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점일획


"하나님 나라"에 대한 묵상

우진성
2024-01-27
조회수 1505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어로  ἡ βασιλεία τοῦ θεοῦ(헤바실레이아투쎄우)라고 쓴다. 이 글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 대해 살펴보겠다. 하나님 나라는 “이런 나라이다”라고 설명하는 대신, "하나님 나라는 이런 나라가 아니다"라는 식의 부정문을 사용하여 설명하겠다. 


1) 하나님 나라는 "내 나라"가 아니다. 

가장 먼저 단순하면서도 명확하게 쓸 수 있는 부정진술은 "하나님 나라는 내 나라가 아니다"이다. "하나님 나라"가 단순하게 말해서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나라"라면, "내 나라"(ἡ βασιλεία μου헤바실레이아무)는 "내 뜻이 실현되는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를 말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인정하지 않고 내 뜻의 관철을 고집할 때가 있다. 여기서 "내 뜻”은, 무슨 거룩한 뜻이 아니라 실은 “내 욕망"의 순화된 표현에 다름 아닐 때가 많다. 하나님 나라는 내 욕망이 실현되는 내 나라와 전혀 상관없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우리는 "내 욕망의 실현”에 “하나님 나라”라는 거룩한 옷을 뒤집어 씌워 미화하고 정당화하는 일을 본다.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는 경우도 있고, 의도하지 않게 그리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진정 하나님 나라를 바라고 추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과 내 뜻이 다름을 인정하고, 그 둘을 분명하게 대립시킨 후, 솔직하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택했다면 하나님 나라를 사는 선택을 한 것이다. 내 뜻을 택했다면 내 나라를 사는 선택을 한 것이다.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내 뜻”을 “하나님 나라”로 포장하지는 말자.

2)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나라가 아니다.

마태복음은 다른 복음서와 달리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 대신 "하늘 나라"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ἡ βασιλεία τῶν οὐρανῶν(헤바실레이아톤우라논)이라는 표현은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표현이라 해도 될 정도로 마태가 주로 사용하였다. 마태는 35회 이 표현을 사용하였는데, 살펴보면 마가나 누가가 ”하나님 나라”라고 사용한 구절을, “하나님” 대신 "하늘"을 사용하여 수정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태가 "하늘 나라”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지만, 그것이 마가복음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와 다른 무엇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다만 표현을 그렇게 했을 뿐이다. 마태는 왜 “하나님” 대신 “하늘”을 사용하였는가? 유대인의 입장에서 “하나님”을 입에 올리는 것을 경건하지 못한 태도로 보았기 때문이고,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완곡어법으로 “하늘”을 사용하였다. 요즘도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입에 담기 꺼려 “하나님”대신 “주님”(아도나이)을 사용한다. 

그런데, 마태의 이 선택은 의도치 않은 문제를 일으켰다. 마태가 사용한 “하늘 나라”는 한자어로 “천국”이나 “천당”으로 사용되었는데, 그렇게 사용되는 동안 “하늘”은 더 이상 완곡어법으로 이해되지 않고 장소 개념으로 이해되기 시작하였다. “하늘”은 초월적이고 내세적이며 영원한 공간에 대한 인간의 갈망을 충족시키는 언어가 되었다. “하나님 나라 = 하늘 나라= 천국 = 천당 = 죽어서 가는 나라”라는 도식이 믿는 이들 마음 속에 자연스레 형성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처음과 끝이 뒤바뀌었다. “천국”이나 “천당”이 “하나님 나라"를 대신하는 말로 이해되는 대신, “하나님 나라”가 “천국” “천당”을 대신하는 말로 이해된 것이다. 다수의 교회에서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우리 영혼이 들어가는 “천국”으로 대체된 채 잊혀져 갔다. 

오해가 없으면 좋겠다. 성경은 죽은 후 영혼이 가는 나라에 대해서도 가르친다. 그런 약속을 성경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나라를 “하나님 나라”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성경은 죽어서 가는 나라를 “하늘 나라”(딤후 4:18)라고 부르기도 하고, “영원한 나라”(벧후 1:11)라고 부르기도 하며, “하늘의 도시”(히 11:16)나 “흔들리지 않는 나라”(히 12:28)라고 부르기도 한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강도에게 약속하신 “주님의 나라/낙원”이라는 표현은 잘 알려져 있고, 요한복음의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내 아버지의 집”(요 14:2)은 장례예식의 단골 본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언급된 것들이 예수님께서 가르치고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곳은 하늘이 아니라 이 땅이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오늘의 현실을 표현하는 언어이다. 


위에서 언급된 본문

딤후 4:18   주님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구원하셔서 그분의 하늘 나라에 들어가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분께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공간적으로 하늘) 


벧후 1:11   또한 여러분은,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충분히 갖출 것입니다.


히 11:16   그러나 사실은 그들은 더 좋은 곳을 동경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늘의 고향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도시를 마련해 두셨습니다.


히 12:28   그러므로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으니, 감사를 드립시다. 그리하여,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도록 그를 섬깁시다.


눅 23:42   "예수님, 주님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43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요 14:2   내 아버지의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고 너희에게 말했겠느냐?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 3   내가 가서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나에게로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겠다.


3) 하나님 나라는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 

예수님 이전 시대부터 예수님 동시대까지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하나님 나라는 다음 세 가지로 대별할 수 있다. 


  1. 다윗 왕조를 회복하는 하나님 나라. 오랫동안 강대국의 식민지로 살아온 역사 속에서 피어난 회복의 소망이 하나님 나라라는 언어에 담겼다. 식민제국의 압제에서 해방되고, 사무엘하 5-8장이 전하는 다윗 왕국 시대가 재건 되길 바라는 소망이다. 이런 소망이 군사독재 시대 민중신학 해방신학을 타고 널리 퍼진 하나님 나라 담론 속 담겨 우리를 만나기도 했다. 또한 현재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고 있는 시오니스트들의 명분이 되기도 한다. 
  2. 우주적 하나님 나라. 유대민족이라는 바운더리 안에 갇힌 하나님 나라가 고레스에 의한 바벨론 포로 귀환을 경험하면서 민족적 바운더리를 뛰어 넘게 된다. 하나님 나라를 이룰 메시아를 기다려 왔는데, 놀랍게도 다윗의 자손 중에서 메시아가 나타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 왕이 메시아로 역할한 것이다. 이사야서 45장 1절과 4절은 이 놀라운 사건을 이렇게 해석한다. "나 주가 기름 부어 세운 고레스에게 말한다. . .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부른 것은,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이스라엘을 도우려고 함이었다. 네가 비록 나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너에게 영예로운 이름을 준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께서 이방의 왕 고레스를 메시아로 세우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이루는 하나님 나라가 어찌 이스라엘 바운더리 안에 갇힐 수 있는가? 하나님은 열방 가운데 역사하시고 우주 가운데 공의를 이루시는 분으로 하나님 활동의 지평이 넓게 이해된다. 
  3. 묵시적 하나님 나라. 위에 언급한 “회복의 하나님 나라” “우주적 하나님 나라”의 공통점은 정치적이고 현실적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제2성전 시기(신구약 중간기)에 전혀 다른 하나님 나라 상이 제시되었다. 역사가 계속되고 그 역사 안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역사를 끝장내는 하나님 나라가 온다는 것이다.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기다리는 소망이 더 이상 이어질 수 없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혹은 그의 대리자를 통하여 역사 속에 급작스레 개입하셔서 인간 역사를 끝내실 것이라는 소망이 피어올랐다. 이는 쿰란공동체의 사해문서나 신구약 중간기 외경 속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성경에서는 예를 들어 다니엘서 같은 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내가 밤에 이러한 환상을 보고 있을 때에 인자 같은 이가 오는데,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계신 분에게로 나아가, 그 앞에 섰다. 옛부터 계신 분이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셔서, 민족과 언어가 다른 뭇 백성이 그를 경배하게 하셨다.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여서, 옮겨 가지 않을 것이며, 그 나라가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단 7:13-14)

 

예수님이 가르친 하나님 나라가 이 중 하나인가? 아니다. 겨자씨나 누룩의 비유가 전하는 하나님 나라는 구약의 이런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하기 어렵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라를 적극적으로 기다리던 인물들로 보인다. 그런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4) 하나님 나라는 크리스텐돔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부정진술이다. 크리스텐돔은 기독교가 국가와 사회는 물론 개인의 생각과 태도 삶의 방식까지 지배하는 현실을 말한다. 로마의 기독교 수용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서구의 현실 역사 속에 존재했었다. 오늘날의 이란, 그러니까 이슬람 혁명 수비대가 이슬람의 가치를 제일 높은 가치로 수호하고 있는 나라에서 이슬람 대신 기독교를 넣어 보면 크리스텐돔을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크리스텐돔 이후 계몽주의 종교개혁 시민혁명 과학혁명을 경험하며, 기독교 사회는 세속화(기독교가 더 이상 국교가 아니라는 의미에서)의 길을 걷고 있다. 세속화에 대한 반발로 다시 크리스텐돔을 추구하는 움직임이 있고, 그것을 하나님 나라로 포장하는 흐름도 있다. 예를 들어 한 때 유행했던 기독교 고지론이라든지, 이명박 대통령 시절 제법 힘을 발휘하였던 성시화론이라든지. 그런 흐름의 궁극은 크리스텐돔이 될 것이다. 과연 그런 기독교 왕국이 하나님 나라가 될 수 있을까? 중세 유럽은 하나님 나라였나? 분명 아니다. 언어의 정의상, 하나님 나라는 인간이 이룰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이상에서 부정진술 네 가지로 하나님 나라를 묵상해 보았다. 하나님 나라는 내 나라가 아니고, 죽어 가는 나라가 아니고, 유대인들이 꿈꾸던 나라가 아니고, 크리스텐돔도 아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는 무엇일까? 이 묵상이 이어져 가길 바란다. 이어지는 묵상이 이 네 가지 함정에 빠지지 않길 바란다.


#하나님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