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점일획


"죄 용서"에 관한 묵상(우진성)

관리자
2025-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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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은 13장에서 그 서술 방향이 크게 바뀐다. 베드로 사도는 잠시 역사 무대에서 사라지고, 바나바와 바울 사도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13장의 몸통은 비시디아 지역의 안디옥에서 행한 바울 사도의 설교인데, 그 결론부에는 초대교회가 받아들이고 고백하고 선포한 믿음의 내용 중 가장 중요한 두 가지가 나온다. 하나는 예수의 부활(34절)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로 인한 "죄 용서"이다. 오늘은 "예수로 말미암은 죄 용서"를 묵상한다. 바울 사도의 설교 한 자락을 들어보자.  


예수로 말미암아 여러분에게 죄 용서가 선포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사도행전 13:38) 


이 진술의 매력은 "예수에 힘입은 죄 용서"라는 초대교회의 믿음을 가장 담백한 언어로 전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수로 말미암은 죄 용서와 관련된 진술들은 대개 구약의 동물 제사의 언어를 사용한 비유로 진술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아래의 요한일서 말씀처럼 말이다. 


. . .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주십니다.(요한1서 1:7)


오래된 그리스도인들은 아무 문제의식 없이 듣는 표현, "예수의 피가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하였다"는 위 구절 속 표현은, 그렇지 않은 이들이 들으면 이해할 수 없는 표현이다. 피가 어떻게 죄를 깨끗하게 하나? 이런 문장은 오직 예수 이전 구약의 동물제사 관습을 이해한 사람들에게만 와닿는 표현이다. 

예를 들어, 우리교회에 10년간 교회를 나오면서도 세례 받기를 원치 않던 분이 계셨다. 세례를 권하는 내게 그 분은 대답했다. "목사님 설교에서 서로 사랑하며 살라든가, 좋은 사람으로 변화 되라든지, 하는 말씀은 얼마든지 이해가 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2천년 전에 죽은 예수라는 사람의 피가 내 죄를 씻는다는 말은 도대체 이해 되지 않습니다. 이 말을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 보십시오. 납득이 되면 세례를 받겠습니다." 

문제의 출발은, 성경도 그렇고 그리스도인도 그렇고 예수를 통한 속죄를 말할 때 비유 언어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비유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한정적이다. 예수 당시에도 유대인들은 바로 이해할 수 있었겠지만, 헬라인들에게는 생소한 표현이었다.  현대인들은 말해 무엇하랴. 

그런 면에서 비유 언어 없이 이 진리를 진술한 사도행전 13장 38절의 바울 사도의 언어는 드물고 귀하다. 38절 해당 문장의 원어는 다음과 같다. 


διὰ τούτου(디아 투투) 

ὑμῖν(휘민) 

ἄφεσις ἁμαρτιῶν

(아페시스 하마르티온)

καταγγέλλεται(카탕겔렛타이)


첫째 줄. διὰ Ἰησοῦ(τούτου) 

투투는 예수를 가리키는 대명사이다. 대명사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첫 줄은 διὰ Ἰησοῦ(디아 예수)가 된다. 디아는 전치사인데, 흔히 영어로는 by, through, via로 해석되며, 이런 영어 전치사들이 그러하듯이 수 많은 용법으로 사용된다. 예를 들어, 디아는 어떤 일을 대행하는 agency를 뜻하기도 하는데(BDAG A-4), 만일 여기 사용된 디아가 그런 용법이라면, διὰ Ἰησοῦ(디아 예수), 즉 "예수를 통한 용서"의 뜻은 하나님이 하시는 용서의 일을 예수님이 "대행"한다는 뜻이 된다. 그 경우 "예수"와 "죄 용서"의 관계는, 예수는 하나님의 위임을 받아 죄 용서를 대행하는 주체가 된다. διὰ Ἰησοῦ의 뜻이 그것인가? 그렇지 않다. 

여기 사용된 디아는 "어떤 일이 일어나게 하는 동인"(efficient cause. BDAG A-3-d)를 표현하는 디아이다. 같은 용법을 칭의론 구절에서 찾을 수 있다. 신약에서 칭의론을 표현할 때 믿음 앞에 디아가 온 διὰ πίστεως(디아 피스테오스)라는 전치사구를 주로 사용한다. 한글 성경에서는 "믿음으로" "믿음을 통하여" 등으로 번역되었다. 로마서 3장 22절이나 갈라디아서 2장 16절 등이 대표적인 용례이다. διὰ πίστεως(디아 피스테오스)에서 디아 전치사가 표현하는 것은 "믿음"이 칭의를 일으키는 "동인"이라는 것이다. 믿음 때문에, 믿음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음 덕분에 칭의가 일어났다는 것을 디아 전치사가 표현한다. 사도행전 13장 38절의 διὰ Ἰησοῦ도 마찬가지다. 예수 때문에, 예수로 인하여, 예수로 말미암아, 예수 덕분에 죄 용서가 일어나게 되었다는 말이다. 예수와 죄 용서의 관계는 결론에서 다시 이어 가기로 하고, 다음 줄로 넘어가자. 


셋째 줄. ἄφεσις ἁμαρτιῶν

둘째 줄(우리에게)과 넷째 줄(선포되었다)은 해설이 필요하지 않다. 셋째 줄 아페시스 하마르티온에 집중해 보자. 하마르티온 곧 죄를 이해하려면 죄와 함께 쌍을 이루는 개념과 같이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사도행전 13장 다음 절에 나온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다 예수 안에서 의롭게 됩니다.(사도행전 13:39b)


"죄"는 "의"와 쌍을 이룬다. 무엇이 "의"고 무엇이 "죄"인가? 이를 설명하는 많은 방식이 있지만 기능적 접근을 하면, 어떤 기준이 있고을 때 그 기준을 충족시키면 "의", 기준에 못 미치면 "죄"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사는 언약 백성을 생각해 보자. 이스라엘에게 언약 백성이 되는 것이 제일 중요한 가치였는데, 언약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언약을 잘 지켜야 한다. 그 언약이 율법이다. 그러므로 율법이라는 기준을 충족시키면 "의"가 되고, 미달하면 "죄"가 된다. (링크 클릭) "죄"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기준을 무엇으로 삼느냐에 따라 변한다. 

용서를 묵상해보자. 죄 가운데 있다는 말은 어떤 기준에 미치지 못한 상태를 말하는데, 성경에서는 그런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가? 늘 새로운 기회를 주고 새로 도전하라고 촉구한다. 죄의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는 것을 용서라고 한다. 용서는 죄의 상태에 있는 사람을 회복하고 거듭 거듭 기회를 주는 사랑이다. 예수님께서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하신 뜻은 기준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 시도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독려하고 기회를 주라는 뜻이다. 이는 구약 예언서 전통과 통한다. 예언서의 비판은 용서를 전제로 한다. 

문제는 죄 용서의 방법이다. 죄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종교의 핵심이다. 종교는 결국 죄 용서를 통하여 흐트러지고 망가진 삶을 다시 회복하고 신적 질서 안에 재조직 할 수 있도록 돕는다. 문제는 방법인데, 너무 어려워도 안되고, 특정 그룹의 사람에게만 유리해도 안되다. 용서가 주는 기회는 공평해야 한다. 

1) 구약 시대: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려지는 동물 제사를 통하여 죄 용서가 이루어졌다. 이 방식은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어렵고 부자들에게는 쉬운 방식이어서, 어떤 사람들은 내려 놓은 수 없는 죄의 굴레에 묶여 죄인의 낙인을 지고 살아가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를 의인으로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예수 시대 종교지도자들은 후자의 편을 들며, 약자를 돕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였다. 

2)세례 요한: 세례 요한은 이런 타락을 바로 잡기 위해 보냄받은 마지막 예언자이다. 그가 제시한 용서의 방식은 요단강에서 회개의 세례를 받는 것이다. 한마디로 죄 용서를 위하여 제물을 들고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 제사장을 만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물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회개하고 물에 들어가 씻고 나아가 회개의 열매를 맺으면 된다는 선포이다. 이는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라는 제도를 통하여 죄 용서의 장벽을 높게 쌓아 올린데 대한 도전이었고, 반성전 신학으로 발전하였다. 반성전 신학은 "손으로 만든 집"에 과연 하나님이 거하시는가 물으며,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 성전이라는 신학을 낳았다. 

3)예수님: 서로 용납 서로 용서하면 된다는 것이 세례 요한과 구별되는 예수님의 방식이다. 예수님께서 죄인을 용납하는 교제를 보여주시고, 십자가 위에서 가장 큰 용서의 본을 몸소 보이셨다. 우리가 서로 용서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용서하신다. 주기도문을 통하여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방식이다.(링크 클릭)

4)예수님 이후의 교회: 예수를 힘입어 우리 죄가 용서된다. 사도행전 13장의 바울 사도의 설교는 예수 이후 교회를 통하여 전파된 새로운 죄 용서 방식을 선언한다. 예수는 어떤 분인가? 하나님께 죽기까지 신실하신 분이다. 하나님 마음에 쏙 든 분이다. 율법으로 이루고자 했던 의를 이루어 율법의 완성이 된 분이다. 

비유하자면, 하나님께서 제시한 의의 기준에 이르지 못한 인류 앞에, '너희 중에 단 한명이라도 이 기준에 도달한 한다면, 그를 보아 너희 전체가 이 기준에 도달했다고 여겨줄 것이다''라고 하신 것과 같다. 그의 믿음(피스티스=신실)으로 하나님의 기준에 도달한 이가 예수님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인류를 대표하는 존재로 여겨주시고(롬 5:18),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예수처럼 대우해 주기로 하셨다. 그리하여 우리는 예수님 덕분에(말미암아, 힘입어, 때문에) 죄 용서를 받는다. 예수 믿는 사람에서 "믿는다"는 말은 단지 영접기도를 드리거나 세례를 받거나 교회에 다니는 이상이겠지만, 여기서 부연하지는 않겠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의인이 된 사람들, 성자가 된 사람들이 아니다. 여전히 실패하고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다. 무엇이 다른가? 예수를 힘입은 죄 용서를 통하여 다시 일어날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이 다르다. 예수 믿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를 믿으면, 우리의 죄가 용서 되었다고 선언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시 한번 하나님의 기준에 합당한, 즉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으로 사는 삶을 시도할 수 있다. 이것을 목표점을 향하여 쉼 없이 달리는 달리기로 비유한 바울 사도의 말씀을 인용하며 묵상 글을 맺는다. 

빌립보서 3:12 - 14

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몸을 내밀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점을 바라보고 달려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