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점일획


엘 라훔(אֵל רַחוּם)/긍휼하신 하나님에 관한 묵상(이영미)

이영미
2025-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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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개론 수업을 마치면서, 한 학생이 “백성을 심판하고 벌 주시는 야웨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으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요?라는 질문을 던졌다.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하나님은 다르지 않으며, 두 성서가 증언하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속성은 ‘은혜와 사랑’임을 아무리 강조해도 구약의 심판의 하나님, 신약의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마르시온적 이분법적 이해와 편견은 쉽게 가시지 않음을 실감하였다.

구약성서는 하나님의 백성인 고대 이스라엘이 국가의 멸망과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라는 재난을 겪으면서, 그 원인을 되짚는 과정에서 자신의 죄책을 고백하고, 그러한 자신들의 죄에도 불구하고 용서하신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과 은혜를 증언하려는 목적으로 편집되었다. 그 과정에서 계약을 어긴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부각된 점은 불가피했지만, 토라의 최종적인 하나님 고백은 금송아지 사건으로 대표되는 우상숭배의 씻을 수 없는 죄도 용서하신 “은혜롭고 자비로운 야웨, 하나님 (יְהוָה אֵל רַחוּם וְחַנּוּן)이었다. (출 34:6)

자비롭고(라훔, רַחוּם)라는 형용사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사용된다(TWOT). 피조물을 가리킬 때는 사용되지 않는 표현이다.(트리블) 이 양식은 히브리성서, 타나크(TaNaK)에서 토라 뿐 아니라 느비임/예언서(욜 2:13; 욘 4:2)와 케투빔/성문서(대하 30:9; 느 9:17, 31; 시 86:15; 103:8; 111:4; 112:4; 145:8)에 광범위하게 등장하여, 하나님께서 역사 가운데에서 베푸신 구원 행동을 되풀이하여 고백할 때, 개인이 살려달라고 탄원할 때, 그리고 국가적인 회개가 필요하거나 하나님의 마음을 바꾸어 달라고 요청할 때 나온다.

동사 라함(רָחַם) 역시 피엘형으로 쓰일 때, 하나님의 긍휼하신 사랑을 나타낸다. (출 33:19; 신 13:17; 30:3; 왕하 13:23; 시 103:13; 사 14:1; 렘 31:20 등) 예레미야 31장 20절은 아들 에브라임을 향한 자궁이 떨리는 듯한 연민의 극진함을 강조형(라함 동사 페엘 부정형[רַחֵ֥ם]과 미완료태[אֲ‍ֽרַחֲמֶ֖נּוּ])으로 표현한다. 시 103편 13절은 아버지(אָ֭ב)인 하나님의 연민이 케라햄(כְּרַחֵ֣ם) 그리고 리함(רִחַ֥ם)으로 묘사되고 있다. 여자의 자궁에서 유래한 동사의 추상적 의미가 성(여자/남자)과 상관없이 끓어오르는 연민과 자비의 사랑을 묘사하는 은유로 쓰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끝으로, 이 단어의 근원 명사인 레헴(רֶ֫חֶם , 자궁)의 복수형인 라하밈(רַחֲמִים֙)은 신체기관을 넘어서서 ‘연민,’ ‘자비,’ ‘사랑’이라는 추상적인 뜻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준다. 필리스 트리블은 <하나님과 성의 수사학>에서 자궁 또는 포궁을 뜻하는 히브리어 레헴이 은유를 통해서 구체에서 추상으로 어떻게  발전하는지를 보여준다. 신체기관이 심리적 양태로 의미상의 이동을 보인다. 자궁은 은유의 매체이고 연민은 은유의 대의이다. 이 은유를 통하여 알 수 있는 하나님의 속성은 자신을 버리고 생명창조에 동참하는 사랑의 하나님이다. 자궁은 생명을 보호하고 키워내지만, 소유하거나 조종하지 않는다. 자궁은 온전함과 행복이 생겨나게 할 보물(생명)을 낳는다. 생명의 탄생 이후에도 자궁은 여전히 연민의 원천 혹은 통로이다. 

솔로몬의 재판으로 잘 알려진 열왕기하 3장 16-28절에서 솔로몬이 아이의 진짜 어머니를 판단하기 어려우니 아이를 칼로 둘로 자를 것을 명령하자(왕상 3:25), 진짜 어머니는 아들을 향한 "라하밈(רַחֲמִים֙)이 끓어올라" 아이를 상대 여자에게 주라고 대답한다(왕상 3:26). 이 대목을 <개역개정>은 "그 아들을 위하여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로, <새한글성경>은 "자기 아들 때문에 애가 타서"로 번역한다.  그렇다고 이것이 여성에게만 한정된 은유는 아니다. 남성들 또한 이 은유의 여행에 동참하고 있음을 요셉의 사례를 통해 볼 수 있다(시 103:13 위 참조). 창세기 43장 30절은 요셉이 자기 어머니의 아들 자기 동생 베냐민을 처음 보고 감정이 복받쳐 우는 장면을 “그의 라하밈(רַחֲמִים֙)이 끓어올랐기 때문”이라고 묘사한다. 이 대목을 <개역개정>은 "사랑하는 마음이 복받쳐 "로, <새한글성경>은 "애틋한 정이 복받"로 번역한다. 

묵상을 마치면서, 구약성서의 최종적인 하나님 고백이 심판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긍휼하신 하나님(אֵל רַחוּם)이었음을 기억하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이웃의 잘못과 고통을 대할 때 내면의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생명을 향한 연민을 가지고, 다시 말해서 라하밈(רַחֲמִים֙)이 끓어오르는 심정으로 함께 아파하고, 사랑하며 살아가기를 소망한다.  

인용 출처: 필리스 트리블/유연희 옮김. <하나님과 성의 수사학> (태초, 1996; 알멩e,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