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도행전을 관통하며 사도행전의 플롯을 이끌어 가는 주제가 있다면 무엇일까? 쉽게 생각해 볼 수 있는 답은 성령일 것이다. 그러나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성령의 활동은 성령 받은 사도들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전개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령은 사도들의 배후에서 활동하고, 사도들이 전면에 있다.
사도들에 주목해 보자. 그들이 앞세우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은 무엇을 위하여 일하고, 무엇에 힘입어 일하고, 무엇을 전하기 위하여 애쓰고, 무엇 때문에 핍박 받았는가? 그 답은 하나, 예수의 이름이다. το ὀνόμα Ἰησοῦ(토 오노마 이에수)
사도행전을 읽었다 하더라도, 주의깊게 읽지 않았다면, “예수의 이름”이 사도행전을 관통하고 사도행전 플롯을 이끌어 가는 주제라는 것을 캐치하지 못하고 넘어갔을 가능성이 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예수의 이름"에 관해 묵상해 보자.
구원을 주는 예수의 이름
오순절에 사도들에게 성령이 임한 후(행 2:1-13) 베드로의 연설이 이어지는데, 그 연설의 핵심은 구약에 예언된 말씀이 예수에게서 성취되었다는 주장이다. 성취된 구약의 말씀 중 베드로는 이 말씀을 부각시켰다.
사도행전 2:21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요엘 2:32 인용)
요엘이 말하는 "주님의 이름", 구원을 가져다 주는 그 이름이 "예수의 이름"으로 성취되었다는 점을 베드로는 이렇게 설명한다.
사도행전 2:36-38
“그러므로 이스라엘 온 집안은 확실히 알아두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주님과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찔려서 “형제들이여,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말하였다.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각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용서를 받으십시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이 구원을 주는 이유는 예수가 “주님과 그리스도”(36절)이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그를 통하여 구원에 이르고자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38절) 죄용서를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아야 한다.
세례자 요한이 선포한 세례가 예수 운동으로 이어지는 것을 본다. 아직 세례는 “예수와 함께 죽고 사는 신비“를 담고 있지 못하고, 죄 용서의 세례에 머물러 있다. 죄 용서를 제사장과 성전이 독점하고 있던 시절에, 세례를 통하여 받는 죄 용서를 선언하였다는 점은 놀랍고 획기적인 선언이다.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시작된 이 운동은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종교/사회 체제를 위협하고 흔들기에 충분하였다. 요단강가에서 시작된 이 운동이 이제 예루살렘에서 선포되고 있으니 엄청난 진전이다. 단지 공간만 바뀐 것이 아니라, 내용에도 변화가 있었는데, 세례를 ”예수의 이름“으로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죄 용서는 제사장들을 통하여 올려 드리는 동물 제사를 통하여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는 세례를 통하여 받을 수 있다. 예수가 주님이고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전도하는 장면은 “예수의 이름”이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 되고 있는 듯한 암시를 준다.
사도행전 8:12
“그런데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한 기쁜 소식을 전하니, 남자나 여자나 다 그의 말을 믿고서 세례를 받았다.”
빌립이 전한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한 기쁜 소식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에 의해 시작되었고, 예수 없는 시공간에서 "그의 이름"이 하나님 나라를 표상하고 있다.
예수 이름의 능력
예수 이름으로 선포된 구원의 현실은 베드로와 바울과 같은 사도들이 “예수의 이름”을 힘입어 행한 기적 사건들을 통하여 구상화된다. 사도행전 3장에 나오는 성전 미문에서 있었던 치유 기적이 그런 이야기의 시작점이다.
사도행전 3:6-8
베드로가 말하기를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하고,”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는 즉시 다리와 발목에 힘을 얻어서, 벌떡 일어나서 걸었다. 그는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갔다.
베드로가 외친 선포에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가 걷지 못하는 자를 일으킨 놀라운 능력의 근원이다. ἐν τῷ ὀνόματι Ἰησοῦ Χριστοῦ(엔토오노마티이에수크리스투), 직역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인데, 의역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주는 능력 안에서” 정도가 될 수 있겠다. 베드로가 이 구걸하는 걷지 못하는 이에게 준 것은 "예수의 이름" 안에 있는 능력이었다. 베드로는 그 이름 안에 담긴 놀라운 능력을 알고 있었다. 치유의 사건이 베드로의 능력이 아니라, "예수 이름"의 능력으로 일어났다는 점이 사도행전이 전하는 이 사건의 핵심이다. 성령 곧 예수의 영을 받은 사도들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는데, 말에 있어서 파레시아(담대함)가 첫째이고, 둘째는 예수의 이름에 숨겨진 의미와 능력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능력이 가장 잘 드러나는 또 하나의 장면은 귀신을 쫓을 때이다. 귀신을 쫓을 때, 예수 이름으로 명하여 쫓는 것은 사도행전부터 내려온 전통이다. 사도행전 16장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바울 사도가 빌립보에 도착하여 활동할 때에 귀신들려 점을 치는 한 여종이 바울 사도 일행을 따라다니면서,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인데, 여러분에게 구원의 소식을 전하러 왔다”고 계속 따라 다니는 것 아닌가. 그 다음 이야기를 아래 본문에서 읽어보자.
사도행전 16:18
“그 여자가 여러 날을 두고 이렇게 하므로, 바울이 귀찮게 여기고 돌아서서, 그 귀신에게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네게 명하니, 이 여자에게서 나오라” 하고 말하니, 바로 그 순간에 귀신이 나왔다.”
"예수의 이름“이 주는 능력이 다시 한번 빛나는 장면이다.
그런데, ”예수의 이름“을 사용한다고 하여, 매번 능력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사도행전 19장의 이야기는 16장의 이야기와 대비되며, 이 점을 깨닫게 해준다. 코믹하다 할 정도로 재밌는 이야기이기도 한데, 바울 사도가 에베소에서 전도할 때 예수의 이름으로 놀라운 기적을 행하는 것을 본 사람들이 바울이 외치는 “예수의 이름”을 따라 한다. 그때 일어난 일은 이렇다.
사도행전 19:13-16
그런데 귀신 축출가로 행세하며 떠돌아다니는 몇몇 유대 사람조차도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힘입어서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다” 하고 말하면서, 악귀 들린 사람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이용하여 귀신을 내쫓으려고 시도하였다. 스게와라는 유대인 제사장의 일곱 아들도 이런 일을 하였는데, 귀신이 그들에게 “나는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지만, 당신들은 도대체 누구요?” 하고 말하였다. 그리고서 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달려들어, 그들을 짓눌러 이기니, 그들은 몸에 상처를 입고서,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였다.
“예수의 이름” 그 자체가 도깨비 방망이이나 되는 줄 알고 휘둘렀는데, 오히려 귀신들에게 짓눌려 도망치게 된 스게와의 일곱 아들 이야기이다. “예수의 이름”을 말한다고 해서 항상 능력이 나타나지는 않는다.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가?
솔로몬 행각에서 행한 설교를 통해, 베드로 사도는 이 차이가 어디서 오는지를 꼭 집어 말한다.
사도행전 3:15-16
그런데 바로 이 예수의 이름이, 여러분이 지금 보고 있고 잘 알고 있는 이 사람을 낫게 하였으니, 이것은 그의 이름을 믿는 믿음을 힘입어서 된 것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은 그 믿음이 이 사람을 여러분 앞에서 이렇게 완전히 성하게 한 것입니다.”
“그의 이름을 믿는 믿음”을 원문은 ἐπὶ τῇ πίστει τοῦ ὀνόματος αὐτοῦ(에피테피스테이투오노마토스아우투)라 한다. “예수의 이름에 대한 믿음”이 치유 기적의 전제라는 설명이다. 이 점이 같은 “예수의 이름”을 외쳤다 할지라도 16장과 19장에서 다른 결과를 만나게 된 이유이다.
예수 이름에 대한 믿음의 진정성은 예수 이름 때문에 받는 고난을 이기는 것
사도행전에서는 믿음의 진정성이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 이름의 능력이 나타났다. 예수 이름에 대한 믿음, 그 진정성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사도행전에서는 그 이름을 위하여 핍박 받고 고난 당하는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그 이름에 대한 믿음의 진정성을 보이는 것으로 이해한다.
사도행전 4장과 5장에는 유대 지도자들과 사도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중심으로 대립하는 모습이 그려져있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의 이름”에 대해 함구할 것을 명령한 반면, 주님의 천사들은 가서 성전에서 씩씩하게 (그 이름을) 계속 전하라고 격려한다. 사도들의 선택은 자명하였고, 그 덕에 사도들은 모진 핍박을 당하게 된다. 사도행전이 다루는 주제는 선명하다. “예수 이름 앞에 얼마나 진정성 있는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 그 진정성은 “그의 이름”으로 인한 고난을 기꺼이 감당하는 태도를 통하여 증명된다.
사도행전 4:18
그런 다음에, 그들은 그 두 사람을 불러서, 절대로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명령하였다.
사도행전 5:18-20, 27-29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다. 그런데 밤에 주님의 천사가 감옥 문을 열고, 그들을 데리고 나와서 말하기를,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남김없이 백성에게 전하여라!” 하였다 . . . 그들이 사도들을 데려다가 공의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신문하였다. “우리가 그대들에게 그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엄중히 명령하였소. 그런데도 그대들은 그대들의 가르침을 온 예루살렘에 퍼뜨렸소. 그대들은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씌우려 하고 있소.”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였다.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사도행전 5:40-41
그리하여 그들은 사도들을 불러다가 때린 뒤에,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명령하고서 놓아 주었다.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 것을 기뻐하면서, 공의회에서 물러나왔다.
“예수의 이름“을 대하는 사도들의 태도는 이런 면에서 에베소의 점쟁이(스게와의 일곱 아들)들과 구별된다. 후자는 자신들의 유익을 위하여 예수 이름을 사용하려 하였지만, 사도들은 예수 이름을 위하여 자신들을 기꺼이 희생하였다.
아래 두 구절은 사도들이 후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사도행전 15:26
바나바와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입니다.
사도행전 21:13
그 때에 바울이 대답하였다. “왜들 이렇게 울면서, 내 마음을 아프게 하십니까?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해서, 예루살렘에서 결박을 당할 것뿐만 아니라, 죽을 것까지도 각오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에게 ”예수의 이름“은 자신들의 목숨을 내놓을만한 가치였다. 그런 자들에게 "예수의 이름"에 담긴 능력이 나타났다.
“예수의 이름”이 다른 점
선한 일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친 고난의 이야기가 내려온다. 예수 시대에는 율법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아낌없이 버린 선조들의 이야기가 회자 되었다. 예를 들어 율법을 (그 중에서도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는 규정) 지키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기꺼이 버린 일곱 형제와 그들의 어머니 이야기 말이다.(마카베오 하 7장 전체) 이들이 지키고자 한 것은 언약 백성으로서의 유대인 정체성이었다.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당하는 고난은 이와 성격이 다르다. 바운더리를 지키기 위한 고난이 아니라, 바운더리를 깨고 넓히기 위한 고난이었다. 율법을 위한 고난과 달리 "예수의 이름"을 위한 고난은, 하나님 나라의 현실이 좁은 민족적 바운더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 가운데 이루어진다는 비전 가운데 겪게 되는 고난이었다.
"예수의 이름"만 구원을 준다는 선언은 나중에 종교개혁자들이 외친 "오직 예수"로 계승되었다. "예수의 이름"이든, "오직 예수"든, 잘못 이해하면 편협하고 좁은 지경에 갇힌 종교적 인물들을 만들어 내기 딱 좋다. 종교적 가스라이팅에 사용될 위험이 있다는 말이다. "예수의 이름"은 그런 이름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의 이름"은 자기 중심의 좁은 지평에 갇힌 우리를 흔들어 깨워, 조물주 하나님의 마음과 시선으로 온 생명을 바라보게 하는 이름이고, 그리하여 우리의 시선과 삶에 자유와 해방을 선사하는 이름이다.
사도행전을 관통하며 사도행전의 플롯을 이끌어 가는 주제가 있다면 무엇일까? 쉽게 생각해 볼 수 있는 답은 성령일 것이다. 그러나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성령의 활동은 성령 받은 사도들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전개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령은 사도들의 배후에서 활동하고, 사도들이 전면에 있다.
사도들에 주목해 보자. 그들이 앞세우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은 무엇을 위하여 일하고, 무엇에 힘입어 일하고, 무엇을 전하기 위하여 애쓰고, 무엇 때문에 핍박 받았는가? 그 답은 하나, 예수의 이름이다. το ὀνόμα Ἰησοῦ(토 오노마 이에수)
사도행전을 읽었다 하더라도, 주의깊게 읽지 않았다면, “예수의 이름”이 사도행전을 관통하고 사도행전 플롯을 이끌어 가는 주제라는 것을 캐치하지 못하고 넘어갔을 가능성이 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예수의 이름"에 관해 묵상해 보자.
구원을 주는 예수의 이름
오순절에 사도들에게 성령이 임한 후(행 2:1-13) 베드로의 연설이 이어지는데, 그 연설의 핵심은 구약에 예언된 말씀이 예수에게서 성취되었다는 주장이다. 성취된 구약의 말씀 중 베드로는 이 말씀을 부각시켰다.
사도행전 2:21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요엘 2:32 인용)
요엘이 말하는 "주님의 이름", 구원을 가져다 주는 그 이름이 "예수의 이름"으로 성취되었다는 점을 베드로는 이렇게 설명한다.
사도행전 2:36-38
“그러므로 이스라엘 온 집안은 확실히 알아두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주님과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찔려서 “형제들이여,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말하였다.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각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용서를 받으십시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이 구원을 주는 이유는 예수가 “주님과 그리스도”(36절)이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그를 통하여 구원에 이르고자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38절) 죄용서를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아야 한다.
세례자 요한이 선포한 세례가 예수 운동으로 이어지는 것을 본다. 아직 세례는 “예수와 함께 죽고 사는 신비“를 담고 있지 못하고, 죄 용서의 세례에 머물러 있다. 죄 용서를 제사장과 성전이 독점하고 있던 시절에, 세례를 통하여 받는 죄 용서를 선언하였다는 점은 놀랍고 획기적인 선언이다.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시작된 이 운동은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종교/사회 체제를 위협하고 흔들기에 충분하였다. 요단강가에서 시작된 이 운동이 이제 예루살렘에서 선포되고 있으니 엄청난 진전이다. 단지 공간만 바뀐 것이 아니라, 내용에도 변화가 있었는데, 세례를 ”예수의 이름“으로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죄 용서는 제사장들을 통하여 올려 드리는 동물 제사를 통하여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는 세례를 통하여 받을 수 있다. 예수가 주님이고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전도하는 장면은 “예수의 이름”이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 되고 있는 듯한 암시를 준다.
사도행전 8:12
“그런데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한 기쁜 소식을 전하니, 남자나 여자나 다 그의 말을 믿고서 세례를 받았다.”
빌립이 전한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한 기쁜 소식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에 의해 시작되었고, 예수 없는 시공간에서 "그의 이름"이 하나님 나라를 표상하고 있다.
예수 이름의 능력
예수 이름으로 선포된 구원의 현실은 베드로와 바울과 같은 사도들이 “예수의 이름”을 힘입어 행한 기적 사건들을 통하여 구상화된다. 사도행전 3장에 나오는 성전 미문에서 있었던 치유 기적이 그런 이야기의 시작점이다.
사도행전 3:6-8
베드로가 말하기를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하고,”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는 즉시 다리와 발목에 힘을 얻어서, 벌떡 일어나서 걸었다. 그는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갔다.
베드로가 외친 선포에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가 걷지 못하는 자를 일으킨 놀라운 능력의 근원이다. ἐν τῷ ὀνόματι Ἰησοῦ Χριστοῦ(엔토오노마티이에수크리스투), 직역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인데, 의역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주는 능력 안에서” 정도가 될 수 있겠다. 베드로가 이 구걸하는 걷지 못하는 이에게 준 것은 "예수의 이름" 안에 있는 능력이었다. 베드로는 그 이름 안에 담긴 놀라운 능력을 알고 있었다. 치유의 사건이 베드로의 능력이 아니라, "예수 이름"의 능력으로 일어났다는 점이 사도행전이 전하는 이 사건의 핵심이다. 성령 곧 예수의 영을 받은 사도들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는데, 말에 있어서 파레시아(담대함)가 첫째이고, 둘째는 예수의 이름에 숨겨진 의미와 능력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능력이 가장 잘 드러나는 또 하나의 장면은 귀신을 쫓을 때이다. 귀신을 쫓을 때, 예수 이름으로 명하여 쫓는 것은 사도행전부터 내려온 전통이다. 사도행전 16장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바울 사도가 빌립보에 도착하여 활동할 때에 귀신들려 점을 치는 한 여종이 바울 사도 일행을 따라다니면서,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인데, 여러분에게 구원의 소식을 전하러 왔다”고 계속 따라 다니는 것 아닌가. 그 다음 이야기를 아래 본문에서 읽어보자.
사도행전 16:18
“그 여자가 여러 날을 두고 이렇게 하므로, 바울이 귀찮게 여기고 돌아서서, 그 귀신에게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네게 명하니, 이 여자에게서 나오라” 하고 말하니, 바로 그 순간에 귀신이 나왔다.”
"예수의 이름“이 주는 능력이 다시 한번 빛나는 장면이다.
그런데, ”예수의 이름“을 사용한다고 하여, 매번 능력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사도행전 19장의 이야기는 16장의 이야기와 대비되며, 이 점을 깨닫게 해준다. 코믹하다 할 정도로 재밌는 이야기이기도 한데, 바울 사도가 에베소에서 전도할 때 예수의 이름으로 놀라운 기적을 행하는 것을 본 사람들이 바울이 외치는 “예수의 이름”을 따라 한다. 그때 일어난 일은 이렇다.
사도행전 19:13-16
그런데 귀신 축출가로 행세하며 떠돌아다니는 몇몇 유대 사람조차도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힘입어서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다” 하고 말하면서, 악귀 들린 사람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이용하여 귀신을 내쫓으려고 시도하였다. 스게와라는 유대인 제사장의 일곱 아들도 이런 일을 하였는데, 귀신이 그들에게 “나는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지만, 당신들은 도대체 누구요?” 하고 말하였다. 그리고서 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달려들어, 그들을 짓눌러 이기니, 그들은 몸에 상처를 입고서,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였다.
“예수의 이름” 그 자체가 도깨비 방망이이나 되는 줄 알고 휘둘렀는데, 오히려 귀신들에게 짓눌려 도망치게 된 스게와의 일곱 아들 이야기이다. “예수의 이름”을 말한다고 해서 항상 능력이 나타나지는 않는다.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가?
솔로몬 행각에서 행한 설교를 통해, 베드로 사도는 이 차이가 어디서 오는지를 꼭 집어 말한다.
사도행전 3:15-16
그런데 바로 이 예수의 이름이, 여러분이 지금 보고 있고 잘 알고 있는 이 사람을 낫게 하였으니, 이것은 그의 이름을 믿는 믿음을 힘입어서 된 것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은 그 믿음이 이 사람을 여러분 앞에서 이렇게 완전히 성하게 한 것입니다.”
“그의 이름을 믿는 믿음”을 원문은 ἐπὶ τῇ πίστει τοῦ ὀνόματος αὐτοῦ(에피테피스테이투오노마토스아우투)라 한다. “예수의 이름에 대한 믿음”이 치유 기적의 전제라는 설명이다. 이 점이 같은 “예수의 이름”을 외쳤다 할지라도 16장과 19장에서 다른 결과를 만나게 된 이유이다.
예수 이름에 대한 믿음의 진정성은 예수 이름 때문에 받는 고난을 이기는 것
사도행전에서는 믿음의 진정성이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 이름의 능력이 나타났다. 예수 이름에 대한 믿음, 그 진정성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사도행전에서는 그 이름을 위하여 핍박 받고 고난 당하는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그 이름에 대한 믿음의 진정성을 보이는 것으로 이해한다.
사도행전 4장과 5장에는 유대 지도자들과 사도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중심으로 대립하는 모습이 그려져있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의 이름”에 대해 함구할 것을 명령한 반면, 주님의 천사들은 가서 성전에서 씩씩하게 (그 이름을) 계속 전하라고 격려한다. 사도들의 선택은 자명하였고, 그 덕에 사도들은 모진 핍박을 당하게 된다. 사도행전이 다루는 주제는 선명하다. “예수 이름 앞에 얼마나 진정성 있는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 그 진정성은 “그의 이름”으로 인한 고난을 기꺼이 감당하는 태도를 통하여 증명된다.
사도행전 4:18
그런 다음에, 그들은 그 두 사람을 불러서, 절대로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명령하였다.
사도행전 5:18-20, 27-29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다. 그런데 밤에 주님의 천사가 감옥 문을 열고, 그들을 데리고 나와서 말하기를,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남김없이 백성에게 전하여라!” 하였다 . . . 그들이 사도들을 데려다가 공의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신문하였다. “우리가 그대들에게 그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엄중히 명령하였소. 그런데도 그대들은 그대들의 가르침을 온 예루살렘에 퍼뜨렸소. 그대들은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씌우려 하고 있소.”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였다.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사도행전 5:40-41
그리하여 그들은 사도들을 불러다가 때린 뒤에,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명령하고서 놓아 주었다.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 것을 기뻐하면서, 공의회에서 물러나왔다.
“예수의 이름“을 대하는 사도들의 태도는 이런 면에서 에베소의 점쟁이(스게와의 일곱 아들)들과 구별된다. 후자는 자신들의 유익을 위하여 예수 이름을 사용하려 하였지만, 사도들은 예수 이름을 위하여 자신들을 기꺼이 희생하였다.
아래 두 구절은 사도들이 후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사도행전 15:26
바나바와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입니다.
사도행전 21:13
그 때에 바울이 대답하였다. “왜들 이렇게 울면서, 내 마음을 아프게 하십니까?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해서, 예루살렘에서 결박을 당할 것뿐만 아니라, 죽을 것까지도 각오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에게 ”예수의 이름“은 자신들의 목숨을 내놓을만한 가치였다. 그런 자들에게 "예수의 이름"에 담긴 능력이 나타났다.
“예수의 이름”이 다른 점
선한 일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친 고난의 이야기가 내려온다. 예수 시대에는 율법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아낌없이 버린 선조들의 이야기가 회자 되었다. 예를 들어 율법을 (그 중에서도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는 규정) 지키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기꺼이 버린 일곱 형제와 그들의 어머니 이야기 말이다.(마카베오 하 7장 전체) 이들이 지키고자 한 것은 언약 백성으로서의 유대인 정체성이었다.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당하는 고난은 이와 성격이 다르다. 바운더리를 지키기 위한 고난이 아니라, 바운더리를 깨고 넓히기 위한 고난이었다. 율법을 위한 고난과 달리 "예수의 이름"을 위한 고난은, 하나님 나라의 현실이 좁은 민족적 바운더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 가운데 이루어진다는 비전 가운데 겪게 되는 고난이었다.
"예수의 이름"만 구원을 준다는 선언은 나중에 종교개혁자들이 외친 "오직 예수"로 계승되었다. "예수의 이름"이든, "오직 예수"든, 잘못 이해하면 편협하고 좁은 지경에 갇힌 종교적 인물들을 만들어 내기 딱 좋다. 종교적 가스라이팅에 사용될 위험이 있다는 말이다. "예수의 이름"은 그런 이름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의 이름"은 자기 중심의 좁은 지평에 갇힌 우리를 흔들어 깨워, 조물주 하나님의 마음과 시선으로 온 생명을 바라보게 하는 이름이고, 그리하여 우리의 시선과 삶에 자유와 해방을 선사하는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