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점일획


아쩰(עָצֵל): “게으름”에 대한 묵상

송민원
2023-08-23
조회수 1356

귀국해서 처음으로 대학에서 강의하게 되면서 주위사람들에게 수많은 경고를 받았습니다. 주로 “요즘 대학생놈들”로 시작하는 조언들이었습니다. 강의에는 무관심하고 수업시간에 핸드폰만 들여다본다는 류의 얘기들로 바짝 긴장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저 역시 첫 강의 때 “대학 다니는 걸 당연한 권리로 여기는 어린 것들을 가르치고 싶은 마음이 없다”라는 엄포로 한 학기를 시작했습니다. 실제로 만난 젊은 친구들은 참으로 감사하게도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정말 반짝반짝 빛나는 눈빛들을 보여주었습니다. 게 중에는 시니컬하고 반항적인 시선들도 종종 있었지만 저는 그런 ‘삐딱한’ 친구들을 사랑합니다. 저도 그랬었으니까요.

어느 날 카톨릭의 칠죄종(septem peccata capitalia)을 잠언 6장과 비교하는 내용을 가르치면서 학생들에게 물어봤습니다. 일곱 대죄에는 교만, 인색, 질투, 분노, 음욕, 탐욕, 나태가 있는데 여러분들은 어떤 것이 가장 마음에 걸리느냐고. 아무래도 혈기왕성한 젊은 친구들이니 ‘음욕’이라는 답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한 학생이 곧바로 대답합니다. 나태요. 교수님, 저는 너무 게을러서 괴로워요. 공부하려고 책상에 앉아 있으면 눈이 너무 감겨서 힘듭니다. 예상하지 못한 답변이 나와 재미있었고, 또한 “요즘 대학생놈들”이 얼마나 성실하고 자신의 삶에 충실하려고 애쓰는 지 놀랐습니다.



히브리어 아쩰(עָצֵל)의 의미와 활용


칠죄종에서 맨 마지막으로 언급되는 나태는 라틴어로 acedia(아세디아, 아체디아, 혹은 아케디아로 발음)입니다. 카톨릭에서 심각한 ‘대죄’로 규정된 것이 무색하게, 사실 나태가 과연 심각한 죄인가 하는 신학적 문제가 중세에도 제기되었습니다. 나쁜 일을 ‘하는 것’이 죄인데, 과연 무언가를 ‘하지 않는 것’도 죄일까? 그래서인지 단테의 신곡의 지옥편에 일곱 층으로 되어 있는 지옥에 ‘나태 지옥’은 빠졌습니다. 대신 영화 “신과함께”에 두번째 지옥으로 나태지옥이 나오긴 합니다.


중세 기독교인들이 게으름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취한 것과는 달리, 성경은 게으름을 아주 부정적인것으로 여깁니다. 단 한번도 긍정적이거나 중립적인 의미로 사용된 적이 없습니다. ‘게으름’ 혹은 ‘게으른 자’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단어는 아쩰(עָצֵל)입니다. 성경에 총 열다섯 번 쓰이는데, 삿 18:9를 제외하고는 전부 잠언에만 나옵니다(잠 6:6, 6:9, 10:26, 13:4, 15:19, 19:24, 20:4, 21:25, 22:13, 24:30, 26:13-16). 그리고 아쩰의 변형 형태가 잠 19:15, 31:27, 전 10:18에 나타납니다.  


몇몇 대표적인 구절을 살펴보자면,

잠 6:6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잠 6:9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누워 있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잠 13:4 게으른 자는 마음으로 원하여도 얻지 못하나 부지런한 자의 마음은 풍족함을 얻느니라

잠 15:19 게으른 자의 길은 가시 울타리 같으나 정직한 자의 길은 대로니라

잠 24:30 내가 게으른 자의 밭과 지혜 없는 자의 포도원을 지나며 본즉


‘게으른 자(아쩰)’의 반대말은 ‘부지런한 자’뿐 아니라 ‘정직한 자’와 ‘지혜 없는 자’이기도 합니다. 잠언의 선악 이분법에 따르면, 부지런함과 정직함은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는 지혜에 속해 있고, 게으름은 무지와 악의 영역에 속해 있습니다. 잠언은 이 게으른 악인/무지자에게 ‘개미’에게 가서 “지혜”를 배우라고 명령합니다(6:6). 이 구절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에 익숙한 우리에게 ‘개미에게 배우라’는 명령은 그리 불편하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는 조언입니다. 그러나 규범적 지혜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것은 상당히 모욕적인 말입니다. 규범적 지혜는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보고, 하나님께서 ‘지혜’를 인간에게만 허락했다고 여깁니다. 욥과 논쟁하던 빌닷이 갑자기 “어찌하여 우리를 짐승으로 여기며 부정하게 보느냐”(욥 18:3)고 화를 내는 장면이 있는데, 욥은 사실 세 친구를 짐승 취급한 적이 없고 특히나 ‘부정’하게 여긴 적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빌닷이 이렇게 반응하는 이유는 욥이 자신을 지혜 없는 자로 취급하는 것은 곧 동물로 취급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고 또한 부정한 것으로 취급하는 것과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동물을 구별하고 정결과 부정을 구별하는 것이 규범적 지혜입니다. 그런데, 잠 6:6은 동물도 아닌 벌레에게, 심지어 ‘정결과 부정의 이분법’을 적용 조차 할 필요 없는 개미에게 가서 배우라고 하는데, 이것은 게으른 자를 벌레 만도 못한 자로 취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미워하시고 싫어하시는 일곱 가지(잠 6:16-19)


잠언이 이렇게 게으름에 대해 심각할 정도로 경고를 하고 있음에도,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고 싫어하시는 “예닐곱 가지”에 이 게으름이 포함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 곧 그의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예닐곱 가지이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이니라 (잠 6:16-19)


카톨릭의 칠죄종(교만, 인색, 질투, 분노, 음욕, 탐욕, 나태)과 하나님이 증오하시는 일곱 가지(거만한 눈, 거짓말하는 혀, 무고한 피를 흘리는 손, 간악한 계획을 꾸미는 마음, 악한 일을 하려고 달려가는 발, 거짓 증언, 형제 사이의 이간질)는 얼핏 보기에 유사한 듯 하지만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칠죄종이 한 사람의 마음의 상태를 죄로 여기는 반면, 잠언 6장의 일곱 가지는 타인과의 관계를 깨뜨리는 폭력을 의미합니다. 개인의 마음 상태에서 게으름은 큰 문제일 수 있겠지만, 이웃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타인과의 관계를 깨뜨리는 점에 있어서 게으름은 중요한 핵심요소는 아닌 듯 합니다(물론 게으름이 이혼 사유가 될 수도 있겠지만요). 오히려 악한 일을 하려고 달려가려면 부지런해야 합니다. 거짓말도 제대로 하려면 아주 치밀하고 꼼꼼해야 합니다. 머리도 좋아야 하고 기억력도 좋아야 하죠. 형제 사이를 이간질하는 것도 게으른 사람은 웬만해서는 하기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악은 성실하다,” “악은 부지런하다”라는 말이 있나 봅니다.


잠언의 규범적 지혜를 벗어나면 욥기나 전도서의 반성적 지혜는 게으름에 대해 거의 언급이 없습니다. 욥기는 아무 말 안하고, 전도서는 10장 18절에 한번 언급될 뿐입니다. 더 확장해서 보면, 모세5경은 게으름에 대한 얘기를 전혀 하지 않고 있고, 선지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제2성전기 시대의 에스라(4:22)와 역대기(대하 29:11)에 와서야 한번씩 게으름에 대한 경고가 주어집니다. 복음서에도 한 달란트 받은 종을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꾸짖는 장면에서 게으름에 대한 언급이 단 한번 나옵니다(마 25:26). 그러나 이 달란트 비유와 병행구절인 눅 19:22에는 그냥 “악한 종아”라고만 되어 있을 뿐 게으름이 없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걱정하는 사람은 게으른 사람이 아니라 부지런한 사람입니다. 마 25장의 열 처녀의 비유는 게으름에 대한 비유가 아닙니다. 등을 가지고 오면서 기름은 안 가져오는 “미련한 자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물론, 부지런히 선교 사역을 다니시고 바쁘신 와중에도 교회들에 편지를 보내신 바울 선생님은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하라고 충고하는 일에도 부지런하셨습니다(롬 12:11, 살전 5:14, 살후 3:6, 딤전 5:13).



게으름을 위한 변명


게으름을 자책하던 젊은 신학생에게 위로의 말을 해주었습니다.

“나는 정말 게으르다. 내일 할 일을 절대 오늘 하지 말자, 앉아서 할 수 있는 일을 서서 하지 말자, 누워서 할 수 있는 일을 앉아서 하지 말자라는 좌우명으로 살아가고 있다. 티비는 누워서 보는 것이다. 누워서도 할 수 있는 일을 왜 앉아서 하느냐. 심지어 운동하면서 티비 보는 ‘정신 나간 것들’도 있다더라. 나는 내가 게으르다는 사실에 정말 하나님께 감사하다. 게을러서 할 일을 잘 못할 때도 있고 손해 보는 때도 있지만, 귀찮아서 하지 않거나 하다 만 일들로 감사한 경우가 더 많다. 나를 괴롭힌 사람을 머리속으로는 수도없이 난도질하며 멋들어지게 복수하는 상상을 하지만, 막상 실행에 옮기려 하면 ‘내일 하지’ 한다. 내일 할 수도 있는 일이니까. 내일 해도 되는 일을 굳이 오늘 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하루 자고 나면 굳이 상대를 골탕 먹이러 밖에 나가는 일이 무척 귀찮아진다. 일단 나가려면 씻기부터 해야 하니까. 귀찮아서 결국 잊어버리고 만다. 일일이 다 기억하는 것도 피곤한 일이다. 나쁜 짓도 부지런해야 할 수 있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