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점일획


"사도"에 대한 묵상

우진성
2024-05-17
조회수 2132

I. 

사도라는 뜻을 지닌 ἀπόστολος(아포스톨로스)는 "어떤 목적을 위하여 파송하다"는 뜻의 동사 ἀποστέλλω(아포스텔라)의 명사형이다. 아포스텔라는 "~로부터"를 뜻하는 전치사 아포ἀπο와 "멀리 두다, 피하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스텔로στέλλω의 합성어이다. 명사형 아포스톨로스의 기본 뜻은 "파송된 사람" 혹은 "멀리 보내진 사람"이다.  


II. 

성경 밖 고대 문화 속에서 아포스톨로스는 주로 “배”와 관련되 사용되었다. 특별히 어떤 임무를 맡고 파견된 함선들이나 혹은 그 배를 통솔하는 지휘관에 사용되던 단어였다. <에게해의 시대>(시공사)에는 에게해를 중심으로 벌어진 세력 간의 충돌이 그림과 함께 흥미진진하게 서술되어 있다. 페르시아와 그리스 사이에, 그리스 안에서는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하는 동맹들 간에, 그리고 그리스와 로마 사이에 일어난 충돌, 수많은 전투들. 해전을 위해 수없이 파견된 함대, 그 함대를 지휘하는 지휘관을 부르는 명칭이 아포스톨로스였다. 전투들의 승패를 대개 육지의 전투가 아니라 해전이 갈랐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아포스톨로스가 고대 그리스어 사용자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단어로 여겨졌을지 상상할 수 있다. 


III.

후에, "파송된 함선"이라는 의미가 개인에게 적용되어 ”어떤 사명을 받아 파송된 사람“이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영어의 대사ambassador, 대의원delegate, 사절messenger과 같은 단어의 의미상 기원은 그리스어 아포스톨로스에 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와 같은 의미로 사용된 용례는 신약성경에서도 적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교회의 특별한 소수에게 붙는 권위있는 직분 명으로 아포스톨로스가 사용되기 전에, 단순히 "보냄받은 자"의 의미로 사용된 용례들이다. 


요한복음 13:16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이 주인보다 높지 않으며, 보냄을 받은 사람이 보낸 사람보다 높지 않다.(보냄을 받은 사람)

빌립보서 2:25 그러나 나는, 내 형제요 동역자요 전우요 여러분의 사신이요 내가 쓸 것을 공급한 일꾼인 에바브로디도를 여러분에게 보내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사신)

고린도후서 8:23 디도로 말하면, 그는 내 동료요, 여러분을 위한 내 동역자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이 간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 그들은 여러 교회의 심부름꾼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입니다.(심부름꾼)


IV. 

같은 맥락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자"라는 개념으로 아포스톨로스가 사용되었다. 그 대상은 예언자, 예수님의 제자들, 그리고 예수님이다. 


예언자

누가복음 11:49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도 말하기를 ‘내가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내겠는데, 그들은 그 가운데서 더러는 죽이고, 더러는 박해할 것이다’ 하였다.(이 구절의 "예언자와 사도들"은 "예언자 곧 나의 심부름꾼/메신저"라고 번역하는 것이 낫다.)


제자들

마가복음 3:14예수께서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또한 사도라고 이름하셨다.]

마가복음 6:30사도들이 예수께로 몰려와서,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일을 다 그에게 보고하였다.

마태복음 10:2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첫째로 베드로라고 부르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도마와 세리 마태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와 열혈당원 시몬과 예수를 넘겨준 가룟 사람 유다이다.

누가복음 22:14 시간이 되어서, 예수께서 자리에 앉으시니, 사도들도 그와 함께 앉았다.

누가복음 24:11그러나 사도들에게는 이 말이 어처구니없는 말로 들렸으므로, 그들은 여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예수님 

히브리서 3:1 그러므로 하늘의 부르심을 함께 받은 거룩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의 사도요,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십시오.


예수님의 공생애 시기에 벌써 제자들을 사도라고 부른 것처럼 복음서가 묘사하고 있는 것은, '사건의 시간'을 반영한 것이라기 보다는 '저술의 시간'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께서 활동하던 당시에 제자들을 이미 사도라고 불렀다고 보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복음서 집필의 시간은 교회에 사도라는 직분이 세워진 이후인데, 그런 교회의 현실을 반영하여 복음서에 "사도"라는 용어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히브리서에서 예수님에게 적용된 아포스톨로스를 단순히 "사도"라고 번역한 것은, 마치 예수님이 사도의 일원으로 여겨질 근거가 되기 때문에 적절하지 않은 번역이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 더 나은 번역이다. 


V. 

아포스톨로스에 전혀 새로운 의미, 교권적 의미가 더해진 것은 당연히 교회가 세워진 다음이다. 교회가 존재하지 않던 시절에는 찾아볼 수 없고, 아포스톨로스의 원래 의미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의미가, 교회의 시대에 이 단어에 주어졌다. 그것은 아포스톨로스가 이제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을 위한 호칭이 된 것이다. 교회가 세워진 이후 아포스톨로스는 "보냄받은 자"라는 원래 의미보다는 "적절한 권위를 지닌 교회의 지도자"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사도행전 1:6a 사도들이 한 자리에 모였을 때에 . . . 13b 이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안드레와 빌립과 도마와 바돌로매와 마태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열심당원 시몬과 야고보의 아들 유다였다.

사도행전 2:42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몰두하며, 서로 사귀는 일과 빵을 떼는 일과 기도에 힘썼다.

사도행전 6:6사도들 앞에 세웠다. 사도들은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였다.

고린도전서 15:7 다음에 야고보에게 나타나시고, 그 다음에 모든 사도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베드로후서 3:2그렇게 해서, 거룩한 예언자들이 이미 예언한 말씀과, 주님이신 구주께서 여러분의 사도들을 시켜서 주신 계명을, 여러분의 기억 속에 되살리려는 것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라는 의미로 사용된 아포스톨로스를 보여주는 구절은 인용할 수 없을만큼 많다. 위의 몇 구절 만으로도 아포스톨로스가 초대교회에서 지도자의 역할을 감당하였으며 특별히 가르치는 역할을 감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V. 

문제는 사도의 자격이었다. 처음 사도의 자격은 지도자로서의 자질이나 교사로서의 능력 이전에 예수님의 부활과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도행전에서 가룟 유다를 대신하여 사도의 자리를 채울 사람을 뽑을 때 이와 같은 의논이 진행된다. 


사도행전 1:22 곧 요한 이 세례를 주던 때로부터 예수 께서 우리를 떠나 하늘로 올라가신 날까지 늘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가운데서 한 사람을 뽑아서, 우리와 더불어 부활의 증인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의 공생애를 함께 한 제자가 열둘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름없는 제자들이 있었다는 점을 전제로 한다. 그 중 한 사람을 뽑아, "우리와 더불어 부활의 증인"이 되게 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부활의 증인"이 곧 "사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사도들의 가르침의 중요 내용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연결이다. 

사도행전이 말하는 사도의 자격은 예수와 함께 한 제자였고, 부활의 증인이 될 사람이다. 이 두 가지 조건 중, 전자보다는 후자가 강조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예수의 공생애를 경험하지 못한 바울과 심지어 바나바도 사도행전은 사도로 부르기 때문이다.(사도행전 14:14) 


VII.

사도행전이 묘사하고 있는 사도의 자격은 "부활의 증인"이다. 


사도행전 1:22 μάρτυρα τῆς ἀναστάσεως αὐτοῦ(마르튀라 테스 아나스타세오스 아우투)


이 문구를 직역하면 "예수의 부활의 증인"이지만 따지고 들어가면, 서로 다른 두 가지 의미를 모두 담을 수 있는 표현이다. 하나는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는(가르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것이다. 이 두 가지 의미 중 후자를 적용하면 사도의 자격에 대한 훨씬 엄격한 조건이 되는데, 바울 사도의 경쟁자/적대자들은 바울에게 후자의 조건을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에 대해 바울 사도는 자신의 사도성을 방어했는데, 이런 구절에서 읽을 수 있다. 


고린도전서 15:(3절부터) 7-9 다음에 야고보에게 나타나시고, 그 다음에 모든 사도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맨 나중에 달이 차지 못하여 난 자와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나는 사도들 가운데서 가장 작은 사도입니다. 나는 사도라고 불릴 만한 자격도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했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도 부활하신 예수와 만난 사람이라는 점을 강변한다. 다음 구절들 역시 바울 사도가 자신의 사도성을 옹호하며 한 말로 볼 수 있다. 


갈라디아서 1:11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밝혀드립니다.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12그 복음은,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 받은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9:1 내가 자유인이 아닙니까? 내가 사도가 아닙니까? 내가 우리 주 예수를 뵙지 못하였습니까? 여러분은 주님 안에서 내가 일해서 얻은 열매가 아닙니까? 2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 몰라도, 여러분에게는 사도입니다. 여러분은 주님 안에서 나의 사도직을 보증하는 표입니다.

고린도후서 11:5 나는 저 거물급 사도들보다 조금도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바울 사도에게, 부활하신 예수를 어떤 방식으로 만났는지, 그의 공생애에 얼마나 함께 하였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불렀다는 소명과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얼마나 분명하게 알고 해석하고 가르칠 수 있는가였다. 

사실 예수와 공생애를 줄곧 같이 하였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육으로 만난 열한 제자 사도들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적절하고 풍성하게 이해했었는지 오히려 의심스럽다. 사도라는 이름으로 부활하신 예수님과 승천 직전 만났을 때 그들이 예수님께 던진 질문이, 여전히 유대 메시아 사상에 사로잡혀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한 그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사도행전 1:6 사도들이 한 자리에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었다. “주님,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나라를 되찾아 주실 때가 바로 지금입니까?”


이들이 부활하신 예수님께 던진 이 질문은, 그들이 예수님의 공생애 시절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지금도 여전히 예수님을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바울 사도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사도"라고 자신을 낮추었지만, 자신이 사도로 부름 받았다는 분명한 소명을 가지고 있었다. 바울 사도는 대부분의 서신의 첫 머리에서 자신을 하나님이 부르신 예수의 사도로 소개한다. 


갈라디아서 1:1 사람들이 시켜서 사도가 된 것도 아니요, 사람이 맡겨서 사도가 된 것도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리고 그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임명하심으로써 사도가 된 나 바울이,

고린도전서 1:1 하나님의 뜻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나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가, 2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에 이 편지를 씁니다.


이런 식의 소명에 찬 자기 소개는 비단 바울 사도의 사도성에 대한 도전이 제기된 교회에 보낸 서신에서만 사용된 것이 아니다. 로마서 에베소서 골로새서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첫 머리는 모두 자신을 사도라고 소개하는 인삿말로 시작한다. 


VII. 

누가 사도인가? 이 질문에 대해 초대교회의 일부는 예수님과 공생애를 같이 한 사람이라고 답하거나,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이라 대답하였다. apostolic succession(사도적 계승)을 주장하는 카톨릭의 대답은 초대 교황으로부터 안수를 통하여 전승된 권위를 받은 사람들(사제)이라고 대답할 것이고, 개신교 목사 중에는 목사야 말로 사도라고 대답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신사도운동을 하는 신비한 권능을 드러내는 사람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모두 외적 조건이다. 

바울 사도로부터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찾는다면 외적인 것보다는 내적인 조건을 사도의 조건으로 생각할 수 있다. 1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2세상 곳곳으로 보냄을 받아, 3예수의 증인으로 살며, 4성령의 능력을 드러내는 사람. 그런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시대의 사도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