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소리로 수군거리고, 뒤에서 말하는 모습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γογγύζω(공귀조) 동사는 그렇게 "말하는 모양"을 형용하는 동사이다. 이 동사가 나타나는 구절은 중에는 널리 알려진 구절들이 많다.
구약에서는 출애굽 한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하는 장면에서 이 동사가 사용되었다.
출애굽기 15장
23 마침내 그들이 마라에 이르렀는데, 그 곳의 물이 써서 마실 수 없었으므로, 그 곳의 이름을 마라라고 하였다. 24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에게 "우리가 무엇을 마신단 말입니까?" 하고 불평하였다.
출애굽기 16장
2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였다. 3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항의하였다. "차라리 우리가 이집트 땅 거기 고기 가마 곁에 앉아 배불리 음식을 먹던 그 때에, 누가 우리를 주님의 손에 넘겨 주어서 죽게 했더라면 더 좋을 뻔 하였습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지금 우리를 이 광야로 끌고 나와서, 이 모든 회중을 다 굶어 죽게 하고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바리새파나 율법학자 혹은 무리가 예수님에 대해 불평할 때 이 동사가 사용되었다. 아래 용례 중 누가복음 15장용례에서는 γογγύζω 대신 διαγογγύζω(디아공귀조)가 사용되긴 하였지만, 의미 상의 차이는 없다.
누가복음 5장
30 바리새파 사람들과 그들의 율법학자들이 예수의 제자들에게 불평하면서 말하였다. "어찌하여 당신들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어울려서 먹고 마시는 거요?"
누가복음 15장
1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그에게 가까이 몰려들었다. 2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투덜거리며 말하였다. "이 사람이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구나."
요한복음 6장
41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하고 말씀하셨으므로, 그분을 두고 수군거리면서 42 말하였다.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부모를 우리가 알지 않는가? 그런데 이 사람이 어떻게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는가?" 43 그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서로 수군거리지 말아라 . . . "
60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서 여럿이 이 말씀을 듣고 말하기를 "이 말씀이 이렇게 어려우니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61 예수께서, 제자들이 자기의 말을 두고 수군거리는 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말이 너희의 마음에 걸리느냐? . . ."
이상 살펴본 용례를 통하여 공귀조가 "불평하다" "원망하다" "투덜거리다" "수군거리다" 등으로 번역된 것을 보았다. "불평하다" "원망하다"는 말의 내용을 중시하는 번역인 반면, "투덜거리다" "수군거리다"는 말하는 방식을 중시하는 번역이다. 다시 말하지만, 공귀조는 말의 내용이 아니라, 말의 방식을 표현하는 단어이다. BDAG는 공귀조에 대해 두 개의 정의를 제시하는데, "utterance made in a low tone of voice"와 "behind-the-scenes talk"이다. 두 정의 모두 말의 내용이 아니라, 말의 방식과 관련있다. 말하는 상대가 들을 수 없도록 작은 목소리로 수근거리거나, 뒤에서 투덜대는 모양을 나타내는 동사이다. 이 점이 공귀조를 이해할 때 기억해야 할 첫째이다. "수군거리다" "투덜대다"가 나은 번역이다.
다음으로, 그런 방식으로 말하는 내용이 칭찬인지 불평인지는 문맥이 결정한다. 그런데 성경 안 공귀조 용례를 문맥에서 살펴보면, 칭찬하는 모습은 없고 전부 불평 불만하는 모습만 있다. 따라서 "불평하다" "원망하다" 역시 적절한 번역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이 동사의 명사형인 γογγυσμός(공귀스모스)의 번역까지 모두 "불평"으로 번역되어 있어, 이 단어의 원뜻이 "불평"으로 이해될까 두렵다.
빌립보서 2장
14 무슨 일이든지, 불평과 시비를 하지 말고 하십시오.
베드로전서 4장
9 불평 없이 서로 따뜻하게 대접하십시오.
다시 말하지만, 공귀조(동사)나 공귀스모스(명사)의 원뜻은 말의 내용이 아니라 말하는 방식을 표현하는 단어라는 점을 기억하면 좋겠다.
공귀조/공귀스모스가 말하는 방식이라는 점을 잘 보여주는 구절이 있다. 요한복음 7장이다.
요한복음 7장
12 무리 가운데서는 예수를 두고 말들이 많았다.(개역개정: 수근거림이 많아) 더러는 그를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더러는 무리를 미혹하는 사람이라고 말하였다.
13 그러나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예수에 대하여 드러내 놓고 말하는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2절 새번역에서 공귀조는 "말들이 많았다"로 번역되었다. 이 번역보다는 개역개정의 "수군거림이 말았다"는 번역이 공귀조/공귀스모스의 뉘앙스를 잘 살린 번역이다. 그런데 12절의 공귀스모스는 13절의 παρρησίᾳ(파레시아)와 대비된다. 이미 두 번에 걸쳐 파레시아에 대해 썼지만(솔직하게 담대하게, 요한복음의 파레시아), 요약하자면 파레시아는 앞에 나서서 담대하고 솔직하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그렇게 말하는 방식을 말한다. 위의 요한복음 7장 본문은 무리 가운데서 예수에 대해 γογγυσμός하는 사람은 많았지만(12절), παρρησίᾳ하는 사람은 없었다고 전한다. 이 구절을 통해 공귀스모스의 반대말이 파레시아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공귀스모스 vs. 파레시아"라는 대립각을 이해한다면, 사도행전 6장에 나오는 공귀스모스, 그리고 그에 대한 교회의 대응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사도행전 6장
1 이 시기에 제자들이 점점 불어났다. 그런데 그리스 말을 하는 유대 사람들이 히브리 말을 하는 유대 사람들에게 불평을 터뜨렸다. 그것은 자기네 과부들이 날마다 구호 음식을 나누어 받는 일에 소홀히 여김을 받기 때문이었다.
이 구절에서 공귀스모스는 "불평을 터뜨리다"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공귀스모스는 말의 내용보다 말의 방식을 나타내는 단어라는 점을 기억한다면, 이 구절이 표현하는 그리스 말을 하는 유대 사람들의 모습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다. 큰 소리로 불평하거나, 제법 거칠게 항의한 것으로 상상하기보다는, 작은 소리로 뒤에서 불평을 말하는, 불평을 담아 수군거리는 정도였을 것이다. 그들이 히브리 말을 하는 유대 사람들 보다 예루살렘 교회 안에서 "약자"였기 때문이다. 지난 주 일점일획에서(헬라파 유대인에 대한 묵상) 다루었지만, 그들은 사회적 경제적 종교적 측면 모두에서 히브리 말을 하는 유대인들에게 큰소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리스 말을 하는 유대 사람들의 불평을 작은 소리로 상상하는 것이 맞겠다. 문제는 '그 작은 불평의 목소리에 교회가 어떻게 반응하였느냐?'이다. 예루살렘 교회는 작은 불평의 목소리를 흘려듣지 않고, 거기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그들의 목소리가 파레시아한 목소리가 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들 대표자 일곱을 안수하여 집사로 세움으로, 직무는 다르지만 열두 사도와 같이 교회의 리더쉽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세워준 것이다.
에클레시아는 교회 전에 도시국가 시민권자들의 총회였다(사도행전 19:39). 그 에클레시아의 정수essence는 파레시아였다. 총회의 구성원은 누구나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솔직하고 담대하게" 말할 수 있었고, 이것이 그리스 직접민주주의의 골간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이 어느 순간 자신들이 에클레시아라고 천명하였다. 그것이 교회로 번역되기 시작하였다. 도시국가 시민권자 모임이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 모임으로 옮겨온 것이다. 과연 교회는 에클레시아라는 이름만 가져온 것인가? 아니면 파레시아도 가져왔는가? 적어도 예루살렘 교회는 파레시아를 살리기 위하여 노력했다고 볼 수 있다. 오늘 우리의 교회는 어떠한가? 작은 불평의 목소리들을 발전과 성숙의 목소리로 승화 시키는가? 아니면 억누르는가?
작은 소리로 수군거리고, 뒤에서 말하는 모습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γογγύζω(공귀조) 동사는 그렇게 "말하는 모양"을 형용하는 동사이다. 이 동사가 나타나는 구절은 중에는 널리 알려진 구절들이 많다.
구약에서는 출애굽 한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하는 장면에서 이 동사가 사용되었다.
출애굽기 15장
23 마침내 그들이 마라에 이르렀는데, 그 곳의 물이 써서 마실 수 없었으므로, 그 곳의 이름을 마라라고 하였다. 24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에게 "우리가 무엇을 마신단 말입니까?" 하고 불평하였다.
출애굽기 16장
2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였다. 3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항의하였다. "차라리 우리가 이집트 땅 거기 고기 가마 곁에 앉아 배불리 음식을 먹던 그 때에, 누가 우리를 주님의 손에 넘겨 주어서 죽게 했더라면 더 좋을 뻔 하였습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지금 우리를 이 광야로 끌고 나와서, 이 모든 회중을 다 굶어 죽게 하고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바리새파나 율법학자 혹은 무리가 예수님에 대해 불평할 때 이 동사가 사용되었다. 아래 용례 중 누가복음 15장용례에서는 γογγύζω 대신 διαγογγύζω(디아공귀조)가 사용되긴 하였지만, 의미 상의 차이는 없다.
누가복음 5장
30 바리새파 사람들과 그들의 율법학자들이 예수의 제자들에게 불평하면서 말하였다. "어찌하여 당신들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어울려서 먹고 마시는 거요?"
누가복음 15장
1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그에게 가까이 몰려들었다. 2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투덜거리며 말하였다. "이 사람이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구나."
요한복음 6장
41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하고 말씀하셨으므로, 그분을 두고 수군거리면서 42 말하였다.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부모를 우리가 알지 않는가? 그런데 이 사람이 어떻게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는가?" 43 그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서로 수군거리지 말아라 . . . "
60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서 여럿이 이 말씀을 듣고 말하기를 "이 말씀이 이렇게 어려우니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61 예수께서, 제자들이 자기의 말을 두고 수군거리는 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말이 너희의 마음에 걸리느냐? . . ."
이상 살펴본 용례를 통하여 공귀조가 "불평하다" "원망하다" "투덜거리다" "수군거리다" 등으로 번역된 것을 보았다. "불평하다" "원망하다"는 말의 내용을 중시하는 번역인 반면, "투덜거리다" "수군거리다"는 말하는 방식을 중시하는 번역이다. 다시 말하지만, 공귀조는 말의 내용이 아니라, 말의 방식을 표현하는 단어이다. BDAG는 공귀조에 대해 두 개의 정의를 제시하는데, "utterance made in a low tone of voice"와 "behind-the-scenes talk"이다. 두 정의 모두 말의 내용이 아니라, 말의 방식과 관련있다. 말하는 상대가 들을 수 없도록 작은 목소리로 수근거리거나, 뒤에서 투덜대는 모양을 나타내는 동사이다. 이 점이 공귀조를 이해할 때 기억해야 할 첫째이다. "수군거리다" "투덜대다"가 나은 번역이다.
다음으로, 그런 방식으로 말하는 내용이 칭찬인지 불평인지는 문맥이 결정한다. 그런데 성경 안 공귀조 용례를 문맥에서 살펴보면, 칭찬하는 모습은 없고 전부 불평 불만하는 모습만 있다. 따라서 "불평하다" "원망하다" 역시 적절한 번역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이 동사의 명사형인 γογγυσμός(공귀스모스)의 번역까지 모두 "불평"으로 번역되어 있어, 이 단어의 원뜻이 "불평"으로 이해될까 두렵다.
빌립보서 2장
14 무슨 일이든지, 불평과 시비를 하지 말고 하십시오.
베드로전서 4장
9 불평 없이 서로 따뜻하게 대접하십시오.
다시 말하지만, 공귀조(동사)나 공귀스모스(명사)의 원뜻은 말의 내용이 아니라 말하는 방식을 표현하는 단어라는 점을 기억하면 좋겠다.
공귀조/공귀스모스가 말하는 방식이라는 점을 잘 보여주는 구절이 있다. 요한복음 7장이다.
요한복음 7장
12 무리 가운데서는 예수를 두고 말들이 많았다.(개역개정: 수근거림이 많아) 더러는 그를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더러는 무리를 미혹하는 사람이라고 말하였다.
13 그러나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예수에 대하여 드러내 놓고 말하는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2절 새번역에서 공귀조는 "말들이 많았다"로 번역되었다. 이 번역보다는 개역개정의 "수군거림이 말았다"는 번역이 공귀조/공귀스모스의 뉘앙스를 잘 살린 번역이다. 그런데 12절의 공귀스모스는 13절의 παρρησίᾳ(파레시아)와 대비된다. 이미 두 번에 걸쳐 파레시아에 대해 썼지만(솔직하게 담대하게, 요한복음의 파레시아), 요약하자면 파레시아는 앞에 나서서 담대하고 솔직하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그렇게 말하는 방식을 말한다. 위의 요한복음 7장 본문은 무리 가운데서 예수에 대해 γογγυσμός하는 사람은 많았지만(12절), παρρησίᾳ하는 사람은 없었다고 전한다. 이 구절을 통해 공귀스모스의 반대말이 파레시아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공귀스모스 vs. 파레시아"라는 대립각을 이해한다면, 사도행전 6장에 나오는 공귀스모스, 그리고 그에 대한 교회의 대응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사도행전 6장
1 이 시기에 제자들이 점점 불어났다. 그런데 그리스 말을 하는 유대 사람들이 히브리 말을 하는 유대 사람들에게 불평을 터뜨렸다. 그것은 자기네 과부들이 날마다 구호 음식을 나누어 받는 일에 소홀히 여김을 받기 때문이었다.
이 구절에서 공귀스모스는 "불평을 터뜨리다"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공귀스모스는 말의 내용보다 말의 방식을 나타내는 단어라는 점을 기억한다면, 이 구절이 표현하는 그리스 말을 하는 유대 사람들의 모습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다. 큰 소리로 불평하거나, 제법 거칠게 항의한 것으로 상상하기보다는, 작은 소리로 뒤에서 불평을 말하는, 불평을 담아 수군거리는 정도였을 것이다. 그들이 히브리 말을 하는 유대 사람들 보다 예루살렘 교회 안에서 "약자"였기 때문이다. 지난 주 일점일획에서(헬라파 유대인에 대한 묵상) 다루었지만, 그들은 사회적 경제적 종교적 측면 모두에서 히브리 말을 하는 유대인들에게 큰소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리스 말을 하는 유대 사람들의 불평을 작은 소리로 상상하는 것이 맞겠다. 문제는 '그 작은 불평의 목소리에 교회가 어떻게 반응하였느냐?'이다. 예루살렘 교회는 작은 불평의 목소리를 흘려듣지 않고, 거기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그들의 목소리가 파레시아한 목소리가 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들 대표자 일곱을 안수하여 집사로 세움으로, 직무는 다르지만 열두 사도와 같이 교회의 리더쉽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세워준 것이다.
에클레시아는 교회 전에 도시국가 시민권자들의 총회였다(사도행전 19:39). 그 에클레시아의 정수essence는 파레시아였다. 총회의 구성원은 누구나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솔직하고 담대하게" 말할 수 있었고, 이것이 그리스 직접민주주의의 골간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이 어느 순간 자신들이 에클레시아라고 천명하였다. 그것이 교회로 번역되기 시작하였다. 도시국가 시민권자 모임이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 모임으로 옮겨온 것이다. 과연 교회는 에클레시아라는 이름만 가져온 것인가? 아니면 파레시아도 가져왔는가? 적어도 예루살렘 교회는 파레시아를 살리기 위하여 노력했다고 볼 수 있다. 오늘 우리의 교회는 어떠한가? 작은 불평의 목소리들을 발전과 성숙의 목소리로 승화 시키는가? 아니면 억누르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