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점일획


παράπτωμα(파라프토마, 범죄)에 대하여

김범식
2024-02-03
조회수 2001

신약성경에서 ‘죄’라는 뜻으로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헬라어는 ἁμαρτία (하마르티아)이다. 하마르티아는 신약성서 전반에 죄(sin)라는 뜻으로 복음서나 서신들에서 고르게 사용되었다. 그런데 신약성경에 19번 사용되고, 바울서신에 11번 정도 사용된 동의어로서 ‘범죄, 범죄함, 잘못, 넘어짐’의 뜻으로 번역되는 헬라어 명사가 있다. 이 단어는 παράπτωμα(파라프토마)이다. 이 단어의 어근동사는 πίπτω(피프토)인데, ‘떨어지다’(fall), ‘무너지다’(collapse), ‘실패하다’(fail)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 παράπτωμα(파라프토마)는 실족, 넘어짐, 범죄행위(trespass)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παράπτωμα(파라프토마)는 구약 70인경에서 주로 복수형 명사로 사용되어 하나님께 행한 범죄행위를 뜻하였다.


바울서신에서 11번 사용되었는데, 사실 명사 ἁμαρτία (하마르티아)와는 동의어로서 사용되어 ‘죄’라는 의미에 있어서 거의 구별없이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로마서 5장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5:14에서 아담의 범죄를 παράβασις(파라바시스)라고 표현한 바울은 이 범죄를 15, 17절에서는 παράπτωμα(파라프토마)를 사용하였다. 바울은 아담의 불순종의 죄(파라프토마)가 결국 죄(하마르티아)라는 권세가 되어 인간에게 역사하고 있다고 5장의 결론으로서 선포하였다. 바울은 불순종의 범죄행위로서 παράπτωμα(파라프토마)를 말하면서, 이것이 결국 ἁμαρτία (하마르티아)의 기원인 것을 말하고 있다.


바울은 ἁμαρτία (하마르티아)라는 일반적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서신에서 특별히 교리적 가르침에서 παράπτωμα(파라프토마)라는 단어를 사용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로마서 5장에서 아담의 불순종이라는 범죄행위에 이 단어를 사용하였다. 아마 바울은 παράπτωμα(파라프토마)에서 특별히 πτῶμα(프토마)라는 어근명사에서 죄가 만들어내는 ‘죽음’을 강조하기 위해 이 단어를 채용한 것이라 추측된다. πίπτω(피프토, fall)에서 나온 명사 πτῶμα(프토마)는 인간이나 짐승의 시체(dead body, corpse)를 뜻한다(마 14:12; 24:28; 막 6:29; 15:45; 계 11:8).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떨어진 것’(what has fallen)으로서의 ‘죽은 몸’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불순종의 죄가 만들어내는 죽음을 강조하기 위해 바울은 단어 παράπτωμα(파라프토마)를 채용한 것 같다. 이와 반대로 예수의 χάρις(카리스, 은혜)가 만들어내는 생명을 바울은 대조한다:

“한 사람의 범죄(παράπτωμα)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롬 5:17)


흥미로운 것은 동사 παραπίπτω(파라피프토)는 신약성경 히브리서에 단 한 번 사용되었다:

“타락한 자들(παραπεσόντας)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히 6:6)


‘타락한 자들’의 의미는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경험하고도 죄라는 죽음의 권세 아래 다시 종이 된 사람들을 뜻한다. 생명을 얻고도 다시 죽은 자가 되었기에 다시 생명의 기회가 없음을 말하고 있다.

παράπτωμα(파라프토마)는 ‘죽음’의 의미가 강조된 단어이고, 동의어 ἁμαρτία (하마르티아)는 과녁, 기준에서 벗어남을 의미하는 어원적 유래가 있음을 생각하면, 바울은 적어도 ‘죄’라는 뜻의 헬라어 명사들을 자유롭게 사용하지만, 그 이면에는 불순종의 죽음을 뜻하는 죄로서의 παράπτωμα(파라프토마), 그리고 의의 과녁을 맞추지 못하는 죄로서의 ἁμαρτία (하마르티아)를 구별하여 사용한 것 같다. .


죄는 죽음이고 은혜는 생명이다. 우리는 죄의 종으로 죽은 사람이었지만, 예수의 구속의 은혜로 생명을 얻게 되었다. 이 은혜를 값싸게 여기는 모든 행위는 회개의 기회를 잃을지도 모른다. 생명의 은혜를 가진 자로서 매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