도 아닙니다. 저녁과 밤은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빨리 털어내는 것이 좋은 슬픔도 있고, 힘내라는 따스한 격려 한 마디면 다시 일어설 힘이 생기는 좌절도 있습니다. 하지만 또한 그 깊은 속으로 침잠해야만 하는 어둠도 있습니다. 충분히 슬퍼하고 끝까지 아파하지 않으면 안 될 때도 있습니다. 모든 고통이 그 이유를 깨달아야만 극복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대체 왜 이러십니까? 어떻게(에이카)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 질문에 꼭 답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슬퍼하고 애통하는 사람이 복되다고 말씀하십니다(마 5:4). 고통과 좌절을 '극복'한 사람이 복되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