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할 때나 성경 강의할 때 이런 질문을 많이 합니다. “성경 인물 중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누구지요?” 대답은 항상 아주 쉽게 나옵니다. “솔로몬이요!” 이 정답은 열왕기상 3-4장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 다음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그렇다면 인생의 쾌락과 향락을 가장 많이 맛 본 사람은 누굴까요?” 이 질문에도 어김없이 아주 쉽게 정답을 맞춥니다. “솔로몬이요!”
* 전도서 2장에 대한 전통적 해석
두번째 질문의 정답은 전도서 2장에 대한 해석을 기반으로 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 ‘정답’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 전도서의 저자로 여겨지는 “전도자(코헬렛)”가 솔로몬이라는 증거가 없습니다. 아주 오랜 기간 동안 솔로몬이 썼다고 믿어왔지만 그 굳건한 믿음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없습니다. 잠언과 아가서는 솔로몬의 저작이라고 명시되어 있지만(잠 1:1, 아 1:1), 전도서에는 솔로몬이라는 단어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물론 전도서를 솔로몬이 쓴 것처럼 보이게 하는 표현들이 나타나지만, 굳이 이름을 감추어야 할 이유 또한 없습니다.
그 다음 문제는 전도서 2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해석에 관한 문제입니다. 과연 전도서 2장은 솔로몬이 온갖 향락과 쾌락을 즐길 만큼 충분히 즐겨 놓고는, 젊은이들에게 ‘내가 다 놀아봤는데’ 신공을 시전하는 장면일까요?
전도서 2장은 방탕할 정도로 쾌락의 극단까지 경험한 전도자가 육체적 향락의 허무함과 덧없음을 토로하는 장면으로 이해되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낙을 누리리라(1절)”, “희락에 대하여 이르기를(2절),”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할까(3절)” 등의 표현과, 이후에 나오는 “인생들이 기뻐하는 처첩들을 많이 두었노라(8절)” 등의 구절들이 전도자가 세속적 쾌락을 추구한 것으로 인식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세속적 쾌락이 얼마나 덧없이 헛된 것인가를 가르치는 전도자의 말씀에 따라, 우리가 할 일을 세상 것을 바라보지 말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향해 24시간 시선을 고정시키는 일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이 무색하게도 전도서 2장은 전혀 이런 내용이 아닙니다.
* 심하(שִׂמְחָה)의 의미
전도서 2장은 전도자가 스스로를 2인칭으로 지칭하면서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가 시험삼아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보라 이것도 헛되도다” (전 1:1, 개역개정)
“내가 웃음에 관하여 말하여 이르기를 그것은 미친 것이라 하였고 희락에 대하여 이르기를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전 1:2, 개역개정)
이런 번역에 따르면 전도자가 세속적 향락과 육체적 쾌락을 추구했다는 해석이 그리 잘못된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1절의 “즐겁게 하리니”와 2절의 “희락에 대하여”에 쓰이는 원어는 심하(שִׂמְחָה)입니다. 이 단어는 잠언에서 좋은 것(선)이며 긍정적인 가치를 지닙니다.
“화평을 의논하는 자에게는 희락(심하)이 있느니라(잠 12:20)”
“정의를 행하는 것이 의인에게는 즐거움(심하)이요 죄인에게는 패망이니라(잠 21:15)”
잠언의 규범적 지혜의 관점에서 심하(즐거움, 희락)은 지혜자의 특질이자 의인에게 주어지는 보상입니다. 시편에서도 “주 앞에는 충만한 기쁨(심하)이 있고(시 16:11)”, “그가 영원토록 지극한 복을 받게 하시며 주 앞에서 기쁘고 즐겁게(심하) 하시나이다(시 21:6[7])” 등에서와 같이 기쁨과 즐거움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개역개정의 번역자는 동일한 단어인 심하를 잠언과 시편에서는 “즐거움(잠 21:15)”과 “기쁨(시 16:11)”으로, 그리고 전도서에서는 “희락(2절)”으로 번역했다는 사실입니다. 히브리어는 동일한 단어입니다.
1절의 “너는 낙을 누리라”에서 “낙”으로 번역된 단어는 또브(טוֹב)입니다. 아주 흔한 단어입니다. ‘선악’중에서 선(좋은 것)을 의미합니다.
“네가 공의와 정의와 정직 곧 모든 선한(또브) 길을 깨달을 것이라(잠 2:9)”
“지혜가 너를 선한(또브) 자의 길로 행하게 하며(잠 2:20)”
다시 한번 번역자의 이중 잣대가 의심됩니다. 잠언에서는 ‘선함’으로 번역된 단어를 전도서에서는 “낙”으로 번역했습니다. 덧붙여 말씀드리자면, 3절의 “어떤 것이 선한 일인지를”에도 또브가 쓰였습니다. 옛날 성경인 개역한글은 이 구절을 “어떤 것이 쾌락인지 알까 하여”로 번역했습니다만, 개정판은 히브리어 원문에 충실하게 “선한 일”로 수정하였습니다. 잘 '개정'했지만 왜 이 번역만 수정하고 다른 것들은 그대로 두었는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 웃음(세호끄 שְׂחוֹק)의 의미
금욕주의적 전통에서는 웃음과 음주는 별로 좋지 않은 것입니다. 사탄이 틈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것으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19세기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Charles Pierre Baudelaire, 1821-1867)의 “웃음의 본질(On the Essence of Laughter, 1855)”에서 웃음은 악마적 기원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 타락의 징표라고 주장합니다. 웃음의 기원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이브의 타락에 있으며, 이 타락은 악마의 계략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이죠. 물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창세기에는 이런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Il nome della rosa)”에서도 중세 수도원의 금욕주의의 대변자인 호르헤 신부는 보들레르와 유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소설 속에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편을 읽으려는 수도사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광신자로 나옵니다. 그 책은 아무도 읽어서는 안 되는 금서이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은 ‘웃음’을 교육적인 가치가 있는 것으로, 선을 지향하는 힘을 지닌 것으로 설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웃음은 “농부의 여흥거리”이고 “주정뱅이의 전유물”로서, “사악한 인간을 악마에 대한 두려움에서 해방”시키는 역할을 하는 나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성경은 보들레르나 호르헤 신부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웃음(세호끄 שְׂחוֹק)”은 규범적 지혜에서는 긍정적인 가치를 지닙니다. 욥의 반성적 지혜와는 대척점에 있는 빌닷은 “(하나님은) 웃음(세호끄)을 네 입에, 즐거운 소리를 네 입술에 채우시리니(욥 8:21)”라고 말합니다. 시편 126:2는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라고 표현하며 “웃음”과 “찬양”을 평행어로 취급합니다.
전도자가 추구하는 것은 육체적 쾌락이나 세속적 향락이 아닙니다. 오히려 규범적 지혜에서 정의하는 선한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4절 이후에 나오는 건축업과 포도농장(4절), 식목사업(5-6절) 등의 예는 선한 것을 열심히 뿌려 선한 열매를 맺는 경우들이지 결코 쾌락을 추구하는 삶을 묘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자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어떤 것이 선한 일인지(3절)” 알아보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 규범적 지혜(인과응보)의 선을 추구하는 전도자
‘뿌린 대로 거둔다’는 규범적 지혜의 원리에 따라 전도자는 선한 것으로 규정된 것들에 최선을 다합니다. 큰 사업을 벌이며 건축사업과 농장을 건설하죠. 4절의 집과 포도원, 그리고 5절의 동산과 과원, 6절의 못과 7절의 남녀 노비들, 종들은 모두 복수명사로 되어 있습니다. 집 한 채가 아니라 여러 채이며, 포도원과 과수원 등의 부동산도 한 두개가 아니라는 것이죠. 집합명사라서 따로 복수형태를 쓰지 않는 소떼와 양떼의 경우 ‘많이(하르베 הַרְבֶּה)’라는 부사가 첨가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일반인은 범접하기 어려운 크기의 재산과 사업이라는 점, 전도자의 소유가 그 이전의 누구보다 많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함입니다. 전도자는 식목사업의 번창을 위해 저수지를 건설하여 나무에 물을 제공합니다(6절). 나무가 잘 자라도록 물을 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행동입니다. 굳이 설명할 필요조차 없는 ‘당연한’ 행위를 묘사하는 이유는 바로 심은 대로 거두는 인과응보의 원칙에 따라 사업을 진행하였음을 나타내고자 하는 의도입니다. 물을 잘 제공받은 나무가 잘 자라는 것은 당연하죠.
이 결과로 전도자는 그 이전의 어느 누구보다 더 많은 재산을 얻게 됩니다(7-8절). “소와 양 떼”(7절), “은 금과 왕들이 소유한 보배”와 “노래하는 남녀들”과 “처첩들”(8절)을 열거하는 목적은 전도자의 소유가 보통사람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수준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전도자가 이러한 소유를 얻게 된 것은 인과응보 원칙에 따른 당연한 결과입니다. 규범적 지혜의 선을 극단까지 추구한 결과로 전도자는 선한 열매들을 맺게 됩니다. 그 열매들이 지혜의 결과물임을 전도자는 이렇게 표현한다: “내 지혜도 내게 여전하도다(9절).”
* 전도서 2장의 반성적 지혜
전도서는 뿌린 대로 거두는 인과응보 원리 자체가 잘못 되었다고 공격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인생에 한정해서 보면 규범적 지혜의 원리가 작동하는 수많은 예가 있습니다. 좋은 것을 뿌리면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것을 심으면 나쁜 열매를 맺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전도자 스스로도 2장에서 선한 것을 최선을 다해 추구해서 결국 선한 결과를 얻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전도서의 지혜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관점을 아주 긴 시간으로 확장해 보는 것이 전도서의 반성적 지혜의 핵심입니다. 한 사람의 인생이 아니라 몇 세대에 걸친 긴 시간의 호흡으로 보자는 것입니다. 한 인간의 삶이란 그리 길지 않은 것이고, 열심히 일해서 얻은 모든 것마저 이 세상에 잠시 있다 사라지는 것(헤벨 הֶבֶל)일 뿐입니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는 아무 것도 남아 있는 것(이트론 יִתְרוֹן)이 없을 것이라는 고통스러운 깨달음입니다.
전도서 2장을 쉽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열심히 일해 좋은 결과를 얻었다고 치자. 거기까지는 인과응보의 원칙이 작동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죽을 것이고 내가 일궈낸 것은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18절). 그 후손은 자기가 스스로 일구지 않은 것을 물려받은 것이므로 '뿌린 대로 거둔다'는 원칙이 적용될 수 없다. 그런데 그 후손이 멍청한 놈일 수도 있다(19절). 멍청한 놈이 많은 재물을 상속받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인과응보의 원리가 적용되지 않는 것이다.
전도서의 이야기는 그리 어려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신학적 선입견’이나 ‘신앙의 렌즈’를 거쳐 읽으려니 그 어렵지 않은 이야기가 어려운 이야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설교할 때나 성경 강의할 때 이런 질문을 많이 합니다. “성경 인물 중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누구지요?” 대답은 항상 아주 쉽게 나옵니다. “솔로몬이요!” 이 정답은 열왕기상 3-4장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 다음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그렇다면 인생의 쾌락과 향락을 가장 많이 맛 본 사람은 누굴까요?” 이 질문에도 어김없이 아주 쉽게 정답을 맞춥니다. “솔로몬이요!”
* 전도서 2장에 대한 전통적 해석
두번째 질문의 정답은 전도서 2장에 대한 해석을 기반으로 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 ‘정답’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 전도서의 저자로 여겨지는 “전도자(코헬렛)”가 솔로몬이라는 증거가 없습니다. 아주 오랜 기간 동안 솔로몬이 썼다고 믿어왔지만 그 굳건한 믿음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없습니다. 잠언과 아가서는 솔로몬의 저작이라고 명시되어 있지만(잠 1:1, 아 1:1), 전도서에는 솔로몬이라는 단어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물론 전도서를 솔로몬이 쓴 것처럼 보이게 하는 표현들이 나타나지만, 굳이 이름을 감추어야 할 이유 또한 없습니다.
그 다음 문제는 전도서 2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해석에 관한 문제입니다. 과연 전도서 2장은 솔로몬이 온갖 향락과 쾌락을 즐길 만큼 충분히 즐겨 놓고는, 젊은이들에게 ‘내가 다 놀아봤는데’ 신공을 시전하는 장면일까요?
전도서 2장은 방탕할 정도로 쾌락의 극단까지 경험한 전도자가 육체적 향락의 허무함과 덧없음을 토로하는 장면으로 이해되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낙을 누리리라(1절)”, “희락에 대하여 이르기를(2절),”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할까(3절)” 등의 표현과, 이후에 나오는 “인생들이 기뻐하는 처첩들을 많이 두었노라(8절)” 등의 구절들이 전도자가 세속적 쾌락을 추구한 것으로 인식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세속적 쾌락이 얼마나 덧없이 헛된 것인가를 가르치는 전도자의 말씀에 따라, 우리가 할 일을 세상 것을 바라보지 말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향해 24시간 시선을 고정시키는 일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이 무색하게도 전도서 2장은 전혀 이런 내용이 아닙니다.
* 심하(שִׂמְחָה)의 의미
전도서 2장은 전도자가 스스로를 2인칭으로 지칭하면서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가 시험삼아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보라 이것도 헛되도다” (전 1:1, 개역개정)
“내가 웃음에 관하여 말하여 이르기를 그것은 미친 것이라 하였고 희락에 대하여 이르기를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전 1:2, 개역개정)
이런 번역에 따르면 전도자가 세속적 향락과 육체적 쾌락을 추구했다는 해석이 그리 잘못된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1절의 “즐겁게 하리니”와 2절의 “희락에 대하여”에 쓰이는 원어는 심하(שִׂמְחָה)입니다. 이 단어는 잠언에서 좋은 것(선)이며 긍정적인 가치를 지닙니다.
“화평을 의논하는 자에게는 희락(심하)이 있느니라(잠 12:20)”
“정의를 행하는 것이 의인에게는 즐거움(심하)이요 죄인에게는 패망이니라(잠 21:15)”
잠언의 규범적 지혜의 관점에서 심하(즐거움, 희락)은 지혜자의 특질이자 의인에게 주어지는 보상입니다. 시편에서도 “주 앞에는 충만한 기쁨(심하)이 있고(시 16:11)”, “그가 영원토록 지극한 복을 받게 하시며 주 앞에서 기쁘고 즐겁게(심하) 하시나이다(시 21:6[7])” 등에서와 같이 기쁨과 즐거움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개역개정의 번역자는 동일한 단어인 심하를 잠언과 시편에서는 “즐거움(잠 21:15)”과 “기쁨(시 16:11)”으로, 그리고 전도서에서는 “희락(2절)”으로 번역했다는 사실입니다. 히브리어는 동일한 단어입니다.
1절의 “너는 낙을 누리라”에서 “낙”으로 번역된 단어는 또브(טוֹב)입니다. 아주 흔한 단어입니다. ‘선악’중에서 선(좋은 것)을 의미합니다.
“네가 공의와 정의와 정직 곧 모든 선한(또브) 길을 깨달을 것이라(잠 2:9)”
“지혜가 너를 선한(또브) 자의 길로 행하게 하며(잠 2:20)”
다시 한번 번역자의 이중 잣대가 의심됩니다. 잠언에서는 ‘선함’으로 번역된 단어를 전도서에서는 “낙”으로 번역했습니다. 덧붙여 말씀드리자면, 3절의 “어떤 것이 선한 일인지를”에도 또브가 쓰였습니다. 옛날 성경인 개역한글은 이 구절을 “어떤 것이 쾌락인지 알까 하여”로 번역했습니다만, 개정판은 히브리어 원문에 충실하게 “선한 일”로 수정하였습니다. 잘 '개정'했지만 왜 이 번역만 수정하고 다른 것들은 그대로 두었는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 웃음(세호끄 שְׂחוֹק)의 의미
금욕주의적 전통에서는 웃음과 음주는 별로 좋지 않은 것입니다. 사탄이 틈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것으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19세기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Charles Pierre Baudelaire, 1821-1867)의 “웃음의 본질(On the Essence of Laughter, 1855)”에서 웃음은 악마적 기원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 타락의 징표라고 주장합니다. 웃음의 기원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이브의 타락에 있으며, 이 타락은 악마의 계략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이죠. 물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창세기에는 이런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Il nome della rosa)”에서도 중세 수도원의 금욕주의의 대변자인 호르헤 신부는 보들레르와 유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소설 속에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편을 읽으려는 수도사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광신자로 나옵니다. 그 책은 아무도 읽어서는 안 되는 금서이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은 ‘웃음’을 교육적인 가치가 있는 것으로, 선을 지향하는 힘을 지닌 것으로 설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웃음은 “농부의 여흥거리”이고 “주정뱅이의 전유물”로서, “사악한 인간을 악마에 대한 두려움에서 해방”시키는 역할을 하는 나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성경은 보들레르나 호르헤 신부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웃음(세호끄 שְׂחוֹק)”은 규범적 지혜에서는 긍정적인 가치를 지닙니다. 욥의 반성적 지혜와는 대척점에 있는 빌닷은 “(하나님은) 웃음(세호끄)을 네 입에, 즐거운 소리를 네 입술에 채우시리니(욥 8:21)”라고 말합니다. 시편 126:2는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라고 표현하며 “웃음”과 “찬양”을 평행어로 취급합니다.
전도자가 추구하는 것은 육체적 쾌락이나 세속적 향락이 아닙니다. 오히려 규범적 지혜에서 정의하는 선한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4절 이후에 나오는 건축업과 포도농장(4절), 식목사업(5-6절) 등의 예는 선한 것을 열심히 뿌려 선한 열매를 맺는 경우들이지 결코 쾌락을 추구하는 삶을 묘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자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어떤 것이 선한 일인지(3절)” 알아보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 규범적 지혜(인과응보)의 선을 추구하는 전도자
‘뿌린 대로 거둔다’는 규범적 지혜의 원리에 따라 전도자는 선한 것으로 규정된 것들에 최선을 다합니다. 큰 사업을 벌이며 건축사업과 농장을 건설하죠. 4절의 집과 포도원, 그리고 5절의 동산과 과원, 6절의 못과 7절의 남녀 노비들, 종들은 모두 복수명사로 되어 있습니다. 집 한 채가 아니라 여러 채이며, 포도원과 과수원 등의 부동산도 한 두개가 아니라는 것이죠. 집합명사라서 따로 복수형태를 쓰지 않는 소떼와 양떼의 경우 ‘많이(하르베 הַרְבֶּה)’라는 부사가 첨가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일반인은 범접하기 어려운 크기의 재산과 사업이라는 점, 전도자의 소유가 그 이전의 누구보다 많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함입니다. 전도자는 식목사업의 번창을 위해 저수지를 건설하여 나무에 물을 제공합니다(6절). 나무가 잘 자라도록 물을 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행동입니다. 굳이 설명할 필요조차 없는 ‘당연한’ 행위를 묘사하는 이유는 바로 심은 대로 거두는 인과응보의 원칙에 따라 사업을 진행하였음을 나타내고자 하는 의도입니다. 물을 잘 제공받은 나무가 잘 자라는 것은 당연하죠.
이 결과로 전도자는 그 이전의 어느 누구보다 더 많은 재산을 얻게 됩니다(7-8절). “소와 양 떼”(7절), “은 금과 왕들이 소유한 보배”와 “노래하는 남녀들”과 “처첩들”(8절)을 열거하는 목적은 전도자의 소유가 보통사람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수준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전도자가 이러한 소유를 얻게 된 것은 인과응보 원칙에 따른 당연한 결과입니다. 규범적 지혜의 선을 극단까지 추구한 결과로 전도자는 선한 열매들을 맺게 됩니다. 그 열매들이 지혜의 결과물임을 전도자는 이렇게 표현한다: “내 지혜도 내게 여전하도다(9절).”
* 전도서 2장의 반성적 지혜
전도서는 뿌린 대로 거두는 인과응보 원리 자체가 잘못 되었다고 공격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인생에 한정해서 보면 규범적 지혜의 원리가 작동하는 수많은 예가 있습니다. 좋은 것을 뿌리면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것을 심으면 나쁜 열매를 맺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전도자 스스로도 2장에서 선한 것을 최선을 다해 추구해서 결국 선한 결과를 얻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전도서의 지혜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관점을 아주 긴 시간으로 확장해 보는 것이 전도서의 반성적 지혜의 핵심입니다. 한 사람의 인생이 아니라 몇 세대에 걸친 긴 시간의 호흡으로 보자는 것입니다. 한 인간의 삶이란 그리 길지 않은 것이고, 열심히 일해서 얻은 모든 것마저 이 세상에 잠시 있다 사라지는 것(헤벨 הֶבֶל)일 뿐입니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는 아무 것도 남아 있는 것(이트론 יִתְרוֹן)이 없을 것이라는 고통스러운 깨달음입니다.
전도서 2장을 쉽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열심히 일해 좋은 결과를 얻었다고 치자. 거기까지는 인과응보의 원칙이 작동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죽을 것이고 내가 일궈낸 것은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18절). 그 후손은 자기가 스스로 일구지 않은 것을 물려받은 것이므로 '뿌린 대로 거둔다'는 원칙이 적용될 수 없다. 그런데 그 후손이 멍청한 놈일 수도 있다(19절). 멍청한 놈이 많은 재물을 상속받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인과응보의 원리가 적용되지 않는 것이다.
전도서의 이야기는 그리 어려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신학적 선입견’이나 ‘신앙의 렌즈’를 거쳐 읽으려니 그 어렵지 않은 이야기가 어려운 이야기가 되어 버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