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점일획


이웃πλησίον에 관한 묵상

우진성
2023-08-20
조회수 1842

"이웃"에 사용된 헬라어 플레시온πλησίον은 부사이다. 영어로 near, nearby 정도로 옮길 수 있는데 무언가가 무언가에 가깝게 위치한 모습을 표현한다. 여기에 관사가 붙어 독립적 용법으로 사용하면 "이웃"이 된다. "이웃"의 기본적 의미는 "가까이 있는 사람"이다. 

신약에서 플레시온은 여러 의미로 파생되어 사용되었다. 


1) 함께 일하는 동료: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은 모세 이야기를 그의 설교 중에 전하는 데, 함께 일하던 동료 간의 싸움에 개입한 모세 이야기가 나온다. 그때, 함께 일하는 동료에 대해 플레시오늘 사용하였다. 


"그런데 동료에게 해를 입히던 사람이 모세를 떠밀고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누가 너를 우리의 지도자와 재판관으로 세웠느냐?"(행7:27)


2)동료 그리스도인: 로마서 15장에는 동료 교인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교훈이 나온다. 그중 2절에 플레시온이 사용되었는데, 단지 플레시온이 사용되었다는 이유로 새번역과 개정개역 모두 "이웃"이라 번역하였다. 그러나 1~6절까지의 문맥을 고려할 때, 2절에 사용된 플레시온은 "이웃"이 아니라 "동료 교인" 혹은 "동료 그리스도인"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이것은 에베소서 4장과 야고보서 4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 이웃의 마음에 들게 행동하면서, 유익을 주고 덕을 세워야 합니다."(롬15:2) 


"그러므로 여러분은 거짓을 버리고, 각각 자기 이웃과 더불어 참된 말을 하십시오. 우리는 서로 한 몸의 지체들입니다."(엡4:25)


"율법을 제정하신 분과 심판하시는 분은 한 분이십니다. 그는 구원하실 수도 있고, 멸망시키실 수도 있습니다. 도대체 그대가 누구이기에 이웃을 심판합니까?"(약4:12)


3)"이웃 사랑"이 "하나님 사랑"과 함께 가장 큰 계명(막12:31과 병행구)이라는 말씀은 여기 인용할 필요도 없겠다. "이웃 사랑"이 율법의 요약이며 그 안에 모든 율법이 담겨 있다는 일련의 말씀은(롬13:9, 갈5:14, 약2:8) "이웃 사랑"이 율법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계명이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간음하지 말아라. 살인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탐내지 말아라" 하는 계명과, 그 밖에 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모든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는 말씀에 요약되어 있습니다.(롬13:9)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신 한 마디 말씀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갈5:14)


여러분이 성경을 따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으뜸가는 법을 지키면, 잘하는 일입니다.(약2:8)


놀랍게도"이웃 사랑"을 강조하는 이런 말씀에 "하나님 사랑"은 함께 등장하지 않는다. 


4)"하나님 사랑" 없이 "이웃 사랑"이 연속해서 강조되었다는 점 보다 더 놀라운 예수님의 교훈은, 사랑해야 하는 이웃의 범위가 "가까이 있는 사람"으로 한정되지 않고 (심리적 관계적으로) "멀리 있는 자"까지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율법 6반제 속에 그 이야기가 있다. 6반제의 마지막 반제는 이렇게 시작한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마5:43)


여기서 "이웃"과 "원수"는 각각 τὸν πλησίον(톤 플레시온)과 τὸν ἐχθρόν(톤 엑흐쓰론)이다. "원수"에 해당하는 엑흐쓰론의 의미는 "미워하는/적대적인 사람"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들까지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라"(마5:44/눅6:27-28)는 말씀으로 율법을 뒤집으셨다. "미워하는/적대적인 사람" 조차 "이웃"으로 대하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의 이 가르침 안에서 "가까운 사람"과 "먼 사람" 사이의 경계는 허물어졌다. 에베소서의 유명한 아래 구절은 이 교훈과 일맥상통한다. 


여러분이 전에는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분의 피로 하나님께 가까워졌습니다.(엡2:13)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 사이의 경계를 허무셨고, 또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과 "가까이 있는 사람들" 사이의 경계도 허무셨다.


그분은 오셔서 멀리 떨어져 있는 여러분에게 평화를 전하셨으며,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도 평화를 전하셨습니다.(엡2:17)


놀라운 것은 이렇게 "이웃"을 둘러싼 경계, 즉 "가깝고" "먼" 사이의 경계를 깬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상reward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상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마5:44b-45a)


그러나 너희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좋게 대하여 주고, 또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그리하면 너희는 큰 상을 받을 것이요, 더없이 높으신 분의 아들이 될 것이다.(눅6:35)


누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가? 단순히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다. 그 이웃의 범위가 "가까이 있는 사람"에 한정되지 않고, 원수로까지 확장된 사람이다. 


5)누가복음 10장의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는 다름 아닌 이 교훈을 구상화 하신 말씀이다.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시게 된 것은 한 율법교사의 도발이다. 그는 예수님께 영생에 관하여 물었지만, 사실 그의 물음은 진리를 알기 원하는 순수한 동기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예수를 시험"하려는 동기에서 나온 물음이었다.(눅10:25) 예수님께서는 즉답을 피하시고, 이 율법교사에게 질문을 되돌렸다. 율법학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대답하였다. 그는 자신의 답을 가지고 있으면서 예수님께 질문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리하면 살 것이다"(눅10:28)고 말씀하셨다. 방점은 행함 위에 놓여 있다. 아는데 그치지 말고 행해야 "살 것"이라는 말씀이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율법교사로서 익힌 성경 지식을 행하는데 사용하지 않고 남을 시험하는데 사용하는 자에게 탁월한 방식으로 교훈하셨다.  

대화는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이 율법교사의 도발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자기를 옳게 보이고 싶어서", 그는 예수님에게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묻는다. 첫 질문의 의도가 시험이었다면 두 번째 질문의 의도는 자기중심적 의다. 그런데, "자기를 옳게 보이는 것"과 "누가 이웃인지 묻는 질문"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일까? 율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웃의 범위를 정해온 자신의 모범적/율법적 행태에 비해, 세리와 죄인의 이웃이 되신 예수님의 행태를 비판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리라. 스스로의 의를 자랑하고픈 이 율법교사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이다. 

예수님의 비유는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이 아니다. 오히려 거슬러 올라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행하며 살 것인가에 대한 원칙적 가르침으로 보인다. 제사장/레위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의 차이는 무엇일까? 제사장/레위인 그리고 이 질문을 던진 율법교사의 초점은 사랑의 "대상"에 가 있었다. 제사장/레위인은 "하나님 사랑"을 행하는 직무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율법교사의 질문은 그가 유지하고 있는 "이웃" 범위에 대한 자부심을 보여준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의 초점은 대상에 가 있지 않고 "사랑"(아가페)에 가 있었다. 

하나님사랑-이웃사랑은 결국 "사랑"(아가페)하라는 계명이다. 사랑에 방점이 찍히고 초점이 맞춰지면 사랑의 대상은 고정적이지 않다. 경계가 무너진다. 신과 인간의 경계를 넘어서고, 인종과 문화에 따라 그어 놓은 경계도 무너진다. 아가페 앞에서 "내 이웃"이 따로 있을 수 없다. 사랑의 마음은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는" 지경에까지 넓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내 이웃이냐?"는 율법교사의 질문은 "이웃 사랑"에서 "이웃"의 범위에는 관심갖지만 정작 "사랑"을 알지 못하는 수준이라는 것을 드러낼 뿐이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눅10:37) 하신 예수님의 마지막 권면은, 이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성경에서 "이웃"은 사랑의 대상이다. 그런데 아가페 사랑 속에 담겨 있는 고유한 능력 때문에 "이웃"의 범위는 고정적이지 않고 역동적으로 변해 온 것을 보았다. "이웃 사랑"에 관하여 말할 수 있는 하나는, 사랑하면 그가 누구든 이웃이 된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