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점일획


아짜브(עצב): “아파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묵상 (송민원)

관리자
2024-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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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짜브(עצב): “아파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묵상 

 - 책 소개를 겸해서: 테렌스 E. 프레타임 저, 조덕환 역,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고통”(시들지않는소망, 2024)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그분을 다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그분은 인간의 언어를 초월해 계신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언어의 한계 내에서 그분을 ‘은유적’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에 대한 표현도 필연적으로 은유적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나 왕, 목자에 비유하거나, 독수리 등의 생물, 혹은 반석, 요새, 방패와 같은 무생물, 심지어는 도움, 힘, 사랑 등의 추상적 개념에 빗대어 설명합니다. 화가 나셨다, 한탄하셨다, 기뻐하셨다 등 우리 인간이 느끼는 감정으로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 역시 은유의 일종입니다.

테렌스 프레타임(Terence E. Fretheim)은 은유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한 영역에 적합한 언어를 가져다가 다른 영역을 보기 위한 렌즈로 사용하여 두 개의 분리된 영역을 인지, 정서적 관계로 가져오는 것”(28). 쉽게 말하면, 하나님을 ‘은유’로 표현한다는 것은 ‘하나님 아닌 것’으로 하나님을 설명하려는 시도입니다. ‘하나님 아닌 것’으로 하나님을 설명하는 방식은 신성모독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특히, 신인동형적(anthropomorphic)으로 표현하는 것은 신약보다는 구약에서 훨씬 두드러지는데, 이것이 서구신학이 아주 오랫동안 구약의 하나님 이해를 ‘수준 낮은’ 혹은 ‘덜 발전된’ 표현양식으로 취급해왔던 이유 중 하나입니다. 초월적이고 불변하는 신성을 강조하는 전통에서는 후회하고 마음이 바뀌고 화를 냈다가 금세 누그러지는 하나님에 대한 성경(구약)의 증언이 난감하고 처치곤란했습니다. 하나님의 ‘돌이키심(마음이 바뀌심)’에 대한 40개나 되는 성경 본문이 학자들의 주석이나 연구서에서 거의 관심을 받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라고 테렌스 프레타임은 지적합니다(48).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고통”(시들지않는소망, 2024)은 그동안 무시되거나 평가절하되어 왔던 ‘인간적인 하나님’에 대한 성경의 표현이 가지는 가치를 되살립니다. 하나님을 인간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무한자를 유한의 세계로, 이해될 수 없는 분을 인간의 이해 능력 안으로 끌고 들어오려는 단순한 ‘은유’적 장치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창조주와 피조세계 사이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신학적 증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세계로 ‘스스로를 보이시는(니르아 נִרְאָה)’ 분입니다. 그분은 절대타자(Absolute Other)로서 홀로 유아독존하실 수도 있지만 피조물과 관계를 맺기로 결정하신 분(3장)이십니다. 시간과 역사라는 피조된 영역과 스스로를 분리시킬 수 있는 분이지만, 오히려 반대로 그 세계 속으로 틈입하십니다(5장). 모든 것을 독단적으로 결정하실 수 있는 분임에도, 인간의 반응을 기다리시고 인간과 대화하시고 질문하시고 때로는 인간에게 설득당하기도 하시는 분입니다(4장). 심지어는 피조물인 사람의 모습으로 스스로를 드러내시는 창조주이시기도 합니다(6장). “말씀(로고스)이 육신이 되어”라는 표현보다 더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창조주와 피조세계 사이를 긴밀하게 연결하는 표현이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요.


인간의 죄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가 단절되었다는 신학적 진술은 수정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완전히 다르게 말합니다. 창세기 3장 이후는, 명령을 어긴 아담과 하와에게, 그리고 형제를 살해한 가인에게 찾아와 말씀하시는 하나님, 잘못된 길로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관계를 결코 끊지 않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묘사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관계는 단 한번도 단절된 적이 없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관계가 깨어지는 것을 가장 싫어하시고 관계에 금이 간 것을 가장 아파하십니다. 관계가 단절된(끊어진) 것과 깨어진 것은 전혀 다른 진술입니다. 단절된 관계(disconnected relationship)는 그 사이를 연결할 가능성이 차단되어 있습니다. 깨어진 관계(broken relationship)는 소통과 회복의 가능성에 열려 있습니다. 창세기 3장의 에덴동산에서의 축출과 창세기 6장의 홍수 심판을 끊어짐으로 보느냐 깨어짐으로 보느냐에 따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이해가 확연히 달라집니다.

개역개정이 “마음에 근심하시고”(창 6:6)로 번역한 문장의 히브리어 원문 וַיִּתְעַצֵּב אֶל־לִבּוֹ(바이트아쩨브 엘-립보)는 ‘하나님은 심장에 상처를 입으셨다’ 혹은, ‘가슴이 저리도록 고통스러웠다’ 정도의 아주 강한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저 하늘 높은 곳에서 인간의 죄를 단호하게 심판하며 인간과의 관계를 과감히 끊어버리시는 공감 능력이 결여된 소시오패스 같은 하나님으로 얼마든지 묘사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을 그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배신당해 괴로워하고 잊혀져서 아파하시는 분입니다(렘 2:29-32).

프레타임의 표현을 빌자면, “깨어진 관계로 인해 깊은 상처를 받는 분”(223)입니다. 이 책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고통(the Suffering of God)”은 관계의 깨어짐으로 아파하시는 하나님(the Suffering God)에 대한 진술로 그 절정을 이룹니다. 그분은 사람들로 인해 상처받고(7장), 사람들과 함께 아파하며(8장), 사람들을 위해 스스로 고통 속으로 들어가시는 분입니다(9장). 깨어진 관계를 놓지 않고 끊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고 몸부림치는 하나님이십니다.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예언자들을 다룹니다(10장). 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분의 뜻을 행하는 사람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입니다. 호세아나 예레미야처럼 배신당하고 거절당하고, 동시에 아파하는 자들과 함께 아파하고,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고통 당하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여전히 남는 신정론의 문제: 기타모리 가조와 테렌스 프레타임, 그리고 엘리 위젤


아파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인간의 고통에 동참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학을 전개한 것이 테렌스 프레타임이 처음은 아닙니다. 위르겐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Theologie der Hoffnung)”과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Der gekreuzigte Gott)”에 깊은 영향을 준 전후 일본 신학자 기타모리 가조(北森嘉蔵)가 있습니다.

그의 1946년 작 “神の痛みの神学”(우리말 번역: “하나님의 아픔의 신학,” 이원재 역, 새물결플러스, 2017)은 자신의 상처로 인간의 상처를 치유하시는 하나님을 사유합니다. 기타모리 가조가 주목한 표현은 렘 31:20의 “내 창자가 들끓으니(הָמוּ מֵעַי)”입니다. 사랑하는 자녀를 바른 길로 인도하고자 꾸짖고 혼내는 부모의 마음이 (대부분) 그렇듯이, 이스라엘에게 고난을 허용하시는 하나님의 마음 또한 마찬가지로 고통스럽습니다. ‘진노’라는 감정이 ‘사랑’으로 극복되고 상승하는 과정에서 ‘아픔’이 발생합니다. 인간의 고통에 동참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아들(성자)의 십자가의 죽음’에서 그 절정을 맞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성품이 어떤 진화의 과정, 혹은 변증법적 발전의 단계를 겪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이 변하는가? 혹은, 하나님은 서서히 자신을 계시하셔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서 ‘최종적으로’ 자신의 성품을 ‘온전히’ 드러내셨는가? 구약의 ‘진노의 하나님’과 신약의 ‘사랑의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단절’이나 ‘급작스런 전환’으로 보지 않고, ‘아픔의 하나님’이라는 개념으로 둘 사이를 연결한다는 점에서 가조의 신학은 의미를 가집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도 구약과 신약 사이의 ‘모순’이나 ‘불일치’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불완전한 구약’이 신약에 와서야 완결성을 갖는다는 관점은 그다지 새로울 것도 놀라울 것도 없습니다.

테렌스 프레타임의 “하나님의 고통”은 이러한 면에서 가조와 다릅니다. 프레타임의 신학적 기여는 구약과 신약 사이의 연속성을 선명히 드러낸 데 있습니다. 구약시대의 무서운 심판의 하나님이 신약에 와서 사랑의 그리스도로 대체된 것이 전혀 아닙니다. 끊임없이 배신당하고 상처받으면서도 관계의 끈을 놓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그대로 이어집니다. 구약에 묘사된 하나님만 알던 1세기 사람들이 어떻게 죄인들과 함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었는지는 이 연속성 속에서만 이해되고 설명됩니다(“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막 15:39).

둘째, 신정론(Theodicy)의 문제에 대한 가조의 ‘해결책’은 하나님의 선하심(God’s goodness)을 강조하고 하나님의 하나님되심(God’s godness)을 약화시키는 방식입니다. 인간의 고난에 동참하시는 하나님을 묘사하는 것은 그 하나님이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선한 분이신지를 잘 납득시켜 줍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께서 애초에 왜 인간을 고난 속으로 집어넣으시는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무죄한 자의 고난(Innocent Suffering)’까지를 포함해서 이 세상에 벌어지는 모든 고통과 폭력, 부당함과 불의함 역시도 전능하신 하나님에 의한 것(혹은 하나님의 허락/주권 하에 벌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애써 외면합니다. 마치 가조의 아픔의 신학이 2차대전 이후 패망한 일본의 처참한 상황에서 출발한 상황신학이면서도, 일본이 세계전쟁을 일으킨 주범 중 하나라는 전제적 상황에 눈감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좋고 선한 일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악과 불의는 하나님 아닌 그 무언가가 벌인 것이라면 하나님은 절대주권자가 아니라 부분주권자일 뿐입니다.

이 문제에 있어서는 프레타임도 가조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관계의 깨짐으로 아파하시고 깨어진 관계로 인한 사람들의 고통에 함께 참여하시는 분이지만, 동시에 관계가 깨지도록 허락하시는 분이기도 합니다. 프레타임은 후자의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마치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도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며 함께 고통받았다는 진술이 유대인들을 가스실로 넣으신 하나님에 대해서 침묵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가조와 프레타임의 정반대에 엘리 위젤(Ellie Wisel)이 있습니다. 그의 1979년 작 “The Trial of God: as it was held on February 25, 1649, in Shamgorod”(우리말 번역: “샴고로드의 재판,” 포이에마, 2014)는 유대인 학살을 허락하시고 용인하신 하나님을 피고로 재판대에 세웁니다. 이 희곡은 17세기 우크라이나의 샴고로드라는 마을을 배경으로 하지만, 엘리 위젤이 10대 때 아우슈비츠에서 실제 경험한 일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수용소에 갇힌 유대 랍비 세 사람이 ‘전능하신 하나님(절대주권자로서의 하나님)’에 대해 재판을 벌였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만장일치로 유죄판결을 받습니다(엘리 위젤의 기억에 따르면 ‘유죄’라는 말이 사용된 것은 아니고 ‘책임이 있다’ 혹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빚을 졌다’라는 판결이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왕비 에스더를 들어 하만의 유대인 학살 계획을 막으셔서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에 9:22) 되게 하신 선하신 분이지만, 애초에 그 슬픔을 허락하신 분 역시 하나님이십니다(“우리의 마음에는 기쁨이 그쳤고 우리의 춤은 변하여 슬픔이 되었사오며, 애 5:15). 그 이후에도 히틀러와 나치의 끔찍한 폭력을 들어 자신의 백성에게 말할 수 없는 슬픔과 애통을 선사하시는 분이시도 합니다.


어떤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일까요? 20세기에도 21세기에도 이해할 수 없는 고통과 폭력이 여전함을 보건대,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점진적으로’ 변화하거나 사랑의 하나님으로 점점 ‘승화’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예전에도 지금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풍성하신 분이시며 동시에 조금의 사정도 봐주지 않고(로 하말 לֹא חָמַל, 애 2:2, 21) 가차없이 자신의 백성들을 쓸어 버리시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무엇이 맞고 무엇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둘 다 맞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두 모습을 모두 다 반복적으로 증언합니다. 논리적인 불일치와 심리적인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사실 우리는 하나님의 두 모습을 다 알고 있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보고 싶지 않고 듣고 싶지 않은 것을 스스로 차단하는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신앙’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유죄를 선언한 랍비들이 재판을 끝내고 곧바로 저녁 기도회에 참석했던 것처럼, 우리의 신앙도 모순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이 원래 그런 분이시니까요.


테렌스 프레타임의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고통”은 성서학자에 의해 재구성된 조직신학이고, 구약학자에 의해 다시 쓰여진 신론(神論)입니다. 그가 주목하는 하나님의 단면이 전체를 아우르지 못한다고 비난하는 것은 정당한 비판이 아닙니다. 왜 이런 점을 간과하고 있나? 왜 다른 것도 고려해서 균형 잡힌 시각을 갖추지 못하는가? 저 하늘에 바닷물로 그분을 기록해도 다 기록할 수 없는데, 하나님의 모든 모습을 ‘균형 있게’ 제시해야 할 책임이 책 한권에 있지 않습니다. 프레타임의 작업이 의미가 있는 것은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하나님의 모습을 부각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파하시는 하나님,’ ‘약하신 하나님’을 강하게 소리 높여 외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런 얘기를 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입니다. 테렌스 프레타임과 같은 시도가 많아져야 신학이 풍성해집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넓어지면 그분의 형상을 닮은 인간에 대한 이해도 깊어집니다. 우리를 둘러싼 창조세계를 바라보는 신앙의 시야가 넓어지고, 보고 느끼고 경험한 것을 표현할 수 있는 신앙의 어휘가 늘어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