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에서도 강조되는 것은 '담대함'이다. 이 담대함을 표현하는 동사가 θαρσέω(타르세오)이다(마 9:2, 22; 14:27; 막 6:50; 10:49; 요 16:33; 행 23:11). 이 단어의 다른 형태의 동사는 θαρρέω(타레오)이다(고후 5:6, 8; 7:16; 10:1; 히 13:6). 전자의 동사가 좀더 오래된 형태이다. 이 동사를 한글성경은 '담대하다’ '안심하다’ 라고 번역하고 있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은 동사 θαρσέω(타르세오)를 사용하는 반면에, 바울과 히브리서 저자는 θαρρέω(타레오)를 사용하고 있다. 이 두 동사를 신약성경의 저자가 선택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음운학적인 알파벳 변화에 기인하여 다른 철자를 가질 뿐이지 같은 동사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θαρσέω(타르세오)를 사용하는 복음서 저자는 예수의 입술을 통하여 이 단어를 사용한다. 침상 위에 누운 채로 친구들에 의해 예수 앞에 나온 중풍병자에게 예수는 “작은 자야, 안심하라(타르세이θάρσει)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 9:2)고 동사 θαρσέω(타르세오)의 명령형으로 선포하고 있다. 이때의 의미는 힘내라(be cheerful), 안심하라(take heart), 담대하라(be bold)라고 할 수 있다. 마태복음 저자는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인이 예수의 옷자락을 만짐으로 고침을 기대할 때에, 예수의 입술에서 다시 한 번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딸아, 안심하라(타르세이θάρσει) 네 믿음이 너를 구워하였다”(마 9:22).
마가복음은 갈릴리 호수에서 거친 풍랑을 만나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주님이 바다 위를 걸어서 다가서면서 이 동사로 선포한다: "안심하라(타르세이테θαρσεῖτε),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막 6:50). 여리고 길가의 맹인 바디매오가 예수님으로부터 긍휼을 구하며 소리칠 때에, 제자들이 바디매오에게 “안심하고(타르세이θάρσει)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막 10:49) 고 말한다. 제자들의 입술이지만 여기에서도 예수가 바디매오를 부르신다는 말을 전달함으로 안심시키는 주체가 예수인 것을 드러내고 있다.
고난을 기다리며 예루살렘의 밤, 마지막 만찬에서 선포하는 예수의 긴 담화 속에는 세상의 궁극적 승리자로서 자신의 존재를 제자들에게 선포할 때에도 이 단어를 사용한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니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타르세이테θαρσεῖτε)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누가복음-사도행전의 저자는 예루살렘 로마군대의 영내 감옥에 갇힌 바울에게 주님이 나타나시고 말씀하신 것을 기록하고 있다: "담대하라(타르세이θάρσει),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행 23:11). 복음서의 저자들은 적어도 예수의 입술에서 나오는 동사 θαρσέω(타르세오)를 인생의 구원자이고 치료자이신 주님의 존재를 부각시키기위해 특별하게 사용한다. 예수는 안심시키고 담대하게 해 주는 존재로서 중병병자가 고침과 죄 사함을 받게 하고, 혈루증의 여인이 고침과 구원함을 받게 하고, 풍랑 속에 있는 제자들이 죽음의 두려움을 떨쳐내게 하고, 맹인이 보게 되고 구원받게 하며, 다가오는 고난을 기다리는 제자들에게 평안을 주며, 감옥에 갇혀 고난을 당하는 복음전도자를 보호하고 인도하는 존재인 것이다.
바울은 자신의 담대함을 고린도 교인들에게 여러 차례 언급하였다. 비록 육신으로 사는 것이 주님과 떨어져 있는 것이지만, 성령의 역사 가운데 믿음으로 살기에 바울은 언제나 담대하다(타룬테스Θαρροῦντες)고 고백한다(고후 5:6). 바울은 이 단어를 '신뢰'(trust)의 의미로서 또한 사용하는데, 동역자 디도를 따뜻한 마음으로 환영해 준 고린도 교인들을 모든 일에 신뢰한다(타로θαρρῶ)고 말한다(고후 7:16). 주님에 대한 신뢰에서 담대함을 가지게 되고(히 13:6), 교인의 변함 없는 사랑 때문에 담대함을 가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는 담대함은 구세주, 치료자, 보호자가 되시는 주님에 대한 신뢰에서 오는 열매이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주눅들고 있는 일상에서 우리는 다시 담대함을 회복해야 한다. 단순히 백신이나 치료제가 주는 담대함이 아니라, 세상의 구세주와 인생의 주인 되시는 예수의 존재를 신뢰함으로 오는 담대함이다. 중풍병자, 병든 여인, 거친 풍랑 속에 있고 고난을 기다리는 제자들, 감옥에 갇혀 죽을지도 모르는 복음전도자 등, 인생이 어떤 모양, 어떤 처지이든지, 안심하라 담대하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을 신뢰함으로 오는 담대함이다. 그것은 믿음의 회복이 주는 담대함인 것이다.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에서도 강조되는 것은 '담대함'이다. 이 담대함을 표현하는 동사가 θαρσέω(타르세오)이다(마 9:2, 22; 14:27; 막 6:50; 10:49; 요 16:33; 행 23:11). 이 단어의 다른 형태의 동사는 θαρρέω(타레오)이다(고후 5:6, 8; 7:16; 10:1; 히 13:6). 전자의 동사가 좀더 오래된 형태이다. 이 동사를 한글성경은 '담대하다’ '안심하다’ 라고 번역하고 있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은 동사 θαρσέω(타르세오)를 사용하는 반면에, 바울과 히브리서 저자는 θαρρέω(타레오)를 사용하고 있다. 이 두 동사를 신약성경의 저자가 선택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음운학적인 알파벳 변화에 기인하여 다른 철자를 가질 뿐이지 같은 동사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θαρσέω(타르세오)를 사용하는 복음서 저자는 예수의 입술을 통하여 이 단어를 사용한다. 침상 위에 누운 채로 친구들에 의해 예수 앞에 나온 중풍병자에게 예수는 “작은 자야, 안심하라(타르세이θάρσει)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 9:2)고 동사 θαρσέω(타르세오)의 명령형으로 선포하고 있다. 이때의 의미는 힘내라(be cheerful), 안심하라(take heart), 담대하라(be bold)라고 할 수 있다. 마태복음 저자는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인이 예수의 옷자락을 만짐으로 고침을 기대할 때에, 예수의 입술에서 다시 한 번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딸아, 안심하라(타르세이θάρσει) 네 믿음이 너를 구워하였다”(마 9:22).
마가복음은 갈릴리 호수에서 거친 풍랑을 만나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주님이 바다 위를 걸어서 다가서면서 이 동사로 선포한다: "안심하라(타르세이테θαρσεῖτε),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막 6:50). 여리고 길가의 맹인 바디매오가 예수님으로부터 긍휼을 구하며 소리칠 때에, 제자들이 바디매오에게 “안심하고(타르세이θάρσει)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막 10:49) 고 말한다. 제자들의 입술이지만 여기에서도 예수가 바디매오를 부르신다는 말을 전달함으로 안심시키는 주체가 예수인 것을 드러내고 있다.
고난을 기다리며 예루살렘의 밤, 마지막 만찬에서 선포하는 예수의 긴 담화 속에는 세상의 궁극적 승리자로서 자신의 존재를 제자들에게 선포할 때에도 이 단어를 사용한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니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타르세이테θαρσεῖτε)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누가복음-사도행전의 저자는 예루살렘 로마군대의 영내 감옥에 갇힌 바울에게 주님이 나타나시고 말씀하신 것을 기록하고 있다: "담대하라(타르세이θάρσει),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행 23:11). 복음서의 저자들은 적어도 예수의 입술에서 나오는 동사 θαρσέω(타르세오)를 인생의 구원자이고 치료자이신 주님의 존재를 부각시키기위해 특별하게 사용한다. 예수는 안심시키고 담대하게 해 주는 존재로서 중병병자가 고침과 죄 사함을 받게 하고, 혈루증의 여인이 고침과 구원함을 받게 하고, 풍랑 속에 있는 제자들이 죽음의 두려움을 떨쳐내게 하고, 맹인이 보게 되고 구원받게 하며, 다가오는 고난을 기다리는 제자들에게 평안을 주며, 감옥에 갇혀 고난을 당하는 복음전도자를 보호하고 인도하는 존재인 것이다.
바울은 자신의 담대함을 고린도 교인들에게 여러 차례 언급하였다. 비록 육신으로 사는 것이 주님과 떨어져 있는 것이지만, 성령의 역사 가운데 믿음으로 살기에 바울은 언제나 담대하다(타룬테스Θαρροῦντες)고 고백한다(고후 5:6). 바울은 이 단어를 '신뢰'(trust)의 의미로서 또한 사용하는데, 동역자 디도를 따뜻한 마음으로 환영해 준 고린도 교인들을 모든 일에 신뢰한다(타로θαρρῶ)고 말한다(고후 7:16). 주님에 대한 신뢰에서 담대함을 가지게 되고(히 13:6), 교인의 변함 없는 사랑 때문에 담대함을 가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는 담대함은 구세주, 치료자, 보호자가 되시는 주님에 대한 신뢰에서 오는 열매이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주눅들고 있는 일상에서 우리는 다시 담대함을 회복해야 한다. 단순히 백신이나 치료제가 주는 담대함이 아니라, 세상의 구세주와 인생의 주인 되시는 예수의 존재를 신뢰함으로 오는 담대함이다. 중풍병자, 병든 여인, 거친 풍랑 속에 있고 고난을 기다리는 제자들, 감옥에 갇혀 죽을지도 모르는 복음전도자 등, 인생이 어떤 모양, 어떤 처지이든지, 안심하라 담대하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을 신뢰함으로 오는 담대함이다. 그것은 믿음의 회복이 주는 담대함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