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안 땅의 비옥함과 풍요로움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숙어로 표현됩니다. 어릴 때 읽었던 만화로 된 성경에 사람들이 멧돼지만 한 포도 송이를 나무에 꿰어 들러 매고 가는 장면으로 이 가나안 땅의 풍요로움이 묘사되었는데요, 그 이미지가 아직도 머릿속에 남아 있는 걸 보면 현대 유전공학도 이루어내지 못한 그 비옥함의 성과가 상당히 인상적이었나 봅니다. 고대근동 지역, 그 중에서도 가나안 땅에서 ‘풍요(fertility)’라는 개념은 “맘몬”이라는 이름으로 비판 받아왔습니다. 가나안의 바알 숭배는 화려한 금은보화와 무절제한 음주가무, 무분별한 성관계 등과 연관되어 금욕주의적 초기 기독교에서 금기시되었습니다. 맘몬 숭배는 물질적 부요를 추구하는 기복신앙으로 지금까지도 명백을 유지하고 있으나(앞으로도 없어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초월적이고 내세적인 신앙관으로부터, 또 다른 쪽에서는 해방신학적 입장으로부터 ‘수준 낮은’ 신앙으로 폄하되어 왔습니다.
풍요의 상징: “젖과 꿀이 흐르는 땅”과 “맘몬”
하지만 좀 더 생각해 보면, 만약 이스라엘의 문화가 가나안 땅의 비옥함에 기반하여 형성되었다면,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3:17)”,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창3:18)” 같은 표현들은 성경에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라고 지시한 땅이 그렇게 풍요로운 땅이었다면 아브라함이 이집트로 피난을 가야할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가나안 땅에 발을 들인 아브라함에게 닥친 첫번째 사건은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창 12:10)입니다.
사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표현은 창세기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출-레-민-신에만 주로 나오는 표현입니다(출 3:8; 3:17; 13:5; 33:3; 레 20:24; 민 13:27; 14:8; 16:13-14; 신 6:3; 11:9; 26:9; 26:15; 27:3; 31:20). 이 외에는 여호수아(5:6)와 예레미야(11:5), 애가(32:22)와 에스겔(20:6; 20:15)에 간간히 나옵니다.
“맘몬”이라는 단어도 구약성경 어디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마모나스μαμωνᾶς(혹은 맘모나스μαμμωνᾶς)라는 단어는 오직 마 6:24와 눅 16:9, 11, 13에서만 등장하는 단어로서 개역개정에서는 모두 “재물”로 번역했습니다. 이 단어는 아람어 맘몬(ממון)에 정관사가 포함된 맘모나(ממונא)를 그리스어로 음역한 것으로, 재산(wealth)이나 이득(profit), 부요(riches)를 의미합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개역개정을 비롯해 새번역, 공동번역 등 우리말로 된 어느 성경도 이 단어를 “맘몬”으로 음역하지 않았음에도 상당수 기독교인들이 이 아람어 단어를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에는 전혀 없고 신약에서도 예수님의 말씀에서 단 한번(마 6장과 눅 16장의 병행본문) 쓰인 이 단어가 이렇게 널리 퍼지게 된 것이 상당히 의아합니다. 어쩌면 지나치게 과장된 해석이 이 단어에 부여된 것이 아닐까 충분히 의심할 만 합니다.
고대근동의 지리와 생태
사실 이 지역을 지도에서 언뜻 보면, 이집트와 히타이트(헷),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라는 네 개의 거대한 강대국 한 가운데 있는데다 왼쪽으로는 지중해가 드넓게 펼쳐 있어서 어떻게 이런 곳에 소규모 국가들이 버텨낼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하지만 지도를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상황이 이해가 됩니다. 고대에는 이 넓은 지중해 해안가 중에 실제 배를 댈 수 있는 곳이 몇 군데 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남쪽으로는 사람이 살 수 없는 사막 지대가 자리잡고 있고, 오른쪽과 위쪽은 길게 늘어진 산맥들이 자리잡고 있어서, 이웃 강대국들이 이 지역에 들어올 수 있는 루트가 극히 한정적이고 그 길마저도 상당히 비좁게 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이 지역은 그렇게 불편함을 무릅쓰고 차지할 만한 비옥한 땅이 아니었습니다. 사막과 고산지대를 제외하고 사람이 그나마 살 수 있는 곳은 페니키아 도시국가들이 자리잡은 지중해 연안의 저지대와 이스라엘이 위치한 구릉지대 정도입니다. 이 두 지역에서나 어느 정도 강수량이 있고, 내린 비가 땅 밑으로 가라앉거나 산기슭을 따라 흘러내려가지 않아 겨우 농사를 지을 수 있습니다(이 지도에서 푸른색으로 되어 있는 곳이 사람이 살만한 곳입니다. 가나안 지역은 양옆으로 좁고 위아래로 길게 되어 있는 아주 좁은 지역에서만 생존이 가능함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가나안의 풍요”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대규모 제국은 주기적으로 범람하는 나일강이나 상시적으로 흐르는 두 강(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에 의해 문명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대 가나안은 지역 전체를 커버하는 풍부한 유량을 가진 강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농사는 하늘에서 내리는 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가나안 땅에서의 풍요가 “이른 비와 늦은 비”로 표현되는 이유입니다.
신 11:14 여호와께서 너희의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욜 2:23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를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예전과 같을 것이라
시 84:6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야곱을 장자 에서라고 착각한 이삭의 축복은 다음과 같습니다.
창 27:28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늘의 이슬”이 바로 비입니다. 장자의 축복을 빼앗긴 에서에게는 적절할 때에 내리는 비마저도 허락되지 않습니다.
창 27:39 네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멀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멀 것이며
비에 의존하는 땅은 불안정합니다. 언제든 기근이 들 수 있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서의 많은 이야기들은 “기근”과 “흉년”으로 촉발됩니다. 가나안 땅에 처음 들어간 아브라함이 이집트로 가야만 했던 이유(창 12:10)도 기근 때문이고, 팔레스타인의 아비멜렉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던 이삭(창 26:1), 그리고 요셉이 이집트에 있던 시절의 가나안(창 42-43장), 엘리멜렉과 나오미가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 땅에서 난민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던 것(룻 1:1), 다윗이 다스리던 시절에도 3년의 기근(삼하 21장)과 7년의 기근(삼하 24장) 등이 있었고, 엘리야와 아합 시대에도(왕상 18:2), 엘리사 시대에도(왕하 8:1), 가나안 땅은 물 부족 현상을 겪게 됩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표현이 무색해집니다.
이 땅에서의 ‘풍요’란 그저 비가 제 때 내려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상태에 있는 것을 의미할 뿐입니다. 그 땅의 ‘비옥함’이란 캘리포니아나 김제 평야의 곡창 지대의 비옥함에 전혀 비할 바가 아닙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표현은 아마도 상대적인 평가일 것입니다. 광야생활을 40년씩 하던 사람들이 보기에 겨우 비에 의존하는 불안한 상태조차도 엄청난 축복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21세기의 우리가 경험하는 혹은 경계하는 '풍요'와 고대 가나안 지역(이스라엘이든 팔레스타인이든)의 '풍요'를 같은 레벨로 보는 것은 적절한 이해가 아닙니다.
가나안 땅의 비옥함과 풍요로움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숙어로 표현됩니다. 어릴 때 읽었던 만화로 된 성경에 사람들이 멧돼지만 한 포도 송이를 나무에 꿰어 들러 매고 가는 장면으로 이 가나안 땅의 풍요로움이 묘사되었는데요, 그 이미지가 아직도 머릿속에 남아 있는 걸 보면 현대 유전공학도 이루어내지 못한 그 비옥함의 성과가 상당히 인상적이었나 봅니다. 고대근동 지역, 그 중에서도 가나안 땅에서 ‘풍요(fertility)’라는 개념은 “맘몬”이라는 이름으로 비판 받아왔습니다. 가나안의 바알 숭배는 화려한 금은보화와 무절제한 음주가무, 무분별한 성관계 등과 연관되어 금욕주의적 초기 기독교에서 금기시되었습니다. 맘몬 숭배는 물질적 부요를 추구하는 기복신앙으로 지금까지도 명백을 유지하고 있으나(앞으로도 없어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초월적이고 내세적인 신앙관으로부터, 또 다른 쪽에서는 해방신학적 입장으로부터 ‘수준 낮은’ 신앙으로 폄하되어 왔습니다.
풍요의 상징: “젖과 꿀이 흐르는 땅”과 “맘몬”
하지만 좀 더 생각해 보면, 만약 이스라엘의 문화가 가나안 땅의 비옥함에 기반하여 형성되었다면,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3:17)”,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창3:18)” 같은 표현들은 성경에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라고 지시한 땅이 그렇게 풍요로운 땅이었다면 아브라함이 이집트로 피난을 가야할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가나안 땅에 발을 들인 아브라함에게 닥친 첫번째 사건은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창 12:10)입니다.
사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표현은 창세기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출-레-민-신에만 주로 나오는 표현입니다(출 3:8; 3:17; 13:5; 33:3; 레 20:24; 민 13:27; 14:8; 16:13-14; 신 6:3; 11:9; 26:9; 26:15; 27:3; 31:20). 이 외에는 여호수아(5:6)와 예레미야(11:5), 애가(32:22)와 에스겔(20:6; 20:15)에 간간히 나옵니다.
“맘몬”이라는 단어도 구약성경 어디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마모나스μαμωνᾶς(혹은 맘모나스μαμμωνᾶς)라는 단어는 오직 마 6:24와 눅 16:9, 11, 13에서만 등장하는 단어로서 개역개정에서는 모두 “재물”로 번역했습니다. 이 단어는 아람어 맘몬(ממון)에 정관사가 포함된 맘모나(ממונא)를 그리스어로 음역한 것으로, 재산(wealth)이나 이득(profit), 부요(riches)를 의미합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개역개정을 비롯해 새번역, 공동번역 등 우리말로 된 어느 성경도 이 단어를 “맘몬”으로 음역하지 않았음에도 상당수 기독교인들이 이 아람어 단어를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에는 전혀 없고 신약에서도 예수님의 말씀에서 단 한번(마 6장과 눅 16장의 병행본문) 쓰인 이 단어가 이렇게 널리 퍼지게 된 것이 상당히 의아합니다. 어쩌면 지나치게 과장된 해석이 이 단어에 부여된 것이 아닐까 충분히 의심할 만 합니다.
고대근동의 지리와 생태
사실 이 지역을 지도에서 언뜻 보면, 이집트와 히타이트(헷),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라는 네 개의 거대한 강대국 한 가운데 있는데다 왼쪽으로는 지중해가 드넓게 펼쳐 있어서 어떻게 이런 곳에 소규모 국가들이 버텨낼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하지만 지도를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상황이 이해가 됩니다. 고대에는 이 넓은 지중해 해안가 중에 실제 배를 댈 수 있는 곳이 몇 군데 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남쪽으로는 사람이 살 수 없는 사막 지대가 자리잡고 있고, 오른쪽과 위쪽은 길게 늘어진 산맥들이 자리잡고 있어서, 이웃 강대국들이 이 지역에 들어올 수 있는 루트가 극히 한정적이고 그 길마저도 상당히 비좁게 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이 지역은 그렇게 불편함을 무릅쓰고 차지할 만한 비옥한 땅이 아니었습니다. 사막과 고산지대를 제외하고 사람이 그나마 살 수 있는 곳은 페니키아 도시국가들이 자리잡은 지중해 연안의 저지대와 이스라엘이 위치한 구릉지대 정도입니다. 이 두 지역에서나 어느 정도 강수량이 있고, 내린 비가 땅 밑으로 가라앉거나 산기슭을 따라 흘러내려가지 않아 겨우 농사를 지을 수 있습니다(이 지도에서 푸른색으로 되어 있는 곳이 사람이 살만한 곳입니다. 가나안 지역은 양옆으로 좁고 위아래로 길게 되어 있는 아주 좁은 지역에서만 생존이 가능함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가나안의 풍요”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대규모 제국은 주기적으로 범람하는 나일강이나 상시적으로 흐르는 두 강(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에 의해 문명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대 가나안은 지역 전체를 커버하는 풍부한 유량을 가진 강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농사는 하늘에서 내리는 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가나안 땅에서의 풍요가 “이른 비와 늦은 비”로 표현되는 이유입니다.
신 11:14 여호와께서 너희의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욜 2:23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 비를 너희에게 적당하게 주시리니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예전과 같을 것이라
시 84:6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야곱을 장자 에서라고 착각한 이삭의 축복은 다음과 같습니다.
창 27:28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늘의 이슬”이 바로 비입니다. 장자의 축복을 빼앗긴 에서에게는 적절할 때에 내리는 비마저도 허락되지 않습니다.
창 27:39 네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멀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멀 것이며
비에 의존하는 땅은 불안정합니다. 언제든 기근이 들 수 있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서의 많은 이야기들은 “기근”과 “흉년”으로 촉발됩니다. 가나안 땅에 처음 들어간 아브라함이 이집트로 가야만 했던 이유(창 12:10)도 기근 때문이고, 팔레스타인의 아비멜렉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던 이삭(창 26:1), 그리고 요셉이 이집트에 있던 시절의 가나안(창 42-43장), 엘리멜렉과 나오미가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 땅에서 난민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던 것(룻 1:1), 다윗이 다스리던 시절에도 3년의 기근(삼하 21장)과 7년의 기근(삼하 24장) 등이 있었고, 엘리야와 아합 시대에도(왕상 18:2), 엘리사 시대에도(왕하 8:1), 가나안 땅은 물 부족 현상을 겪게 됩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표현이 무색해집니다.
이 땅에서의 ‘풍요’란 그저 비가 제 때 내려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상태에 있는 것을 의미할 뿐입니다. 그 땅의 ‘비옥함’이란 캘리포니아나 김제 평야의 곡창 지대의 비옥함에 전혀 비할 바가 아닙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표현은 아마도 상대적인 평가일 것입니다. 광야생활을 40년씩 하던 사람들이 보기에 겨우 비에 의존하는 불안한 상태조차도 엄청난 축복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21세기의 우리가 경험하는 혹은 경계하는 '풍요'와 고대 가나안 지역(이스라엘이든 팔레스타인이든)의 '풍요'를 같은 레벨로 보는 것은 적절한 이해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