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10년 전 일이네요. 2014년에 영화 “노아(Noah)”가 개봉되었습니다. 하버드대학에서 문화인류학을 전공한 대런 애러노프스키(Darren Aronofsky)가 극본을 쓰고 감독을 했습니다. 유대인인 그가 이 영화를 위해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기독교 신학교에서 수업까지 들었다는 기사를 예전에 본 기억이 있는데, 출처를 확인해 보려니 못 찾겠네요.
총 4,000억원 정도의 수익을 기록해서 ‘기독교 영화’ 중에서는 꽤나 흥행에 성공한 영화입니다. 세계 최초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개봉한 것도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개봉 나흘 만에 100만 관객을 넘길 정도로 초반 인기는 상당했는데, 아마도 그것은 ‘기독교 영화’에 힘을 실어주려는 교회들의 단체 관람에 기인한 바가 컸을 것입니다. 하지만 곧 이 영화는 우리나라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논란을 자아냅니다. 과연 이 영화를 ‘기독교 영화’라고 할 수 있는가? 상상력이 곁들여 질 수밖에 없는 사소한 디테일들만이 아니라, 전반적인 스토리 전개와 영화 자체가 주는 메시지가 과연 기독교적인가 하는 의문이 강하게 제기되었습니다. 결국 이 영화의 국내 성적이 200만 관객에 그치고 만 것은 한국교회와 기독교인들의 외면을 받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무척 흥미롭게 보았습니다. 특별히, 영화(감독)가 성경 본문을 어떻게 ‘해석’했는가 하는 점이 저의 주목을 끌었습니다. 굉장히 염세주의적인 노아의 캐릭터 설정과 홍수 이후의 세계에서 인간은 모두 사라져야 한다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는 노아의 신앙은 감독 애러노프스키의 개인적인 성향과 세계관만이 아니라 ‘성경 본문을 근거로 한’ 해석이기 때문입니다. 그 해석이 신학적으로 옳은 해석이냐 혹은 방법론적으로 좋은 해석이냐 하는 문제는 차치하고, 감독이 영화의 플롯을 구성하고 디테일을 채워 넣을 때 철저하게 성경 본문에 근거하려고 애를 쓴 흔적이 역력했습니다.
네피림에 대한 해석
이 영화의 전체적인 주제에 대해서는 다음에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영화 속에 그려진 네피림(히브리어 네필림 נְפִלִּים)에 한정해서 다루고자 합니다. 영화는 창세기 6장 4절의 네피림을 “거인 + 타락천사 + 순찰자(Watcher)”라는 세 가지 개념의 혼합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 세 개념 모두 나름의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있기는 합니다.
1) 거인
우선, 네피림을 거인으로 이해하는 해석은, 히브리어 성경의 그리스어번역인 칠십인역(Septuagint)이 이 네피림을 기간테스(gigantes: 거인들)로 번역한 것에 기인합니다. 이렇게 해석할 수 있는 이유는 민수기 13장에서 가나안 거주민들이 거인으로 묘사되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32절).
가나안 땅으로 정탐하러 간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곳의 거주민들의 사이즈(middot)에 질려서(32절) 자신들이 그들에게는 메뚜기처럼 보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33절).
2) 타락천사
반면에 네피림을 "타락천사"로 이해하는 근거는, 네피림이라는 단어를 히브리어 어근 나팔(נפל)에 연결시킨 것인데, 이 어근의 기본적인 뜻은 ‘떨어지다, 넘어지다(to fall)’입니다. 이 근거 외에 구약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네피림을 타락천사, 혹은 추락천사로 이해할 수 있는 구절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이 "타락천사"라는 개념은 구약과 신약의 중간기 문헌인 에녹서에서부터 등장하기 시작하여, 베드로후서(2:4)와 유다서(1:6) 등에 나타납니다. 하지만 신약성경의 해당 본문을 잘 살펴보면 "죄 지은 천사,” “자기 영역을 이탈한 천사"라고 묘사되어 있을 뿐 "타락, 추락" 등의 이미지는 선명히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신약성경 중 유일하게 "추락"의 개념이 강조된 부분은 누가복음 10장 18절의 "사탄이 하늘에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다"는 구절인데, 단수 고유명사인 "사탄"을 복수집합명사인 "네피림"과 연결시키는 것은 근거가 박약합니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떨어지다’는 의미의 “추락”은 도덕적, 종교적인 “타락”과 의미상 관련이 희박합니다. 히브리어 “나팔”은 ‘위에서 떨어지다, 땅에 엎드려지다’ 등의 의미로 성경에 쓰이지, 결코 어떤 도덕적, 종교적 기준에 못 미친 “타락”의 의미로 쓰이지 않습니다.
3) 순찰자(Watcher)
눅 10:18의 하늘에서 떨어진 사탄을 구약의 다니엘서 4장의 “순찰자(Watcher)”와 연결시키려는 시도 역시 근거가 박약합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침상에서 꿈을 꾸었는데 이 꿈/환상에서 처음으로 “순찰자(Watcher)”가 등장합니다.
“내가 침상에서 머리 속으로 받은 환상 가운데에 또 본즉 한 순찰자(Watcher), 한 거룩한 자가 하늘에서 내려왔는데” (단 4:13)
이 본문의 “하늘에서 내려왔는데”라는 구절이 눅 10:18의 “사탄이 하늘에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과 연결시킬 수 없다는 사실은 느부갓네살 왕의 꿈을 해석한 다니엘의 말에서 입증됩니다.
“왕이여 그 해석은 이러하니이다 곧 지극히 높으신 이가 명령하신 것이 내 주 왕에게 미칠 것이라… 그 때에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아시리이다” (단 4:24-25)
이 “지극히 높으신 이”가 정확히 누구를 가리키는지 다니엘은 그 다음 절에 명시하고 있습니다
“또 그들이 그 나무뿌리의 그루터기를 남겨 두라 하였은즉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줄을 왕이 깨달은 후에야 왕의 나라가 견고하리이다”(단 4:26)
다니엘의 해몽은 이 “순찰자”가 곧 “지극히 높으신 이”이며 그가 곧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따라서 다니엘 4장의 “순찰자”를 하늘에서 떨어진 사탄과 연결시켜온 오랜 해석은 사실 성경 본문을 꼼꼼히 읽지 않은 결과일 뿐입니다.
네피림의 어원적 의미에 대한 다른 제안
지금까지 논증 했듯이, 네피림을 타락천사 혹은 “순찰자”로 이해하는 것은 성경적 근거가 없습니다. 신약시대, 혹은 신약이 묘사하는 종말의 때에 보게 될 타락천사는, 홍수 이전, 그리고 가나안 정복 시기에 존재했던 네피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물론 네피림에 대한 (빈약한) 설명과 묘사가 후대인들의 상상력을 자극했을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천지창조와 노아 홍수 전후의 사건들, 천상적 존재(들)와 사탄과 악마 등에 대한 이미지들은 거의 대부분 이러한 상상력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리고 상상력은 뒷받침할 성경의 본문 증거가 없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히려 네피림이라는 단어의 어근이 ‘떨어지다’라는 의미의 나팔(נפל)이 아니라 팔라(פלא)라고 하는 견해에 동의합니다. 팔라(פלא)의 기본 뜻은 ‘extra-ordinary’로, 비범한 것, 신기한 것 등 일상적이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성경에서 이 단어는 주로 접두사 눈(נ)과 함께 니플라오트(נִפְלָאוֹת)로 쓰입니다. “이상한 일, 기이한 일, 놀라운 일, 기묘, 신묘막측” 등으로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네피림이 언급된 구약의 유이무삼한 증거(창세기 6:4; 민수기 13:33)만을 놓고 보면, 일단 네피림은 홍수 이전에 존재했던 어떤 신적인 존재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홍수 이후에도 가나안 땅에 존재했고(민수기 13:33), 인간인 "아낙"의 자손으로 이해됩니다. 여기서 민수기 13장 33절의 개역성경 번역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개역한글)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거인들을 보았나니”(개역개정)
히브리어 원문 성경은 “네피림에게서 유래한 아낙의 자손 네피림을 보았다(וְשָׁם רָאִינוּ אֶת־הַנְּפִילִים בְּנֵי עֲנָק מִן־הַנְּפִלִים)”라고 되어 있습니다. 개역은 한번은 “네피림”으로 다른 한번은 “대장부” 혹은 “거인”으로 번역하면서, 홍수 이후에는 네피림이 없었던 것처럼 번역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원문 성경은 인간인 아낙의 자손 역시 네피림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네피림이 신적인 존재냐 아니냐, 타락한 혹은 추락한 천사냐 하는 것은 성경 자체가 갖고 있는 관심이 아닙니다. 네피림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 성경에서 실제 문제가 되는 것은 다만 사이즈(히브리어 미돗 מִדּוֹת)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즈가 큰 것은 오로지 네피림에게만 한정된 것도 아닙니다. 민수기 13:32절은 가나안 거주자들이 모두 다 사이즈가 크다("men of size")고 말하면서, 아낙 자손인 네피림은 단지 그들 중 하나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지나친 상상력을 발휘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네피림들에게 이스라엘 정탐꾼들이 메뚜기처럼 보일 것이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 메뚜기의 평균 크기와 인간의 평균 크기만큼의 사이즈 차이가 있을 거라는 상상은 지나칩니다. 6.25 때 한국전쟁에 참여한 연합군들을 처음 본 우리나라 사람들이라면, 그들 눈에 외국인들은 엄청난 거인으로, 그리고 자신들은 한낱 메뚜기만하게 보였을 테니까요.
벌써 10년 전 일이네요. 2014년에 영화 “노아(Noah)”가 개봉되었습니다. 하버드대학에서 문화인류학을 전공한 대런 애러노프스키(Darren Aronofsky)가 극본을 쓰고 감독을 했습니다. 유대인인 그가 이 영화를 위해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기독교 신학교에서 수업까지 들었다는 기사를 예전에 본 기억이 있는데, 출처를 확인해 보려니 못 찾겠네요.
총 4,000억원 정도의 수익을 기록해서 ‘기독교 영화’ 중에서는 꽤나 흥행에 성공한 영화입니다. 세계 최초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개봉한 것도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개봉 나흘 만에 100만 관객을 넘길 정도로 초반 인기는 상당했는데, 아마도 그것은 ‘기독교 영화’에 힘을 실어주려는 교회들의 단체 관람에 기인한 바가 컸을 것입니다. 하지만 곧 이 영화는 우리나라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논란을 자아냅니다. 과연 이 영화를 ‘기독교 영화’라고 할 수 있는가? 상상력이 곁들여 질 수밖에 없는 사소한 디테일들만이 아니라, 전반적인 스토리 전개와 영화 자체가 주는 메시지가 과연 기독교적인가 하는 의문이 강하게 제기되었습니다. 결국 이 영화의 국내 성적이 200만 관객에 그치고 만 것은 한국교회와 기독교인들의 외면을 받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무척 흥미롭게 보았습니다. 특별히, 영화(감독)가 성경 본문을 어떻게 ‘해석’했는가 하는 점이 저의 주목을 끌었습니다. 굉장히 염세주의적인 노아의 캐릭터 설정과 홍수 이후의 세계에서 인간은 모두 사라져야 한다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는 노아의 신앙은 감독 애러노프스키의 개인적인 성향과 세계관만이 아니라 ‘성경 본문을 근거로 한’ 해석이기 때문입니다. 그 해석이 신학적으로 옳은 해석이냐 혹은 방법론적으로 좋은 해석이냐 하는 문제는 차치하고, 감독이 영화의 플롯을 구성하고 디테일을 채워 넣을 때 철저하게 성경 본문에 근거하려고 애를 쓴 흔적이 역력했습니다.
네피림에 대한 해석
이 영화의 전체적인 주제에 대해서는 다음에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영화 속에 그려진 네피림(히브리어 네필림 נְפִלִּים)에 한정해서 다루고자 합니다. 영화는 창세기 6장 4절의 네피림을 “거인 + 타락천사 + 순찰자(Watcher)”라는 세 가지 개념의 혼합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 세 개념 모두 나름의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있기는 합니다.
1) 거인
우선, 네피림을 거인으로 이해하는 해석은, 히브리어 성경의 그리스어번역인 칠십인역(Septuagint)이 이 네피림을 기간테스(gigantes: 거인들)로 번역한 것에 기인합니다. 이렇게 해석할 수 있는 이유는 민수기 13장에서 가나안 거주민들이 거인으로 묘사되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32절).
가나안 땅으로 정탐하러 간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곳의 거주민들의 사이즈(middot)에 질려서(32절) 자신들이 그들에게는 메뚜기처럼 보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33절).
2) 타락천사
반면에 네피림을 "타락천사"로 이해하는 근거는, 네피림이라는 단어를 히브리어 어근 나팔(נפל)에 연결시킨 것인데, 이 어근의 기본적인 뜻은 ‘떨어지다, 넘어지다(to fall)’입니다. 이 근거 외에 구약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네피림을 타락천사, 혹은 추락천사로 이해할 수 있는 구절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이 "타락천사"라는 개념은 구약과 신약의 중간기 문헌인 에녹서에서부터 등장하기 시작하여, 베드로후서(2:4)와 유다서(1:6) 등에 나타납니다. 하지만 신약성경의 해당 본문을 잘 살펴보면 "죄 지은 천사,” “자기 영역을 이탈한 천사"라고 묘사되어 있을 뿐 "타락, 추락" 등의 이미지는 선명히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신약성경 중 유일하게 "추락"의 개념이 강조된 부분은 누가복음 10장 18절의 "사탄이 하늘에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다"는 구절인데, 단수 고유명사인 "사탄"을 복수집합명사인 "네피림"과 연결시키는 것은 근거가 박약합니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떨어지다’는 의미의 “추락”은 도덕적, 종교적인 “타락”과 의미상 관련이 희박합니다. 히브리어 “나팔”은 ‘위에서 떨어지다, 땅에 엎드려지다’ 등의 의미로 성경에 쓰이지, 결코 어떤 도덕적, 종교적 기준에 못 미친 “타락”의 의미로 쓰이지 않습니다.
3) 순찰자(Watcher)
눅 10:18의 하늘에서 떨어진 사탄을 구약의 다니엘서 4장의 “순찰자(Watcher)”와 연결시키려는 시도 역시 근거가 박약합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침상에서 꿈을 꾸었는데 이 꿈/환상에서 처음으로 “순찰자(Watcher)”가 등장합니다.
“내가 침상에서 머리 속으로 받은 환상 가운데에 또 본즉 한 순찰자(Watcher), 한 거룩한 자가 하늘에서 내려왔는데” (단 4:13)
이 본문의 “하늘에서 내려왔는데”라는 구절이 눅 10:18의 “사탄이 하늘에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과 연결시킬 수 없다는 사실은 느부갓네살 왕의 꿈을 해석한 다니엘의 말에서 입증됩니다.
“왕이여 그 해석은 이러하니이다 곧 지극히 높으신 이가 명령하신 것이 내 주 왕에게 미칠 것이라… 그 때에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아시리이다” (단 4:24-25)
이 “지극히 높으신 이”가 정확히 누구를 가리키는지 다니엘은 그 다음 절에 명시하고 있습니다
“또 그들이 그 나무뿌리의 그루터기를 남겨 두라 하였은즉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줄을 왕이 깨달은 후에야 왕의 나라가 견고하리이다”(단 4:26)
다니엘의 해몽은 이 “순찰자”가 곧 “지극히 높으신 이”이며 그가 곧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따라서 다니엘 4장의 “순찰자”를 하늘에서 떨어진 사탄과 연결시켜온 오랜 해석은 사실 성경 본문을 꼼꼼히 읽지 않은 결과일 뿐입니다.
네피림의 어원적 의미에 대한 다른 제안
지금까지 논증 했듯이, 네피림을 타락천사 혹은 “순찰자”로 이해하는 것은 성경적 근거가 없습니다. 신약시대, 혹은 신약이 묘사하는 종말의 때에 보게 될 타락천사는, 홍수 이전, 그리고 가나안 정복 시기에 존재했던 네피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물론 네피림에 대한 (빈약한) 설명과 묘사가 후대인들의 상상력을 자극했을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천지창조와 노아 홍수 전후의 사건들, 천상적 존재(들)와 사탄과 악마 등에 대한 이미지들은 거의 대부분 이러한 상상력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리고 상상력은 뒷받침할 성경의 본문 증거가 없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히려 네피림이라는 단어의 어근이 ‘떨어지다’라는 의미의 나팔(נפל)이 아니라 팔라(פלא)라고 하는 견해에 동의합니다. 팔라(פלא)의 기본 뜻은 ‘extra-ordinary’로, 비범한 것, 신기한 것 등 일상적이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성경에서 이 단어는 주로 접두사 눈(נ)과 함께 니플라오트(נִפְלָאוֹת)로 쓰입니다. “이상한 일, 기이한 일, 놀라운 일, 기묘, 신묘막측” 등으로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네피림이 언급된 구약의 유이무삼한 증거(창세기 6:4; 민수기 13:33)만을 놓고 보면, 일단 네피림은 홍수 이전에 존재했던 어떤 신적인 존재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홍수 이후에도 가나안 땅에 존재했고(민수기 13:33), 인간인 "아낙"의 자손으로 이해됩니다. 여기서 민수기 13장 33절의 개역성경 번역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개역한글)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거인들을 보았나니”(개역개정)
히브리어 원문 성경은 “네피림에게서 유래한 아낙의 자손 네피림을 보았다(וְשָׁם רָאִינוּ אֶת־הַנְּפִילִים בְּנֵי עֲנָק מִן־הַנְּפִלִים)”라고 되어 있습니다. 개역은 한번은 “네피림”으로 다른 한번은 “대장부” 혹은 “거인”으로 번역하면서, 홍수 이후에는 네피림이 없었던 것처럼 번역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원문 성경은 인간인 아낙의 자손 역시 네피림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네피림이 신적인 존재냐 아니냐, 타락한 혹은 추락한 천사냐 하는 것은 성경 자체가 갖고 있는 관심이 아닙니다. 네피림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 성경에서 실제 문제가 되는 것은 다만 사이즈(히브리어 미돗 מִדּוֹת)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즈가 큰 것은 오로지 네피림에게만 한정된 것도 아닙니다. 민수기 13:32절은 가나안 거주자들이 모두 다 사이즈가 크다("men of size")고 말하면서, 아낙 자손인 네피림은 단지 그들 중 하나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지나친 상상력을 발휘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네피림들에게 이스라엘 정탐꾼들이 메뚜기처럼 보일 것이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 메뚜기의 평균 크기와 인간의 평균 크기만큼의 사이즈 차이가 있을 거라는 상상은 지나칩니다. 6.25 때 한국전쟁에 참여한 연합군들을 처음 본 우리나라 사람들이라면, 그들 눈에 외국인들은 엄청난 거인으로, 그리고 자신들은 한낱 메뚜기만하게 보였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