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점일획


"속이다"에 대한 묵상

관리자
2024-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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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을 읽다 보면 5장에서 당황스럽고 두려운 이야기를 만나게 된다. 

첫 교회가 시작될 때, 성령의 강한 역사와 임박한 종말에 대한 기대로 담대함과 생동감이 교회를 채웠다. 새롭게 역사에 등장한 "교회"라는 공동체는, 유무상통 즉 "내것 네 것 없이 모든 것을 나누어, 가난한 사람이 없는" 공동체인 점이 특징이었다. 그것은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팔아서, 그 판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고, 사도들은 각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4장 말미에 등장하는 바나바는 그런 일의 좋은 본으로 제시되었다. 반면 5장에 등장하는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는, 이와 관련된 잘못을 범하여 죽음이라는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잘못한 것은 무엇인가? 소유를 다 팔지 않아서인가? 소유를 판 돈을 모두 내놓지 않아서인가? 그렇지 않다. 소유를 파는 것과, 판 돈을 나누는 것은 강제성을 띈 규정이 아니라 자발적이고 자비로운 행위였다. 안 해도 무방하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무엇을 잘못한 것인가? 성경은 그 답을 분명하게 밝힌다. "성령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였기 때문이다."(5:3-4) 

이 에피소드는 신약에 유일하게 등장하는 "형벌적 기적"(punitive miracle)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 외에는 예수님께서 열매 맺지 못한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신 이야기(막 11장=마 21장) 정도가 이 부류에 속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그들이 하나님을 속인 대가로 "기적적"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그 죽음을 불러온 주체가 베드로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암시가 본문에 깔려 있다. 구약에서 만나는 엄하게 벌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신약에서, 새로운 시대 교회의 시대가 열린 바로 그 시점에서 다시 만나니 이성적으로는 당황스럽다. 꼭 죽이기까지 하셔야 되었는가? 이 질문에 판단하고 답할 자리에 있는 사람은 없다. 다만, 이 이야기를 통하여 하나님을 속이는 잘못이 얼마나 엄중한 것인지 깨닫고 묵상할 수 있길 바란다. 

오늘 묵상할 단어는 "속이다"를 뜻하는 ψεύδομαι(프슈도마이)이다. "거짓"을 뜻하는 ψεῦδος(프슈도스)의 동사형이다. "거짓 메시아"를 뜻하는 ψευδόχριστος(프슈도크리스토스)나 "거짓 예언자"를 뜻하는 ψευδοπροφήτης(프슈도프로페테스) 모두 여기서 ψευδο(프슈도) 어근이 활용된 합성어이다. 


하나님, 거짓을 말할 수 없는 분

하나님의 특징을 설명하는 언어가 성경에 많지만, 그 중 비교적 덜 알려진 하나는 하나님은 "거짓을 말할 수 없는 분"이다. "신실하신" 하나님을 뒤집어 말하면 거짓이 없는 분, 거짓을 말할 수 없는 분이 된다. 히브리서가 그런 하나님의 속성을 서술하였다. 

히브리서 6:17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을 상속받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더욱 환히 나타내 보이시려고, 맹세로써 보증하여 주셨습니다.  18  이는 앞에 놓인 소망을 붙잡으려고 세상에서 피하여 나온 사람들인 우리가, 이 두 가지 변할 수 없는 사실 곧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를 의지하여 큰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시고 맹세하실 때에 거짓말을 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맹세로써 보증하시는 분이신데, 약속과 맹세하실 때에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는 것이 히브리서의 하나님 묘사이다. "거짓을 말할 수 없다"에 해당하는 원문은 ἀδύνατον ψεύσασθαι(아듀나톤 프슈사스싸이)인데, 아듀나톤은 "~을 할 수 있는 능력있음"을 뜻하는 δυνατός(듀나토스)에 부정 접두어 ἀ(아)가 붙은 꼴로, 영어로는 impossible이다. "거짓을 말할 수 없다" 혹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가 아니라, "거짓을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뜻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에게 "할 수 없는 것"이 있는데, "거짓을 말하는 것"이라는 히브리서 말씀이 흥미롭다. 

이런 하나님 이해는 히브리서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속사도 문서 중 하나인 클레멘트1서 27장 1절에서, "신실하신 그의 약속 위에, 올바르신 그의 판단 위에 굳게 서자"고 권면한 후, 2절에서는 하나님을 묘사하길 "우리에게 거짓을 말하지 말라고 하시는 하나님, 그 스스로 거짓을 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라고 한 후,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이유를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지만, 거짓을 말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for nothing is impossible with God, except to lie)이라고 결론 내린다. "거짓을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이라는 개념이 초대교회에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로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교회, 그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새로운 하나님의 성전 

신약시대에 와서 교회가 성전을 대신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예루살렘 성전과 같은 물리적 공간에 거하시는 분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성전은 무너져 내렸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시대가 왔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하여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찾는 쪽으로 "성전 없는 시대"를 헤쳐나갈 방향을 잡았다면, 초대교회에 제시된 길은 에클레시아가 성전을 대신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제 한 사람 한 사람 그리스도인들 안에(고전 6:19), 그리고 에클레시아 안에(고전 3:16) 영으로 거하신다. 

고린전서 3장 

16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성령이 여러분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을 멸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18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거든, 정말로 지혜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6장 

19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의 성전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여러분은 성령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모시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거하시는 성전된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이 지녔던 거룩함을 지녀야 한다(고전 3:17). 그리고 거룩함을 지키는 방식은, 예전처럼 물리적 공간을 성스럽게 꾸미는 것이나 그 공간 안에서 지켜야 할 행동양식을 엄숙하게 지키는 것이 아니다. "거짓을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을 따르는 "거짓없는 진실함"이야말로(cf. 위의 3:18) 새로운 성전의 거룩함을 지키는 방식이라는 것이 고린도전서의 중요한 내용 중 하나이다. 

교회는 성령의 코이노니아 위에 서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성령의 성전"(고전 6:19)이고, 그 작은 성전들이 하나로 묶여(코이노니아) "하나님의 성전"(고전 3:16)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성령은 어떤 영인가? 요한복음에서는 성령을 "진리의 영"으로 묘사한다. 

15:26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4)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 영이 나를 위하여 증언하실 것이다.

16:13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

교회가 성령의 코이노니아 위에 세워졌는데, 성령이 다름 아닌 "진리의 영"이라면, 교회에서 "거짓"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자명해진다. "거짓"은 교회의 코이노니아를 깨고 교회를 기초부터 뒤흔드는, 사탄의 작동이다. 위에 읽은 고린도전서 3장은 "하나님의 성전(교회)을 파괴하면,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을 멸하실 것입니다"라고 경고하고 있고, 사도행전 5장 역시 교회를 대상으로 거짓을 말한 아나니아에게 베드로는 "사탄에게 홀려" "성령을 속인 것이라고" 강하게 규탄한다. 모두 교회를 세우는 영인 진리의 영에 배치되는 행위로, 성령에 맞서고 교회를 무너뜨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사실, 성령을 모욕하는 일에 대한 강력한 경고는 예수님께서 공생애 초기에 말씀하신 바 있다. 마가복음 3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죄는 용서를 받을 것이지만" "성령을 모욕한 죄는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메인다"고 경고하셨다.(막 3:28-29) 여기서 "모욕하다"(βλασφημέω 블라스페메오)는 "우습게 알고 함부로 대하다"는 뜻이다. 마가복음 3장의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성령을 모독하는 일은 무엇이었나? 바로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행한 일들에 대해 "악한 귀신에 들려" 행한 것이라고 거짓을 말한 것이다.(막 3:30) 그로 인하여 예수님의 가족들조차 예수님을 찾아 왔다. 그렇게 거짓을 말하는 것은 성령을 우습게 알고 함부로 대하는 죄에 해당하며, 용서 받을 수 없는 유일한 죄이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3장이 말하는 "멸망"이나 사도행전 5장이 보고하는 아나니아의 "죽음"과 같은 비참한 결과는, 돌출적인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미 경고하신 맥락 속에 있는 것이다. 


바울 사도의 모범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그의 선교 과정에서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거듭 강조하였다. 

로마서 9:1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내 양심이 성령을 힘입어서 이것을 증언하여 줍니다.

고린도후서 11:31 영원히 찬양을 받으실 주 예수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내 말이 거짓말이 아님을 아십니다.

고린도후서 1:16-18

나는 여러분에게 들러서, 마케도니아로 갔다가, 마케도니아에서 다시 여러분에게로 와서, 여러분의 도움을 받아서 유대로 갈 작정이었습니다. 내가 이런 계획을 세운 것이 변덕스러운 일이었겠습니까? . . .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여러분에게 하는 말은, '예' 하면서 동시에 '아니오'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1:17 또 나보다 먼저 사도가 된 사람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곧바로 5)아라비아로 갔다가, 다마스쿠스로 되돌아갔습니다. 18 삼 년 뒤에 나는 6)게바를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나는 그와 함께 보름 동안을 지냈습니다. 19 그러나 나는 주님의 동생 야고보 밖에는, 사도들 가운데 아무도 만나지 않았습니다. 20 (내가 여러분에게 쓰는 이 말은, 하나님 앞에 맹세코 거짓말이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2:5 여러분이 아는 대로, 우리는 어느 때든지, 아첨하는 말을 한 일이 없고, 구실을 꾸며서 탐욕을 부린 일도 없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증언하여 주십니다.

디모데전서 2:7 나는 이것을 증언하도록 선포자와 사도로 임명을 받아 믿음과 진리로 이방 사람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었습니다. 나는 지금 참말을 하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향한 권면 

성경은 우리에게도 거짓을 말하지 말라고 분명하게 권면한다. 

골로새서 3:9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옛 사람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버리고, 10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이 새 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져서, 참 지식에 이르게 됩니다.

이 구절은 성도가 새 사람을 입어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길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 출발점은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하였는데, 이때 "서로"는 교회라는 상황을 반영한 언어이다. 

야고보서 3:14 여러분의 마음 속에 지독한 시기심과 경쟁심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고, 진리를 거슬러 속이지 마십시오.

진리를 거슬러 거짓을 말하고 싶은 유혹이 가장 강하게 드는 순간은 시기심과 경쟁심이 가득 찼을 때이다. 야고보서는 그럴 때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구약에도 거짓과 관련된 많은 말씀이 있지만, 두 본문만 인용하겠다. 

에스겔 33:30 "너 사람아, 네 민족의 자손 모두가 담 밑이나 집 문간에서 네 이야기를 하며, 자기들끼리 서로 말하기를 '어서 가서, 주님께서 그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들어나 보자' 하면서, 31 마치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무슨 구경거리를 보러 오듯이 너에게 올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네가 하는 말을 듣기만 할 뿐, 그 말에 복종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이 입으로는 달갑게 여기면서도, 마음으로는 자기들의 욕심을 따르기 때문이다. 32 그들은 너를, 악기를 잘 다루고 듣기 좋은 목소리로 1)사랑의 노래나 부르는 가수쯤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네가 하는 말을 듣기만 할 뿐, 그 말에 복종하지는 않는다. 33 그러나 내가 너에게 시켜서 한 그 말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그 말씀이 이루어지면, 그 때에야 비로소 그들 가운데 예언자가 있었다는 것을, 그들이 알게 될 것이다."

이사야서 29:13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고, 입술로는 나를 영화롭게 하지만, 그 마음으로는 나를 멀리하고 있다. 그들이 나를 경외한다는 말은, 다만, 들은 말을 흉내내는 것일 뿐이다.

살짝 다른 방점을 가진 본문이지만, 경고하는 예언의 말씀 내용은 같다. 에스겔은 "말씀을 듣기만 하고 복종하지 않는" 태도를 경계한다. 잘 듣기 때문에 복종도 할 것 같지만, 잘 듣는 태도가 진심이 아니라는 비판이다. 이사야 말씀은 "말로는 주님을 가까이 하지만, 속마음으로는 멀리하는" 위선적 태도에 대한 비판이다. 둘 다 결국 "거짓된 신앙 태도"에 대한 비판이다. 


진실과 진솔

진실과 진솔을 구별해 보자. 진실은 말과 사실이 일치하는 것이고, 진솔은 말과 화자의 생각이 일치하는 것이다. 진실이 깨지면 거짓이다. 이 경우에는 의도성 없이 실수로 행한 거짓도 있다. 그러나 진솔도 깨지면, 즉, 의도성까지 더해지면, 그 거짓은 변명할 여지가 없다. 아나니아의 거짓이 이런 사례를 보여준다. 아나니아는 거짓을 말하지는 않았다. 대신 거짓을 행동하였다. 그가 별다른 설명 없이 자기 재산 판 돈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을 때, 그 행동은 자기 재산을 판 "전액"을 바친다는 제스처였다. 그러나 아나니아는 그 중 얼마를 떼어 놓고 바쳤기 때문에, 그의 행동은 진실하지도 않고 진솔하지도 않은, 변명의 여지없는 거짓이었다.

아나니아는 왜 거짓을 행했을까? 바나바에 대한 경쟁심이나 시기심이었을까? 명예를 얻고 싶은 마음이나 영적 허영심이었을까? 답을 알 수 없다. 다만, 그는 거짓을 행하였고, 그에 대한 징계는 무서웠다. 성령을 모욕하려는 시도였기 때문이다. 

거짓이 판치는 세상이다. 믿는 자들의 마음에도, 교회의 삶에도 거짓이 들어와 있다. 하나님의 속성, 교회의 속성, 바울 사도의 사례, 성도를 향한 성경의 권면 등을 살필 때, 진리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거짓되게 말하고 행동하도록 유혹하는 사탄에 맞서 싸워야 하는 것이 분명하다. 거짓의 문제는 단순한 하나의 윤리 덕목의 문제가 아니라, 빛과 진리 되시는 하나님 앞에 설때 먼저 해결해야 하는 근본 문제이다. 거짓에 대한 여러분의 태도는 어떠한가? 단호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