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남침례회(Southern Baptist Convention)는 회중교회 전통과 개교회주의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교회 내의 의사를 결정하는 구조와 방식은 개교회가 자체적으로 규정합니다. 제가 경험했던 시카고의 한 남침례회 교회는 ‘제비뽑기’로 교회의 중요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장로교 전통에서 성장해서 합의와 다수결의 원리에 익숙했던 저에게 이런 방식은 무척 낯설었습니다. 21세기에 제비뽑기라니, 저의 첫 반응은 당황과 웃음, 어이없음과 이해불가의 중간 어디쯤이었습니다.
현대인의 사고 속에 ‘제비뽑기’는 무작위와 우연이라는 개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비합리적'입니다. 마음대로 선택하고 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신이 정해준) 운명(fate)’으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오늘은 성경에 언급된 제비뽑기의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우리 성경에서 “제비” 혹은 “제비뽑기”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단어는 고랄(גּוֹרָל)입니다. 성경(구약)에서 총 77회 언급되지만,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우리말의 “뽑기”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의 방식은 여러 개체에 무언가를 표시하고 그 중 하나를 뽑아 당첨자를 정하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성경의 제비는 이와는 다르게, 무언가를 던져서 그것이 어디로 떨어지는지를 살피는 방식입니다. 고랄은 던지는 것이며(수 18:8), 누구에게로 떨어지거나(욘 1:7; 대하 26:14), 어디 위로 올라가는 것으로 표현됩니다(레 16:9). 따라서 아마도 작은 돌 모양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사전(HALOT)은 어근 가랄(גרל)의 어원을 ‘(작은) 돌’과 연결시키지만, 사실 이 정의는 그렇게 명확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고랄’이 돌일 것이라는 추정에 바탕을 둔 추측일 뿐입니다.
던진다는 점에서는 영어의 ‘casting lots’라는 표현과 유사합니다. 지푸라기나 나무조각 등을 던져서 그것이 어디로 떨어지는지, 혹은 어떤 모양새로 펼쳐지는지에 따라 점괘를 읽는 방식입니다. 이 서양의 방식은 쌀이나 엽전을 던져 그 모양새로 점을 치는 우리의 전통 풍습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고대 이스라엘의 고랄은 여러 사물을 던져서 나온 모양에 따라 점을 판별하는 방식은 아닌 것으로 추정됩니다. 성경에 기록된 ‘제비뽑기’는 특정한 한 사람을 결정하거나, 아니면 ‘yes or no’, ‘go or stop’ 등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 우림(אוּרִים)과 둠밈(תֻּמִּים)
돌을 던져 하나를 선택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고랄은 우림(אוּרִים)과 둠밈(תֻּמִּים)이라는 것을 던지는 방식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여기서 ‘추정’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마소라 본문은 고랄과 우림/둠밈 사이의 관계에 대해 명시적으로 설명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림과 둠밈이 나오는 구절에 고랄이 함께 언급되는 경우는 성경에 없습니다. 또한, 우림과 둠밈은 제사장이 소지하고 다니는 것인데, 고랄은 제사장이 주변에 없는 문맥에서도 나타납니다. 따라서, 고랄과 우림/둠밈 사이의 연결고리는 생각만큼 그리 튼튼하지 않습니다.
우림과 둠밈은 (대)제사장의 에봇(여러 실로 꼬아 만든 앞치마)에 붙인 흉패 안에 넣어 가지고 다니는 물건입니다(출 28:30). 우림과 둠밈은 (대)제사장만이 가지고 다닐 수 있었습니다(신 33:8; 스 2:65; 느 7:65). (대)제사장은 이 우림과 둠밈으로 하나님의 결정 사항을 알게 됩니다.
그(여호수아)는 제사장 엘르아살 앞에 설 것이요 엘르아살은 그를 위하여 우림의 판결로써 여호와 앞에 물을 것이며 그와 온 이스라엘 자손 곧 온 회중은 엘르아살의 말을 따라 나가며 들어올 것이니라(민 27:21)
이 구절의 특징적인 것은, 첫째, 모세를 이어 민족의 지도자가 될 여호수아는, 모세처럼 하나님께 직접 뜻을 묻지 않고, 제사장의 “우림의 판결”을 거쳐 결정해야 한다는 점, 그리고 둘째, “우림의 판결”이 다루는 것은 ‘나감’과 ‘들어옴’이라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판결이라는 점입니다.
- 우림과 둠밈 – 무엇이 긍정(yes)이고 무엇이 부정(no)인가?
이쯤 되면, 우림과 둠밈 중 무엇이 긍정(yes)에 해당되고 무엇이 부정(no)에 해당되는지 궁금해집니다. 어원을 고려하면, 우림이 부정, 둠밈이 긍정이라 여겨집니다. 우림(אוּרִים)은 이전에는 ‘빛’이라는 뜻의 오르(אוֹר)와 어원적으로 연결된 것으로 여겨졌으나, 이제는 ‘저주하다’라는 의미의 아라르(ארר)에서 파생된 단어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둠밈(תֻּמִּים)의 어근 타맘(תמם)은 ‘온전함, 완결’을 의미하기 때문에 긍정적인 의미를 지닌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이러한 추정이 확실하다는 걸 입증하는 성경 본문은 없습니다.
삼상 14:41의 개역개정과 새번역을 비교해 보는 것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개역개정은 마소라본문(MT)에 충실히 번역했고, 새번역은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칠십인역(LXX)과 불가타의 구절을 첨가하여 번역하였습니다.
삼상 14:41
[개역개정] 이에 사울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아뢰되 원하건대 실상을 보이소서 하였더니 요나단과 사울이 뽑히고 백성은 면한지라
[새번역] 사울이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아뢰었다. "오늘 저에게 응답하지 않으시니, 웬일이십니까?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 그 허물이 저에게나 저의 자식 요나단에게 있다면 우림이 나오게 하시고, 그 허물이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있다면 둠밈이 나오게 하십시오." 그러자 요나단과 사울이 걸리고, 백성들의 혐의는 벗겨졌다.
마소라 본문(MT)을 바탕으로 한 개역개정에 따르면, 잘못과 책임이 요나단과 사울 쪽에 있다는 사실을 어떤 방식으로 알게 되었는지는 전혀 설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반면에 칠십인역을 따르는 새번역을 보면, 우림과 둠밈이 어느 것은 ‘긍정’, 어느 것은 ‘부정’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사울은 왕실에 책임이 있다면 우림이, 백성들에게 책임이 있다면 둠밈이 ‘나오게’ 해달라고 말합니다. 아마도 제사장의 흉패 안에서 둘 중 하나가 튀어나오는 방식일 것입니다. 따라서, ‘우림’은 부정적인 것이고 ‘둠밈’은 긍정적인 것이라는 이해도 성경 본문에 근거하지 않은 선입견일 뿐입니다.
- 고랄과 하나님의 뜻 – 민 26:56과 잠 16:33의 번역 문제
성경 시대의 제비 뽑기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었는지, 우림과 둠밈이 어떤 재질과 어떤 모양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그리고 둘 중 무엇이 긍정이고 무엇이 부정인지 등은 사실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고랄과 움밈과 둠밈에 대해 그리 많은 정보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정말 중요한 문제였다면 성경은 거기에 대해 아주 자세히 기록했을 것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이 ‘고랄’이 성경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어떤 우연이나 무작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는 점을 아는 것입니다. 사울과 요나단과 백성들 사이의 책임 여부를 가르는 삼상 14:36-46의 구절에서나, 아이 성 전투의 패배의 책임이 아간에게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과정(수 7:16-18), 다시스로 가는 배가 침몰할 위기에 처한 원인이 요나에게 있음을 알아낸 경우(욘 1:7)에서 보듯이 이 고랄은 진실을 정확히 드러냅니다. 아무나 걸려라가 아닙니다. 한치의 오차도 없습니다. 꿈이나 대언자(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것처럼 우림(과 둠밈) 역시도 하나님의 뜻을 아는 통로 중 하나로 이해됩니다(삼상 28:6,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하지 아니하시므로”).
제비뽑기에 대한 이러한 ‘성경적’ 이해, 혹은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성경이 번역된 경우들이 있습니다. 제비뽑기는 ‘무작위’ 혹은 ‘우연’이라는 현대인의 사고방식이 개입된 번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첫번째는 민 26:56입니다. 히브리어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עַל־פִּי הַגֹּורָל תֵּחָלֵק נַחֲלָתֹו בֵּין רַב לִמְעָט
이것을 직역하면, ‘상속될 땅은 고랄의 결정(입)에 따라 큰 것과 작은 것으로 분배되어야 한다’입니다.
이 문장을 개역개정과 새번역은 다음과 같이 번역합니다.
개역개정: “그 다소를 막론하고 그들의 기업을 제비 뽑아 나눌지니라”
새번역: “각 유산은 제비를 뽑아 나누어야 한다. 사람 수가 많은 지파들은 큰 땅을, 사람 수가 적은 지파들은 적은 땅을 놓고 추첨하여야 한다.”
이제 곧 들어가 점령하게 될 가나안 땅을 열 두 지파 별로 분배하는 장면입니다. 각 지파에 따라 크고 작음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사람 수가 많은 지파가 큰 땅을 차지하고, 수가 적은 지파가 작은 땅을 차지하는 게 순리에 맞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민 26:54). 그런데 성경은 이 분배의 결정을 고랄에 맡깁니다. 무작위 추첨이라는 현대적 사고에 익숙한 번역자들은 지파의 크기에 따라 땅이 분배된다는 것과 그 결정이 ‘제비뽑기’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사실 사이에 불일치, 혹은 모순이 있다고 생각한 듯 합니다.
제비뽑기의 방식으로는 많은 지파에게 큰 땅이, 적은 지파에게는 작은 땅이 배분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개역개정은 “다소를 막론하고”로 번역했습니다. 새번역은 일종의 절충안을 제시하는데, 인구수가 많은 지파들이 큰 땅을 놓고 추첨을 하고, 적은 수의 지파들이 작은 땅을 놓고 추첨하는 식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두 해석 모두 성경의 고랄을 통한 땅의 분배가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반영하여 인구 수에 따라 아주 적절하게 땅 분배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성경 시대의 사고방식을 반영하지 못한 번역입니다(“수가 많은 자에게는 기업을 많이 줄 것이요 수가 적은 자에게는 기업을 적게 줄 것이니(민 26:54)”). 민 26:56은 원문 그대로 ‘(각 지파가) 상속할 땅은 제비(고랄)의 결정에 따라 큰 것(큰 지파에게는 큰 땅)과 작은 것(작은 지파에게는 작은 땅)으로 분배될 것이다’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적절합니다.
문제가 되는 두번째 구절은 잠 16:33입니다.
בַּחֵיק יוּטַל אֶת־הַגֹּורָל וּמֵיְהוָה כָּל־מִשְׁפָּטֹו
히브리어 원문을 직역하면, ‘고랄은 가슴(품)으로 던져진다, 그리고 그것(고랄)의 모든 결정은 주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다’입니다.
개역개정: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새번역: 제비는 사람이 뽑지만, 결정은 주님께서 하신다.
개역개정과 새번역 모두 ‘고랄은 가슴(품)으로 떨어진다’라는 수동태 문장을 ‘제비는 사람이 뽑는다’의 능동태 문장으로 의역합니다. 그리고 둘 다 상반절과 하반절 사이가 반어적 평행법으로 되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뽑으나,” “뽑지만”). 즉, 제비를 뽑는 것과 하나님이 결정하시는 것을 서로 반대되는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번역은 ‘현대화’와 '현지화'를 거친 번역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선, 성경의 고랄은 사람이 능동적으로 뽑는 것이 아닙니다. 수동적으로 누군가의 가슴팍(품) 안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누구의 품으로 떨어질지는 무작위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반영하여 결정됩니다. 따라서, 잠 16:33의 상반절과 하반절은 반어적 평행법이 아니라 동의적 평행법으로 보아야 합니다: “제비(고랄)가 누군가의 품 안으로 던져지ֶ듯이, 모든 결정은 주님께서 하시는 것이다’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적절합니다. 참고로, 잠 16장의 거의 모든 구절이 동의적 평행법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 제비뽑기는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의미가 있는가
제비뽑기로 의사결정을 하는 시카고 교회의 담임목사님께서는 난감한 표정을 짓는 저의 반응을 충분히 예상하며 다음의 대답을 주셨습니다.
“제비뽑기로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 현대인의 감각에는 잘 맞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다수결로 결정되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결정이거나 옳은 결정인 것도 아닙니다. 토의와 합의를 거친 결정이 이론적으로는 이상적이지만, 공동체 안에서 목소리가 큰 사람들의 생각이 지배적으로 반영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자기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 않으시는 성도님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오랜 공부와 고민 끝에 제비뽑기라는 방식을 실험적으로 사용해 보기로 했습니다.
만약 A, B, C라는 세 가지 안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경우라면, 교인들 모두 동일하게 한 표씩을 행사할 수 있고 각자의 판단대로 A, B, C 중 하나에 투표할 수 있습니다. 만약 A안이 60퍼센트의 지지를 받고, B안이 30퍼센트, C안이 10퍼센트라고 한다면, 투표한 것 중에서 제비뽑기로 하나를 뽑으면 A안이 선택될 확률이 가장 높습니다. 그렇지만 B안이나 C안이 선택될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런 방식으로 다수의 의견이 선택될 확률을 높이지만, 동시에 소수의 의견이라도 무시되지 않을 수 있는 장치를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만약 소수의 의견이 선택된다면, 교인분들에게 이해와 동의를 요청합니다. 선택된 안에 대해 많은 분들이 불만이 있을 수 있지만, 제비뽑기로 정해진 안을 1년이나 2년 정도의 한정된 기간 동안 한번 따라보자구요. 지금 많은 분들의 생각으로 좋지 않은 결정이라고 여겨지는 안을 따르는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것을 가르치실 지 배우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미국 남침례회(Southern Baptist Convention)는 회중교회 전통과 개교회주의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교회 내의 의사를 결정하는 구조와 방식은 개교회가 자체적으로 규정합니다. 제가 경험했던 시카고의 한 남침례회 교회는 ‘제비뽑기’로 교회의 중요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장로교 전통에서 성장해서 합의와 다수결의 원리에 익숙했던 저에게 이런 방식은 무척 낯설었습니다. 21세기에 제비뽑기라니, 저의 첫 반응은 당황과 웃음, 어이없음과 이해불가의 중간 어디쯤이었습니다.
현대인의 사고 속에 ‘제비뽑기’는 무작위와 우연이라는 개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비합리적'입니다. 마음대로 선택하고 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신이 정해준) 운명(fate)’으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오늘은 성경에 언급된 제비뽑기의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우리 성경에서 “제비” 혹은 “제비뽑기”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단어는 고랄(גּוֹרָל)입니다. 성경(구약)에서 총 77회 언급되지만,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우리말의 “뽑기”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의 방식은 여러 개체에 무언가를 표시하고 그 중 하나를 뽑아 당첨자를 정하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성경의 제비는 이와는 다르게, 무언가를 던져서 그것이 어디로 떨어지는지를 살피는 방식입니다. 고랄은 던지는 것이며(수 18:8), 누구에게로 떨어지거나(욘 1:7; 대하 26:14), 어디 위로 올라가는 것으로 표현됩니다(레 16:9). 따라서 아마도 작은 돌 모양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사전(HALOT)은 어근 가랄(גרל)의 어원을 ‘(작은) 돌’과 연결시키지만, 사실 이 정의는 그렇게 명확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고랄’이 돌일 것이라는 추정에 바탕을 둔 추측일 뿐입니다.
던진다는 점에서는 영어의 ‘casting lots’라는 표현과 유사합니다. 지푸라기나 나무조각 등을 던져서 그것이 어디로 떨어지는지, 혹은 어떤 모양새로 펼쳐지는지에 따라 점괘를 읽는 방식입니다. 이 서양의 방식은 쌀이나 엽전을 던져 그 모양새로 점을 치는 우리의 전통 풍습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고대 이스라엘의 고랄은 여러 사물을 던져서 나온 모양에 따라 점을 판별하는 방식은 아닌 것으로 추정됩니다. 성경에 기록된 ‘제비뽑기’는 특정한 한 사람을 결정하거나, 아니면 ‘yes or no’, ‘go or stop’ 등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돌을 던져 하나를 선택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고랄은 우림(אוּרִים)과 둠밈(תֻּמִּים)이라는 것을 던지는 방식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여기서 ‘추정’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마소라 본문은 고랄과 우림/둠밈 사이의 관계에 대해 명시적으로 설명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림과 둠밈이 나오는 구절에 고랄이 함께 언급되는 경우는 성경에 없습니다. 또한, 우림과 둠밈은 제사장이 소지하고 다니는 것인데, 고랄은 제사장이 주변에 없는 문맥에서도 나타납니다. 따라서, 고랄과 우림/둠밈 사이의 연결고리는 생각만큼 그리 튼튼하지 않습니다.
우림과 둠밈은 (대)제사장의 에봇(여러 실로 꼬아 만든 앞치마)에 붙인 흉패 안에 넣어 가지고 다니는 물건입니다(출 28:30). 우림과 둠밈은 (대)제사장만이 가지고 다닐 수 있었습니다(신 33:8; 스 2:65; 느 7:65). (대)제사장은 이 우림과 둠밈으로 하나님의 결정 사항을 알게 됩니다.
그(여호수아)는 제사장 엘르아살 앞에 설 것이요 엘르아살은 그를 위하여 우림의 판결로써 여호와 앞에 물을 것이며 그와 온 이스라엘 자손 곧 온 회중은 엘르아살의 말을 따라 나가며 들어올 것이니라(민 27:21)
이 구절의 특징적인 것은, 첫째, 모세를 이어 민족의 지도자가 될 여호수아는, 모세처럼 하나님께 직접 뜻을 묻지 않고, 제사장의 “우림의 판결”을 거쳐 결정해야 한다는 점, 그리고 둘째, “우림의 판결”이 다루는 것은 ‘나감’과 ‘들어옴’이라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판결이라는 점입니다.
이쯤 되면, 우림과 둠밈 중 무엇이 긍정(yes)에 해당되고 무엇이 부정(no)에 해당되는지 궁금해집니다. 어원을 고려하면, 우림이 부정, 둠밈이 긍정이라 여겨집니다. 우림(אוּרִים)은 이전에는 ‘빛’이라는 뜻의 오르(אוֹר)와 어원적으로 연결된 것으로 여겨졌으나, 이제는 ‘저주하다’라는 의미의 아라르(ארר)에서 파생된 단어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둠밈(תֻּמִּים)의 어근 타맘(תמם)은 ‘온전함, 완결’을 의미하기 때문에 긍정적인 의미를 지닌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이러한 추정이 확실하다는 걸 입증하는 성경 본문은 없습니다.
삼상 14:41의 개역개정과 새번역을 비교해 보는 것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개역개정은 마소라본문(MT)에 충실히 번역했고, 새번역은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칠십인역(LXX)과 불가타의 구절을 첨가하여 번역하였습니다.
삼상 14:41
[개역개정] 이에 사울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아뢰되 원하건대 실상을 보이소서 하였더니 요나단과 사울이 뽑히고 백성은 면한지라
[새번역] 사울이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아뢰었다. "오늘 저에게 응답하지 않으시니, 웬일이십니까?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 그 허물이 저에게나 저의 자식 요나단에게 있다면 우림이 나오게 하시고, 그 허물이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있다면 둠밈이 나오게 하십시오." 그러자 요나단과 사울이 걸리고, 백성들의 혐의는 벗겨졌다.
마소라 본문(MT)을 바탕으로 한 개역개정에 따르면, 잘못과 책임이 요나단과 사울 쪽에 있다는 사실을 어떤 방식으로 알게 되었는지는 전혀 설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반면에 칠십인역을 따르는 새번역을 보면, 우림과 둠밈이 어느 것은 ‘긍정’, 어느 것은 ‘부정’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사울은 왕실에 책임이 있다면 우림이, 백성들에게 책임이 있다면 둠밈이 ‘나오게’ 해달라고 말합니다. 아마도 제사장의 흉패 안에서 둘 중 하나가 튀어나오는 방식일 것입니다. 따라서, ‘우림’은 부정적인 것이고 ‘둠밈’은 긍정적인 것이라는 이해도 성경 본문에 근거하지 않은 선입견일 뿐입니다.
성경 시대의 제비 뽑기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었는지, 우림과 둠밈이 어떤 재질과 어떤 모양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그리고 둘 중 무엇이 긍정이고 무엇이 부정인지 등은 사실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고랄과 움밈과 둠밈에 대해 그리 많은 정보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정말 중요한 문제였다면 성경은 거기에 대해 아주 자세히 기록했을 것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이 ‘고랄’이 성경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어떤 우연이나 무작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는 점을 아는 것입니다. 사울과 요나단과 백성들 사이의 책임 여부를 가르는 삼상 14:36-46의 구절에서나, 아이 성 전투의 패배의 책임이 아간에게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과정(수 7:16-18), 다시스로 가는 배가 침몰할 위기에 처한 원인이 요나에게 있음을 알아낸 경우(욘 1:7)에서 보듯이 이 고랄은 진실을 정확히 드러냅니다. 아무나 걸려라가 아닙니다. 한치의 오차도 없습니다. 꿈이나 대언자(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것처럼 우림(과 둠밈) 역시도 하나님의 뜻을 아는 통로 중 하나로 이해됩니다(삼상 28:6,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하지 아니하시므로”).
제비뽑기에 대한 이러한 ‘성경적’ 이해, 혹은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성경이 번역된 경우들이 있습니다. 제비뽑기는 ‘무작위’ 혹은 ‘우연’이라는 현대인의 사고방식이 개입된 번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첫번째는 민 26:56입니다. 히브리어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עַל־פִּי הַגֹּורָל תֵּחָלֵק נַחֲלָתֹו בֵּין רַב לִמְעָט
이것을 직역하면, ‘상속될 땅은 고랄의 결정(입)에 따라 큰 것과 작은 것으로 분배되어야 한다’입니다.
이 문장을 개역개정과 새번역은 다음과 같이 번역합니다.
개역개정: “그 다소를 막론하고 그들의 기업을 제비 뽑아 나눌지니라”
새번역: “각 유산은 제비를 뽑아 나누어야 한다. 사람 수가 많은 지파들은 큰 땅을, 사람 수가 적은 지파들은 적은 땅을 놓고 추첨하여야 한다.”
이제 곧 들어가 점령하게 될 가나안 땅을 열 두 지파 별로 분배하는 장면입니다. 각 지파에 따라 크고 작음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사람 수가 많은 지파가 큰 땅을 차지하고, 수가 적은 지파가 작은 땅을 차지하는 게 순리에 맞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민 26:54). 그런데 성경은 이 분배의 결정을 고랄에 맡깁니다. 무작위 추첨이라는 현대적 사고에 익숙한 번역자들은 지파의 크기에 따라 땅이 분배된다는 것과 그 결정이 ‘제비뽑기’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사실 사이에 불일치, 혹은 모순이 있다고 생각한 듯 합니다.
제비뽑기의 방식으로는 많은 지파에게 큰 땅이, 적은 지파에게는 작은 땅이 배분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개역개정은 “다소를 막론하고”로 번역했습니다. 새번역은 일종의 절충안을 제시하는데, 인구수가 많은 지파들이 큰 땅을 놓고 추첨을 하고, 적은 수의 지파들이 작은 땅을 놓고 추첨하는 식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두 해석 모두 성경의 고랄을 통한 땅의 분배가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반영하여 인구 수에 따라 아주 적절하게 땅 분배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성경 시대의 사고방식을 반영하지 못한 번역입니다(“수가 많은 자에게는 기업을 많이 줄 것이요 수가 적은 자에게는 기업을 적게 줄 것이니(민 26:54)”). 민 26:56은 원문 그대로 ‘(각 지파가) 상속할 땅은 제비(고랄)의 결정에 따라 큰 것(큰 지파에게는 큰 땅)과 작은 것(작은 지파에게는 작은 땅)으로 분배될 것이다’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적절합니다.
문제가 되는 두번째 구절은 잠 16:33입니다.
בַּחֵיק יוּטַל אֶת־הַגֹּורָל וּמֵיְהוָה כָּל־מִשְׁפָּטֹו
히브리어 원문을 직역하면, ‘고랄은 가슴(품)으로 던져진다, 그리고 그것(고랄)의 모든 결정은 주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다’입니다.
개역개정: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새번역: 제비는 사람이 뽑지만, 결정은 주님께서 하신다.
개역개정과 새번역 모두 ‘고랄은 가슴(품)으로 떨어진다’라는 수동태 문장을 ‘제비는 사람이 뽑는다’의 능동태 문장으로 의역합니다. 그리고 둘 다 상반절과 하반절 사이가 반어적 평행법으로 되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뽑으나,” “뽑지만”). 즉, 제비를 뽑는 것과 하나님이 결정하시는 것을 서로 반대되는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번역은 ‘현대화’와 '현지화'를 거친 번역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선, 성경의 고랄은 사람이 능동적으로 뽑는 것이 아닙니다. 수동적으로 누군가의 가슴팍(품) 안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누구의 품으로 떨어질지는 무작위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반영하여 결정됩니다. 따라서, 잠 16:33의 상반절과 하반절은 반어적 평행법이 아니라 동의적 평행법으로 보아야 합니다: “제비(고랄)가 누군가의 품 안으로 던져지ֶ듯이, 모든 결정은 주님께서 하시는 것이다’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적절합니다. 참고로, 잠 16장의 거의 모든 구절이 동의적 평행법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제비뽑기로 의사결정을 하는 시카고 교회의 담임목사님께서는 난감한 표정을 짓는 저의 반응을 충분히 예상하며 다음의 대답을 주셨습니다.
“제비뽑기로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 현대인의 감각에는 잘 맞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다수결로 결정되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결정이거나 옳은 결정인 것도 아닙니다. 토의와 합의를 거친 결정이 이론적으로는 이상적이지만, 공동체 안에서 목소리가 큰 사람들의 생각이 지배적으로 반영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자기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 않으시는 성도님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오랜 공부와 고민 끝에 제비뽑기라는 방식을 실험적으로 사용해 보기로 했습니다.
만약 A, B, C라는 세 가지 안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경우라면, 교인들 모두 동일하게 한 표씩을 행사할 수 있고 각자의 판단대로 A, B, C 중 하나에 투표할 수 있습니다. 만약 A안이 60퍼센트의 지지를 받고, B안이 30퍼센트, C안이 10퍼센트라고 한다면, 투표한 것 중에서 제비뽑기로 하나를 뽑으면 A안이 선택될 확률이 가장 높습니다. 그렇지만 B안이나 C안이 선택될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런 방식으로 다수의 의견이 선택될 확률을 높이지만, 동시에 소수의 의견이라도 무시되지 않을 수 있는 장치를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만약 소수의 의견이 선택된다면, 교인분들에게 이해와 동의를 요청합니다. 선택된 안에 대해 많은 분들이 불만이 있을 수 있지만, 제비뽑기로 정해진 안을 1년이나 2년 정도의 한정된 기간 동안 한번 따라보자구요. 지금 많은 분들의 생각으로 좋지 않은 결정이라고 여겨지는 안을 따르는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것을 가르치실 지 배우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