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제 전성 시대
기계를 통한 대량 생산이 시작된 후, "손으로" 만든 수제품은 귀한 취급을 받아 왔다. 어느 TV 드라마에서 "이태리 장인이 한 땀 한 땀 수 놓은 추리닝"을 자랑한 주인공의 대사가 보여주듯, "손으로 한 땀 한 땀" 만든 수제품은 특별한 개성을 담고 있는 제품으로 대접받아 왔다. 공산품뿐만 아니라, 음식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김치, 고추장, 맥주, 햄버거 앞에 "수제"를 붙이면, 기계로 대량 생산하지 않고 사람의 정성과 손맛이 들어갔다는 점을 강조하는 표현이 된다. "고급진"을 뜻하는 gourmet와 동의어처럼 사용된다.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 만든
신약성경에도 "손으로 만든"이라는 표현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손으로 만든"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χειροποίητος(케이로포이에토스)이다. "손"을 의미하는 χείρ(케이르)와 "만들다"를 뜻하는 ποιέω(포이에오)가 합쳐진 합성어이다. 그러나, 요즘의 용례와는 반대로, 성경에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이라는 표현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기계가 찍어낸"과 대조되는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과 대조되는 표현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에베소서 2장에서는 그리스도인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 받은 사람이며(5, 8절), 나아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만드신 . . . 하나님의 작품"(10절)이라고 소개한다. 반면, 같은 장에서 유대 할례자들에 대해서는 "손으로 행한 할례를 받았다고 뽐내는" 사람들(11절)이라고 부르는데, 이 레토릭 안에 "하나님이 만드신"과 "사람이 만든" 사이의 대조가 빛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우상
"하나님이 지으신"과 대조되는 의미를 담고 있는 χειροποίητος(케이로포이에토스)는 우상을 지칭하는 언어로 사용된다. 그리스어 용례를 구약 위경 중 하나인 Sibylline Oracles의 14권 62절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구절은 금과 은으로 만들어진 성전의 신상들이 큰 불에 녹아내리고, 녹아내린 금과 은으로 금화 은화를 만들어 승리를 위해 싸운 군대에 나눠주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다. 여기서 "성전의 신상들"을 "사람 손으로 만든"이 수식하고 있다. 그 표현은 이렇다. ναῶν ἱδρύματα χειροποιήτων(나온 히드뤼마타 케이로포이에톤). 아무리 거룩하다 주장해 온 성전 신상들이지만, "사람 손으로 만든" 것이니 불에 녹아 내리는 것이고, 우상에 불과하다. (참고로 Sibylline Oracles 14권에 나오는 신탁은 이스라엘에 대한 것이 아니라 로마제국에 대한 것으로 추정한다.)
신약에서 "손으로 만든"이 우상에 대해 사용된 용례는 사도행전 7장에 나오는 스데반 집사의 연설 중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요약해 가던 스데반 집사는 아론의 금송아지 사건을 언급하며 "자신들이 손으로 만든 것(τοῖς ἔργοις τῶν χειρῶν αὐτῶν 토이스 에르고이스 톤 케이론 아우톤)을 두고 즐거워하였다"(41절)고 언급한다. 여기서 사용된 단어가 정확히 케이로포이에토스는 아니지만, 이 단어를 의미대로 풀어쓴 표현이다.
반 성전 레토릭
케이로포이에토스가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는 곳은 반 성전(좀 더 온건히 말하자면 탈 성전) 레토릭에서이다. '성전을 거룩하다고들 하지만, 성전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이 아니라 사람 손으로 지은 것에 불과하다'는 레토릭 말이다.
예수님께서 실제 이 말씀을 하신 것인지, 그런 협의만 받은 것인지 확정하기 어렵지만, 예수님께서 대제사장과 의회 앞에 섰을 때 당한 고소의 내용은 이와 같다.
'“우리가 이 사람이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내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허물고, 손으로 짓지 않은 다른 성전을 사흘만에 세우겠다’ 하였습니다.” (막 14:58)
이 고소 내용과 가장 가까운 예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에서 찾을 수 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 . . . 예수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자기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요한복음 2:19, 21)
고소하는 자들이 예수님의 발언을 왜곡하여 고소한 것이라면, 그 왜곡의 내용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성전"이라는 표현을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이라고 바꾼 것이다. 여기서도 "사람의 손으로 지은"이라는 표현은 몹시 부정적인 함의가 있어, 그렇게 말하는 것 자체가 반 성전 선동으로 고발 거리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히브리서 9장에는 케이로포이에토스를 통하여 기존 예루살렘 성전의 배타적 기득권에 도전하는 사상이 드러나 있다.
11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일어난 좋은 일을 주관하시는 대제사장으로 오셔서 손으로 만들지 않은 장막, 다시 말하면, 이 피조물에 속하지 않은 더 크고 더 완전한 장막을 통과하여 12단 한 번에 지성소에 들어가셨습니다.
24 그리스도께서는 참 성소의 모형에 지나지 않는,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바로 하늘 성소 그 자체에 들어가셨습니다.
히브리서의 주장은 선명하고 선동적이다. 예루살렘 성전은 "사람이 손으로 지은" 성전에 불과하다! 이제는 "사람의 손으로 만들지 않은" "더 크고 더 완전한" 장막의 시대가 열렸다! "손으로 만든 성소"는 "참 성소의 모형"에 불과할 뿐이고, 사람 손으로 짓지 않은 성소인 "하늘 성소"가 참 성소이다! 이처럼 히브리서는, 당시 가장 거룩하고 힘 있는 공간이었던 예루살렘 성전을 케이로포이에토스라는 단어 하나로 의미 없고 무력한 공간으로 만들어 버린다.
케이로포이에토스는 스데반 집사의 순교 이유이기도 하다. 그의 연설이 제법 길고, 연설 전반부 내용이 구약의 역사를 요약하는 단조로운 내용이다 보니, 스데반이 죽임당한 이유를 정확히 짚어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스데반 집사는, 예수님이 그러하셨듯이, 성전에 도전하다가 죽임당한 것이다.
스데반 집사의 공의회 연설에서 반 성전과 관련된 부분을 일별하면 다음과 같다.
- 성막을 통해 함께 하신 하나님: 광야 시대 하나님은 성막을 통하여 이스라엘과 동행하셨다. "성전 안에 계시기" 오래전부터 우리 삶 속에 함께 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성전에 좌정하고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행진하신 분이시다. (사도행전 7:44-45)
- 이사야 예언 인용: 예언서에는 성전 비판 예언이 많지만, 그중 이사야서 66장 1절 이하가 가장 신랄하다. 스데반 집사는 이 예언을 인용하며(49-50절),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손수 지으신 하늘과 땅, 온 우주 가운데 계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스데반 집사가 이 예언을 인용하였을 때 산헤드린에 모인 사람들은 이사야서 그다음 구절(66:3)의 신랄함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제사장들은 거룩한척 하지만 사람을 죽이는 자들이고, 우상숭배 하는 자들이다.
- 케이로포이에토스: 솔로몬이 성전을 지은 사실을 말한 후, 스데반 집사는 분명하게 선언한다. "그런데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건물 안에 거하지 않으십니다."(행7:48) 바로 앞 41절에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송아지 앞에서 기뻐한 이스라엘 조상들을 비판한 다음, 이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선언한 것이다. 무슨 말인가? 예루살렘 성전도 결국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우상 같은 존재에 불과할 뿐이라는 간접적 선언이다.
그러니,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 죽임당하였다. 그는 그 죽음을 피할 수 있었지만, 순교자의 정신으로 자신의 피를 흘리며 선언하였다. 하나님은 성전에 계시지 않는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세례자 요한의 죽음, 예수님의 죽음, 스데반 집사의 죽음. 이렇게 이어지는 죽음의 대의는 모두 같다. 성전에 대항하였기 때문에 죽임당한 것이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성전에 하나님이 계신다고 혹세무민하고, 성전을 통하여 하나님의 대리자 행세를 하며 온갖 세상 것을 누리고, 사실은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해 강도질을 일삼아 "기도하는 집"인 성전을 "강도의 소굴"(막 11:17)로 만든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이 세 죽음의 이유이다. 유대교 껍데기를 깨고 나온 초기 기독교 운동이 이 세 순교를 통하여 진보하였다는 것을 안다면, 기독교는 하나님을 독점하고, 그의 정의와 거룩을 독점한 성전 지배 세력에 대한 항거를 통하여 일어서게 되었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오늘의 기독교는 어떠한가? 성경적 진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전 중심, 건물 중심의 신앙을 버리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성전은 χειροποίητος(케이로포이에토스), 사람 손으로 지은 건물일 뿐이다! 우상의 역할을 한다! 순교자 스데반의 피의 외침에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럼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지금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고, 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서 완성된 것입니다.(요일 4:12)
마지막으로 사족을 붙인다. "사람 손으로 만든"이라는 표현이 늘 그렇게 부정적으로 사용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Philo의 <모세의 생애> 2권 88절을 보면, 하나님을 위하여 성소를 짓는 모세를 묘사하면서, 그 성소를 ἱερὸν χειροποίητον(히에론 케이로포이에톤)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소"라고 하였다. 이때 케이로포이에톤은 정성스럽고 섬세하게 지었다는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수제 전성 시대
기계를 통한 대량 생산이 시작된 후, "손으로" 만든 수제품은 귀한 취급을 받아 왔다. 어느 TV 드라마에서 "이태리 장인이 한 땀 한 땀 수 놓은 추리닝"을 자랑한 주인공의 대사가 보여주듯, "손으로 한 땀 한 땀" 만든 수제품은 특별한 개성을 담고 있는 제품으로 대접받아 왔다. 공산품뿐만 아니라, 음식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김치, 고추장, 맥주, 햄버거 앞에 "수제"를 붙이면, 기계로 대량 생산하지 않고 사람의 정성과 손맛이 들어갔다는 점을 강조하는 표현이 된다. "고급진"을 뜻하는 gourmet와 동의어처럼 사용된다.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 만든
신약성경에도 "손으로 만든"이라는 표현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손으로 만든"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χειροποίητος(케이로포이에토스)이다. "손"을 의미하는 χείρ(케이르)와 "만들다"를 뜻하는 ποιέω(포이에오)가 합쳐진 합성어이다. 그러나, 요즘의 용례와는 반대로, 성경에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이라는 표현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기계가 찍어낸"과 대조되는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과 대조되는 표현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에베소서 2장에서는 그리스도인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 받은 사람이며(5, 8절), 나아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만드신 . . . 하나님의 작품"(10절)이라고 소개한다. 반면, 같은 장에서 유대 할례자들에 대해서는 "손으로 행한 할례를 받았다고 뽐내는" 사람들(11절)이라고 부르는데, 이 레토릭 안에 "하나님이 만드신"과 "사람이 만든" 사이의 대조가 빛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우상
"하나님이 지으신"과 대조되는 의미를 담고 있는 χειροποίητος(케이로포이에토스)는 우상을 지칭하는 언어로 사용된다. 그리스어 용례를 구약 위경 중 하나인 Sibylline Oracles의 14권 62절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구절은 금과 은으로 만들어진 성전의 신상들이 큰 불에 녹아내리고, 녹아내린 금과 은으로 금화 은화를 만들어 승리를 위해 싸운 군대에 나눠주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다. 여기서 "성전의 신상들"을 "사람 손으로 만든"이 수식하고 있다. 그 표현은 이렇다. ναῶν ἱδρύματα χειροποιήτων(나온 히드뤼마타 케이로포이에톤). 아무리 거룩하다 주장해 온 성전 신상들이지만, "사람 손으로 만든" 것이니 불에 녹아 내리는 것이고, 우상에 불과하다. (참고로 Sibylline Oracles 14권에 나오는 신탁은 이스라엘에 대한 것이 아니라 로마제국에 대한 것으로 추정한다.)
신약에서 "손으로 만든"이 우상에 대해 사용된 용례는 사도행전 7장에 나오는 스데반 집사의 연설 중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요약해 가던 스데반 집사는 아론의 금송아지 사건을 언급하며 "자신들이 손으로 만든 것(τοῖς ἔργοις τῶν χειρῶν αὐτῶν 토이스 에르고이스 톤 케이론 아우톤)을 두고 즐거워하였다"(41절)고 언급한다. 여기서 사용된 단어가 정확히 케이로포이에토스는 아니지만, 이 단어를 의미대로 풀어쓴 표현이다.
반 성전 레토릭
케이로포이에토스가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는 곳은 반 성전(좀 더 온건히 말하자면 탈 성전) 레토릭에서이다. '성전을 거룩하다고들 하지만, 성전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이 아니라 사람 손으로 지은 것에 불과하다'는 레토릭 말이다.
예수님께서 실제 이 말씀을 하신 것인지, 그런 협의만 받은 것인지 확정하기 어렵지만, 예수님께서 대제사장과 의회 앞에 섰을 때 당한 고소의 내용은 이와 같다.
'“우리가 이 사람이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내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허물고, 손으로 짓지 않은 다른 성전을 사흘만에 세우겠다’ 하였습니다.” (막 14:58)
이 고소 내용과 가장 가까운 예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에서 찾을 수 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 . . . 예수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자기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요한복음 2:19, 21)
고소하는 자들이 예수님의 발언을 왜곡하여 고소한 것이라면, 그 왜곡의 내용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성전"이라는 표현을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이라고 바꾼 것이다. 여기서도 "사람의 손으로 지은"이라는 표현은 몹시 부정적인 함의가 있어, 그렇게 말하는 것 자체가 반 성전 선동으로 고발 거리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히브리서 9장에는 케이로포이에토스를 통하여 기존 예루살렘 성전의 배타적 기득권에 도전하는 사상이 드러나 있다.
11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일어난 좋은 일을 주관하시는 대제사장으로 오셔서 손으로 만들지 않은 장막, 다시 말하면, 이 피조물에 속하지 않은 더 크고 더 완전한 장막을 통과하여 12단 한 번에 지성소에 들어가셨습니다.
24 그리스도께서는 참 성소의 모형에 지나지 않는,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바로 하늘 성소 그 자체에 들어가셨습니다.
히브리서의 주장은 선명하고 선동적이다. 예루살렘 성전은 "사람이 손으로 지은" 성전에 불과하다! 이제는 "사람의 손으로 만들지 않은" "더 크고 더 완전한" 장막의 시대가 열렸다! "손으로 만든 성소"는 "참 성소의 모형"에 불과할 뿐이고, 사람 손으로 짓지 않은 성소인 "하늘 성소"가 참 성소이다! 이처럼 히브리서는, 당시 가장 거룩하고 힘 있는 공간이었던 예루살렘 성전을 케이로포이에토스라는 단어 하나로 의미 없고 무력한 공간으로 만들어 버린다.
케이로포이에토스는 스데반 집사의 순교 이유이기도 하다. 그의 연설이 제법 길고, 연설 전반부 내용이 구약의 역사를 요약하는 단조로운 내용이다 보니, 스데반이 죽임당한 이유를 정확히 짚어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스데반 집사는, 예수님이 그러하셨듯이, 성전에 도전하다가 죽임당한 것이다.
스데반 집사의 공의회 연설에서 반 성전과 관련된 부분을 일별하면 다음과 같다.
그러니,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 죽임당하였다. 그는 그 죽음을 피할 수 있었지만, 순교자의 정신으로 자신의 피를 흘리며 선언하였다. 하나님은 성전에 계시지 않는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세례자 요한의 죽음, 예수님의 죽음, 스데반 집사의 죽음. 이렇게 이어지는 죽음의 대의는 모두 같다. 성전에 대항하였기 때문에 죽임당한 것이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성전에 하나님이 계신다고 혹세무민하고, 성전을 통하여 하나님의 대리자 행세를 하며 온갖 세상 것을 누리고, 사실은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해 강도질을 일삼아 "기도하는 집"인 성전을 "강도의 소굴"(막 11:17)로 만든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이 세 죽음의 이유이다. 유대교 껍데기를 깨고 나온 초기 기독교 운동이 이 세 순교를 통하여 진보하였다는 것을 안다면, 기독교는 하나님을 독점하고, 그의 정의와 거룩을 독점한 성전 지배 세력에 대한 항거를 통하여 일어서게 되었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오늘의 기독교는 어떠한가? 성경적 진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전 중심, 건물 중심의 신앙을 버리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성전은 χειροποίητος(케이로포이에토스), 사람 손으로 지은 건물일 뿐이다! 우상의 역할을 한다! 순교자 스데반의 피의 외침에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럼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지금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고, 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서 완성된 것입니다.(요일 4:12)
마지막으로 사족을 붙인다. "사람 손으로 만든"이라는 표현이 늘 그렇게 부정적으로 사용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Philo의 <모세의 생애> 2권 88절을 보면, 하나님을 위하여 성소를 짓는 모세를 묘사하면서, 그 성소를 ἱερὸν χειροποίητον(히에론 케이로포이에톤)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소"라고 하였다. 이때 케이로포이에톤은 정성스럽고 섬세하게 지었다는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