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잠든 사람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고전 15:20) 전한다. 예수님께서 홀로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부활의 시작이 되셨다는 말씀이다. 성경은 이어서 “부활의 첫 열매”를 해석하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왔으니, 또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의 부활도 온다"고 하였다. 죽음 권세 이기신 예수님의 부활은, 부활을 갈망하는, 부활해야만 하는 모든 이들에게 소망이 되었다는 말씀이다.
그런 소망의 이야기가 마가복음에 이야기 된다. 이 이야기는 짧고 신비하여 그 뜻을 분명하게 아는 것이 어려웠고, 그 동안 설교자들 사이에서 충분한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더구나 한글 성경의 번역 문제는 이야기의 해석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바로 마가복음 14장 51-52절에 나오는 "맨 몸에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랐던 젊은이" 이야기이다.
본문은 이렇다.
그런데 어떤 젊은이가 맨몸에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고 있었다. 그들이 그를 잡으려고 하니, 그는 홑이불을 버리고, 맨몸으로 달아났다.
본문을 좀 더 세부적으로 살펴 보자.
“어떤” τις(티스):
누구인지 "특정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예수님을 따라 가고 있었으니 예수님의 제자이기는 하지만, 그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라는 말이다. 상반되는 마가복음의 인물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같은 이름있는 제자들이다. "어떤"이라는 이 작은 표시 하나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마가복음에서 이름있는 제자들은 대체로 부정적으로 묘사되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끝까지 잘못 이해하였고, 결국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간 인물로 묘사된다. 그런데 이 이름 없는 "어떤" 제자는 그런 제자들과 대조되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제자들이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난 다음(50절), 여전히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 본문을 해석하려는 주석가들의 관심은 온통 이 제자의 정체를 밝히려는 데 가 있었다. 그러나 마가가 의도적으로 그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어떤"이라는 부정대명사를 쓴 것이 이 점을 존중하는 것이 좋겠다.
“따라가고 있었다”συνηκολούθει αὐτῷ(쉬네콜루떼이):
보통 “따라가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로 ἀκολουθέω(아콜루떼오)를 쓴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앞에 “쉰”συν이라는 전치사가 붙은 συνακολουθέω가 사용되었다. 쉰은 "함께"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접두어다. 위치상으로는 예수님 뒤에서 따라 가고 있지만, 홀로 남아 잡혀 가시는 예수님과 “함께” 하고 있는 제자가 있었다는 점을 부각하는 언어 선택이다. 무장한 공권력에 의해 끌려가는 심정, 그것도 함께 해 온 제자들 모두가 자신을 버리고 달아나버린 상황에서 홀로 끌려가는 심정을 "외롭다"는 언어로는 다 표현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성경은 그런 순간 예수님을 떠나지 않고 그를 끝까지 따랐던 이름없는 제자에 대해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홑이불을 버리고 맨몸으로”:
이 제자에 대해 주목하지 않았던 이유는 성경에 그려진 그의 몰골이 생경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한글 성경이 묘사하고 있는 대로라면, 맨몸에 홑이불을 걸치고 있다. 무슨 꼴인가? 그런데 여기서 “홑이불”로 번역된 신돈σινδών은 홑이불이 아니다. 어떤 경로로 신돈이 홑이불로 번역되었는지 추측하기조차 어렵다. 옷의 종류를 말할 때, 옷의 모양과 용도에 따라 말할 수 있겠지만, 옷의 소재에 따라 말할 수도 있다. 신돈은 옷의 소재에 따라 옷의 종류를 표현하고 있는 헬라어 단어이다. 신돈은 식물성 마 소재로 지은 옷이라는 뜻이다. 마에는 대마 저마 아마가 있는데 대마에서 나온 옷감은 삼베요, 저마에서 나온 옷감은 모시요, 아마에서 나온 옷감은 린넨이라고 한다. 신돈은 아마로 지은 린넨이다. 그래서 영어 성경은 a linen cloth라고 번역하였다. 홑이불에 가까운 번역은 찾아 볼 수 없다. 린넨은 한글로 아마포로 번역되기도 하고 성경에서는 세마포로 자주 번역되기도 하는데, 가장 부드러운 옷감이다. 유목 문화에서는 동물의 털로 만든 옷감보다 식물성 옷감이 훨씬 고급 옷감이었다.
신돈을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는 세마포나 모시 삼베라고 번역했다. 왜 여기서만 흩이불(새번역. 개정개역은 “베 홑이불”로 번역)이라고 번역했는지 알 수가 없다. 더구나 신돈이 여기만 등장하는 희귀한 단어가 아닌데도 말이다. 성경에서 신돈은 자주 상징을 담고 있는 옷감으로 묘사 된다. 예를 몇 개 들어보자.
- 레위기 16:4에는 제사장의 복식을 이야기 하고 있는데, 제사장은 모시 옷을 입어야 한다. 그 본문 헬라어에서 신돈 대신 린넨을 사용하고 있지만, 같은 재질을 말하고 있다.
- 다니엘서 12장은 다니엘서 마지막 장으로 세상 끝 날에 대한 다니엘의 환상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 환상 속에 천사가 등장하는데, 그 천사는 "모시 옷"(새번역), "세마포"(개역개정)를 입고 있었다고 합니다. 쉰돈은 천사가 입는 옷으로 묘사된 것이다.
- 막 15:46에서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신돈으로 예수의 시신을 쌌다. 여기서 신돈은 세마포(개역개정), 삼베(새번역)로 번역되었다. 신돈은 예수님의 시신을 감싼 천이었다.
- 도마행전에서 세례를 받는 사람은 자신이 입고 있던 옷(히마티온. 양털로 만든 울 소재)을 벗고 세례를 받았고, 세례를 받은 후에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 상징으로 신돈을 받는다.
이렇게 상징성 있게 사용된 신돈을 “홑이불”이라고 번역함으로, 이 젊은이에게 광인 인상을 색칠한 한글 번역자를 이해하기 어렵다. 이 젊은이가 입은 것은 “홑이불”이 아니라 신돈으로 만든 겉옷이었다.
“벗은 몸으로 도망하다”:
이 표현을 문자 그대로 “도망”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에서 “옷을 벗음”은 죽음을 상징하는 표현으로도 사용되었다. 다음 몇 가지를 고려할 때 이 젊은이의 “옷 벗음”을 문자적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죽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 갈라디아서 3:27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세례 받는 것은 “그리스도를 옷 입는 것”이라고 한다. 세례를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롬 6:3이하)으로 이해할 때 “그리스도를 옷 입는 것”은 “그리스도를 입은 새 생명으로 살아나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옷 입기 위해서는 ”자신의 옷을 벗어야”하는 것이다. 먼저 “옷을 벗어야” 그리스도를 옷 입을 수 있는데, 이 때 “자신의 옷을 벗는 것”은 새 생명을 얻기 전에 일어나야만 하는 죽음을 상징한다.
- 도망하다에 쓰인 헬라어는 φεύγω퓨고이다. 말 그대로 "도망가다"가 첫 번째 뜻이다. 50절에 모든 제자들이 달아났다고 할 때도 이 동사가 사용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나온 퓨고의 두 번째 뜻은 “사라지다” “자취를 감추다” 즉, “죽었다“를 의미한다.
-이 젊은이가 속옷을 입지 않았다는 점을 명시한 점 역시 “옷 벗음=죽음”이라는 상징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장치로 보인다. 자신이 걸쳤던 겉옷을 벗음으로 바로 “naked”가 된 것인데, “옷 벗음=죽음”이라는 상징성을 시각적으로 강조하기 위하여 사용한 문학적 장치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젊은 제자는 예수님이 잡혀가는 길을 끝까지 따라가다가 예수님을 잡으러 온 무리에 의해 살해 당한 것이다.
그런데 이 죽은 젊은 제자가 다시 나타난다. 직접 말하지는 않지만, 힌트는 있다. 누구이며 어디에 나타났는가?
예수님의 빈 무덤이다. 마태는 그 무덤에, "흰 옷 입은 한 천사"가 있었다고 말한다. 누가는 "눈부신 옷을 입은 두 남자"가 있었다고 전한다. 마가는 "어떤 흰 옷 입은 젊은 남자"가 있었다고 전한다. 공통점은 “흰 옷” 혹은 “눈분신 옷”을 입은 존재라는 점이다. 그가 남자로 묘사되었다 하더라도, “흰 옷=눈부신 옷”은 그 존재가 영적인 존재라는 점을 알려주는 도상법이다. 마태만이 그 존재를 “천사”라고 명시하지만, 사실 누가의 남자나 마가의 남자 모두 이미 죽고 영원한 생명을 얻은 천사들이다.
마가는 예수님의 빈 무덤을 지킨 젊은 남자가 14장에서 살해 당한 바로 그 젊은이를 뜻한다는 힌트를 남긴다.
첫째는 젊은이에 사용된 νεανίσκος라는 단어이다. 보통 젊은이에는 보통은 νεός(네오스)라는 단어가 사용되는데, 마가복음에서는 14장과 16장에서만 네오스 대신 네아니스코스를 사용하여 14장의 세마포 입은 젊은이와 16장 무덤 속 “흰 옷” 입은 젊은이를 연결시킨다. 새번역 성경은 같은 네아니스코스를 14장에서는 “젊은이”라고 번역한 반면, 16장에서는 “젊은 남자”라고 번역하여 마가가 남긴 연결점을 희석하는 번역이라 안타깝다.
둘째는 “어떤”이라는 부정대명사가 사용된 것 역시 공통적이다.
셋째는 “옷을 입다”는 표현에 사용된 헬라어가 14:51과 16:5에서 같다. 보통 “옷을 입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로 ἐνδύω(엔듀오)를 사용한다. 그런데 위의 두 구절에서는 공통적으로 독특하게 περιβάλλω(페리발로)를 사용하였다. 이런 세 가지 힌트는 독자의 상상력 속에서 14:51의 젊은이를 16:5의 젊은이와 연결시키기에 충분하다.
옷의 상징성에 주목해 보자. 세마포를 입었다는 말은 예수의 참 제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큰 이름 제자들과 달리 예수의 참 제자가 된 이 젊은이는 잡혀가던 예수를 끝까지 따라가다가 살해 당하였다. 그가 살해 당한 후 흰 옷 입은 존재가 되었다는 말은 그가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는 뜻이다.
마가의 이런 문학적 장치를 통하여 의도한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의 부활이 부각되는 것을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예수님만 부활한 것이 아니라 그를 끝까지 따랐던 이름 없는 제자도 부활하였다고 전하는 것이다. 비록 열 두 제자 같은 큰 이름 제자들은 도망하였지만, 예수의 곁에 끝까지 남아 살해 당했던 보잘 것 없는 제자를 하나님께서는 살리고 여인들에게 보이신 것이다. 그는 “부활의 첫 열매“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죽고 부활한(혹은, 해야하는) 제자들을 상징하는 인물로 제시되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잠든 사람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고전 15:20) 전한다. 예수님께서 홀로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부활의 시작이 되셨다는 말씀이다. 성경은 이어서 “부활의 첫 열매”를 해석하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왔으니, 또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의 부활도 온다"고 하였다. 죽음 권세 이기신 예수님의 부활은, 부활을 갈망하는, 부활해야만 하는 모든 이들에게 소망이 되었다는 말씀이다.
그런 소망의 이야기가 마가복음에 이야기 된다. 이 이야기는 짧고 신비하여 그 뜻을 분명하게 아는 것이 어려웠고, 그 동안 설교자들 사이에서 충분한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더구나 한글 성경의 번역 문제는 이야기의 해석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바로 마가복음 14장 51-52절에 나오는 "맨 몸에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랐던 젊은이" 이야기이다.
본문은 이렇다.
그런데 어떤 젊은이가 맨몸에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고 있었다. 그들이 그를 잡으려고 하니, 그는 홑이불을 버리고, 맨몸으로 달아났다.
본문을 좀 더 세부적으로 살펴 보자.
“어떤” τις(티스):
누구인지 "특정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예수님을 따라 가고 있었으니 예수님의 제자이기는 하지만, 그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라는 말이다. 상반되는 마가복음의 인물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같은 이름있는 제자들이다. "어떤"이라는 이 작은 표시 하나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마가복음에서 이름있는 제자들은 대체로 부정적으로 묘사되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끝까지 잘못 이해하였고, 결국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간 인물로 묘사된다. 그런데 이 이름 없는 "어떤" 제자는 그런 제자들과 대조되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제자들이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난 다음(50절), 여전히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 본문을 해석하려는 주석가들의 관심은 온통 이 제자의 정체를 밝히려는 데 가 있었다. 그러나 마가가 의도적으로 그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어떤"이라는 부정대명사를 쓴 것이 이 점을 존중하는 것이 좋겠다.
“따라가고 있었다”συνηκολούθει αὐτῷ(쉬네콜루떼이):
보통 “따라가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로 ἀκολουθέω(아콜루떼오)를 쓴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앞에 “쉰”συν이라는 전치사가 붙은 συνακολουθέω가 사용되었다. 쉰은 "함께"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접두어다. 위치상으로는 예수님 뒤에서 따라 가고 있지만, 홀로 남아 잡혀 가시는 예수님과 “함께” 하고 있는 제자가 있었다는 점을 부각하는 언어 선택이다. 무장한 공권력에 의해 끌려가는 심정, 그것도 함께 해 온 제자들 모두가 자신을 버리고 달아나버린 상황에서 홀로 끌려가는 심정을 "외롭다"는 언어로는 다 표현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성경은 그런 순간 예수님을 떠나지 않고 그를 끝까지 따랐던 이름없는 제자에 대해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홑이불을 버리고 맨몸으로”:
이 제자에 대해 주목하지 않았던 이유는 성경에 그려진 그의 몰골이 생경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한글 성경이 묘사하고 있는 대로라면, 맨몸에 홑이불을 걸치고 있다. 무슨 꼴인가? 그런데 여기서 “홑이불”로 번역된 신돈σινδών은 홑이불이 아니다. 어떤 경로로 신돈이 홑이불로 번역되었는지 추측하기조차 어렵다. 옷의 종류를 말할 때, 옷의 모양과 용도에 따라 말할 수 있겠지만, 옷의 소재에 따라 말할 수도 있다. 신돈은 옷의 소재에 따라 옷의 종류를 표현하고 있는 헬라어 단어이다. 신돈은 식물성 마 소재로 지은 옷이라는 뜻이다. 마에는 대마 저마 아마가 있는데 대마에서 나온 옷감은 삼베요, 저마에서 나온 옷감은 모시요, 아마에서 나온 옷감은 린넨이라고 한다. 신돈은 아마로 지은 린넨이다. 그래서 영어 성경은 a linen cloth라고 번역하였다. 홑이불에 가까운 번역은 찾아 볼 수 없다. 린넨은 한글로 아마포로 번역되기도 하고 성경에서는 세마포로 자주 번역되기도 하는데, 가장 부드러운 옷감이다. 유목 문화에서는 동물의 털로 만든 옷감보다 식물성 옷감이 훨씬 고급 옷감이었다.
신돈을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는 세마포나 모시 삼베라고 번역했다. 왜 여기서만 흩이불(새번역. 개정개역은 “베 홑이불”로 번역)이라고 번역했는지 알 수가 없다. 더구나 신돈이 여기만 등장하는 희귀한 단어가 아닌데도 말이다. 성경에서 신돈은 자주 상징을 담고 있는 옷감으로 묘사 된다. 예를 몇 개 들어보자.
- 레위기 16:4에는 제사장의 복식을 이야기 하고 있는데, 제사장은 모시 옷을 입어야 한다. 그 본문 헬라어에서 신돈 대신 린넨을 사용하고 있지만, 같은 재질을 말하고 있다.
- 다니엘서 12장은 다니엘서 마지막 장으로 세상 끝 날에 대한 다니엘의 환상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 환상 속에 천사가 등장하는데, 그 천사는 "모시 옷"(새번역), "세마포"(개역개정)를 입고 있었다고 합니다. 쉰돈은 천사가 입는 옷으로 묘사된 것이다.
- 막 15:46에서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신돈으로 예수의 시신을 쌌다. 여기서 신돈은 세마포(개역개정), 삼베(새번역)로 번역되었다. 신돈은 예수님의 시신을 감싼 천이었다.
- 도마행전에서 세례를 받는 사람은 자신이 입고 있던 옷(히마티온. 양털로 만든 울 소재)을 벗고 세례를 받았고, 세례를 받은 후에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 상징으로 신돈을 받는다.
이렇게 상징성 있게 사용된 신돈을 “홑이불”이라고 번역함으로, 이 젊은이에게 광인 인상을 색칠한 한글 번역자를 이해하기 어렵다. 이 젊은이가 입은 것은 “홑이불”이 아니라 신돈으로 만든 겉옷이었다.
“벗은 몸으로 도망하다”:
이 표현을 문자 그대로 “도망”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에서 “옷을 벗음”은 죽음을 상징하는 표현으로도 사용되었다. 다음 몇 가지를 고려할 때 이 젊은이의 “옷 벗음”을 문자적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죽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 갈라디아서 3:27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세례 받는 것은 “그리스도를 옷 입는 것”이라고 한다. 세례를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롬 6:3이하)으로 이해할 때 “그리스도를 옷 입는 것”은 “그리스도를 입은 새 생명으로 살아나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옷 입기 위해서는 ”자신의 옷을 벗어야”하는 것이다. 먼저 “옷을 벗어야” 그리스도를 옷 입을 수 있는데, 이 때 “자신의 옷을 벗는 것”은 새 생명을 얻기 전에 일어나야만 하는 죽음을 상징한다.
- 도망하다에 쓰인 헬라어는 φεύγω퓨고이다. 말 그대로 "도망가다"가 첫 번째 뜻이다. 50절에 모든 제자들이 달아났다고 할 때도 이 동사가 사용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나온 퓨고의 두 번째 뜻은 “사라지다” “자취를 감추다” 즉, “죽었다“를 의미한다.
-이 젊은이가 속옷을 입지 않았다는 점을 명시한 점 역시 “옷 벗음=죽음”이라는 상징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장치로 보인다. 자신이 걸쳤던 겉옷을 벗음으로 바로 “naked”가 된 것인데, “옷 벗음=죽음”이라는 상징성을 시각적으로 강조하기 위하여 사용한 문학적 장치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젊은 제자는 예수님이 잡혀가는 길을 끝까지 따라가다가 예수님을 잡으러 온 무리에 의해 살해 당한 것이다.
그런데 이 죽은 젊은 제자가 다시 나타난다. 직접 말하지는 않지만, 힌트는 있다. 누구이며 어디에 나타났는가?
예수님의 빈 무덤이다. 마태는 그 무덤에, "흰 옷 입은 한 천사"가 있었다고 말한다. 누가는 "눈부신 옷을 입은 두 남자"가 있었다고 전한다. 마가는 "어떤 흰 옷 입은 젊은 남자"가 있었다고 전한다. 공통점은 “흰 옷” 혹은 “눈분신 옷”을 입은 존재라는 점이다. 그가 남자로 묘사되었다 하더라도, “흰 옷=눈부신 옷”은 그 존재가 영적인 존재라는 점을 알려주는 도상법이다. 마태만이 그 존재를 “천사”라고 명시하지만, 사실 누가의 남자나 마가의 남자 모두 이미 죽고 영원한 생명을 얻은 천사들이다.
마가는 예수님의 빈 무덤을 지킨 젊은 남자가 14장에서 살해 당한 바로 그 젊은이를 뜻한다는 힌트를 남긴다.
첫째는 젊은이에 사용된 νεανίσκος라는 단어이다. 보통 젊은이에는 보통은 νεός(네오스)라는 단어가 사용되는데, 마가복음에서는 14장과 16장에서만 네오스 대신 네아니스코스를 사용하여 14장의 세마포 입은 젊은이와 16장 무덤 속 “흰 옷” 입은 젊은이를 연결시킨다. 새번역 성경은 같은 네아니스코스를 14장에서는 “젊은이”라고 번역한 반면, 16장에서는 “젊은 남자”라고 번역하여 마가가 남긴 연결점을 희석하는 번역이라 안타깝다.
둘째는 “어떤”이라는 부정대명사가 사용된 것 역시 공통적이다.
셋째는 “옷을 입다”는 표현에 사용된 헬라어가 14:51과 16:5에서 같다. 보통 “옷을 입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로 ἐνδύω(엔듀오)를 사용한다. 그런데 위의 두 구절에서는 공통적으로 독특하게 περιβάλλω(페리발로)를 사용하였다. 이런 세 가지 힌트는 독자의 상상력 속에서 14:51의 젊은이를 16:5의 젊은이와 연결시키기에 충분하다.
옷의 상징성에 주목해 보자. 세마포를 입었다는 말은 예수의 참 제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큰 이름 제자들과 달리 예수의 참 제자가 된 이 젊은이는 잡혀가던 예수를 끝까지 따라가다가 살해 당하였다. 그가 살해 당한 후 흰 옷 입은 존재가 되었다는 말은 그가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는 뜻이다.
마가의 이런 문학적 장치를 통하여 의도한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의 부활이 부각되는 것을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예수님만 부활한 것이 아니라 그를 끝까지 따랐던 이름 없는 제자도 부활하였다고 전하는 것이다. 비록 열 두 제자 같은 큰 이름 제자들은 도망하였지만, 예수의 곁에 끝까지 남아 살해 당했던 보잘 것 없는 제자를 하나님께서는 살리고 여인들에게 보이신 것이다. 그는 “부활의 첫 열매“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죽고 부활한(혹은, 해야하는) 제자들을 상징하는 인물로 제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