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 운동은 곧 하나님 나라 운동이었다. 예수와 함께 하나님 나라는 선포되었고 시작되었으며, 마치 누룩 섞인 반죽처럼 퍼져갔다. 예수님께서는 빈번히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르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가르치고 선포하고 시작하신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그 실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보인다. 하긴,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랬었다. 겨자씨처럼 그 존재감이 미미한 실재이니 잘 알지 못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 하겠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하나님 나라가 "가는 나라"가 아니라 "오는 나라"이며 "현세"에서 이루어지는 실재라는 점, 그리고 그 실재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점은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이런 성격의 하나님 나라를 "현재적" 하나님 나라라 명명한다. 그리고 현재적 하나님 나라를 뒷받침 하는 성경 구절 중 하나가 누가복음 17장 20-21절 말씀이다.
눅 17:20 바리새파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물으니,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을 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21또 ‘보아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말할 수도 없다. 보아라,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또는 ‘안에') 가운데에 있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보여주는 이 구절은 여기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를 탐구하는데 중요한 구절이다. 그런데, 이 구절 속 전치사 하나가 오역되고 있고, 그로 인하여 예수님의 가르침이 오해 되고 있다.
21절의 마지막 문장은 헬라어로 이렇다.
ἡ βασιλεία τοῦ θεοῦ ἐντὸς ὑμῶν ἐστιν.
헤 바실레이아 투 쎄우 엔토스 휘몬 에스틴
이 문장에서 전치사 엔토스ἐντὸς를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따라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곳(τοπος/topos)에 대한 이해가 달라진다. 하나님 나라는 "지금 여기 와 있지만 현저하게 드러나지 않는 나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 말씀이 귀하다. 최소 그 나라가 어디에 이루어지는지 정도는 알아야 하나님 나라를 찾든 참여하든 이루든 할 것 아닌가.
엔토스 전치사의 한글 번역은 둘로 나뉜다. 하나는 개정개역처럼 "안에"로 번역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새번역이나 공동번역처럼 "가운데"로 번역하는 경우이다.(새번역의 경우는 각주에 "안에"라는 번역을 제시하였다.) 영어 번역의 경우도 "in the midst of"(ESV), "within"(WEB, KJV), "among"(NRSV)으로 갈린다. 영어 번역에서 "in the midst of"라는 NRSV 번역은, "in the midst of"가 공간적 개념으로 쓰이기 보다는 "전쟁 중에" "가뭄 중에"와 같이 시간적 개념으로 주로 사용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어색하다. 결국 영어 번역도 한글 번역과 다르지 않게 among(가운데)이냐 within(안에)이냐로 갈린다.
이 두 번역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다른 이해를 제공한다. 엔토스를 "가운데"로 번역하면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한데, 하나는 지금 청중 가운데 서 있는 "예수님"을 하나님 나라로 이해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너희의 관계 안에" 혹은 "너희 공동체에"로 이해하는 경우이다. 이런 해석을 옹호하는 해석자들은 "너희"가 복수라는 점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든다.
반면, 엔토스를 "안에"로 번역하면 하나님 나라는 "마음"에 이루어지는 실재로 이해하거나, 더 넓게는 한 사람 한 사람 존재 안에 이루어지는 실재로 이해할 수 있다. "너희"가 복수라는 점은 이런 해석에 방해 되지는 않는다. "너희 한 사람 한 사람 안에"라는 뜻으로 ἐντὸς ὑμῶν을 번역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ἐντὸς를 "가운데"와 "안에" 두 가지 모두로 번역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하나님 나라에 대한 해석은 이 전치사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관련된 전반적인 문맥에서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내가 이 글을 통하여 주장하는 바는 단순하며 분명하다. 엔토스ἐντὸς에는 영어의 among이나 한글의 "가운데"라는 뜻이 없다. 엔토스는 사람을 포함한 어떤 실재의 내부(inside, within)를 뜻하지, 여러 실재의 "가운데"나 "사이"를 뜻하지 않는다.
엔토스 보다 훨씬 많이 사용되는 전치사 엔ἐν은 엔토스와 달리 "안에"로도 사용되었고 "가운데"로도 사용되었다. 엔이 "가운데"로 사용된 예를 하나 들어보자.
갈1:14 14나는 내 동족 가운데서among my people(ἐν τῷ γένει μου엔토게네이무), 나와 나이가 같은 또래의 많은 사람보다 유대교 신앙에 앞서 있었으며, 내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는 일에도 훨씬 더 열성이었습니다.
여기서 전치사 엔을 엔토스로 대체할 수 있는가? 할 수 없다. 엔이라는 널리 알려진 전치사 대신 엔토스라는 드물게 사용된 전치사를 사용한 의도는, 여러 개의 가운데가 아니라 하나의 "안"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1.신약과 구약 칠십인역의 엔토스 용례들이 이 점을 보여준다.
시편 39:3 3 가슴 속(ἐντός μου) 깊은 데서 뜨거운 열기가 치솟고
시편 103:1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ἐντός μου)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시편 109:22 나는 가난하고 빈곤합니다. 내 마음(ἐντός μου) 깊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마태 23:26 눈 먼 바리새파 사람들아! 먼저 잔 안을(ἐντὸς τοῦ ποτηρίου) 깨끗이 하여라. 그리하면 그 겉도 깨끗하게 될 것이다.”
2. 성경과 초대교부 문서의 lexicon인 BDAG는 엔토스의 정의definition로 within과 inside만을 제시하지 among을 제시하지 않는다.
3.고전 그리스어 사전인 Liddell & Scott 역시 엔토스의 정의로 within과 inside만을 제시한다. 고전 속의 용례들 역시 엔토스가 어떤 것(사람 포함)의 "내부"를 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엔토스를 "가운데"로 번역한 새번역 등의 번역은 적절하다 볼 수 없고, 이런 번역에 기반하여 하나님 나라를 "관계" 속에 이루어지는 실재로 보는 해석 또한 적어도 이 구절이 전하는 바는 아니다. 또한 너희 가운데 서 계신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라는 해석 역시 이 구절이 전하는 바가 아니다.
ἐντὸς ὑμῶν의 의미는 단순하다. 둘러 선 사람들 각자 안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그 "안에"를 꼭 "마음 안에" 있다는 식으로 좁힐 필요는 없다. 마음이 중요하지만, 마음으로 한정할 이유가 이 구절에는 없기 때문이다. "너희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있다"가 누가복음 17:21의 엔토스를 잘 살린 번역이다. 이 번역에 근거하여 하나님 나라를 해석하면, 하나님 나라는 우리 마음 안에 이루어지고, 삶에 이루어지고, 존재 안에 이루어지는 실재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이루어지는 실재이지, 국가나 정치체제가 아니라는 말씀이다. 유대인들이 고대하던 하나님 나라와 예수님이 가르친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다르다. "하나님 나라"라고 할 때 "나라"에 해당하는 바실레이아는 국가가 아니라 통치라는 뜻이다. 그런데 통치라는 표현 역시 왕정이나 국가를 전제로 하는 것처럼 들려 오해를 줄 여지가 있다. 통치 대신 "다스림"이라는 표현이 좋겠다. 하나님 나라는 무엇일까?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상태를 말한다. 하나님 관점으로 표현한 것이 "하나님의 다스림"이라면, 그것을 우리 관점에서 표현하면 무엇일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상태"라고 할 수 있겠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출발점이다.
예수 운동은 곧 하나님 나라 운동이었다. 예수와 함께 하나님 나라는 선포되었고 시작되었으며, 마치 누룩 섞인 반죽처럼 퍼져갔다. 예수님께서는 빈번히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르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가르치고 선포하고 시작하신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그 실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보인다. 하긴,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랬었다. 겨자씨처럼 그 존재감이 미미한 실재이니 잘 알지 못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 하겠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하나님 나라가 "가는 나라"가 아니라 "오는 나라"이며 "현세"에서 이루어지는 실재라는 점, 그리고 그 실재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점은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이런 성격의 하나님 나라를 "현재적" 하나님 나라라 명명한다. 그리고 현재적 하나님 나라를 뒷받침 하는 성경 구절 중 하나가 누가복음 17장 20-21절 말씀이다.
눅 17:20 바리새파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물으니,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을 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21또 ‘보아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말할 수도 없다. 보아라,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또는 ‘안에') 가운데에 있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보여주는 이 구절은 여기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를 탐구하는데 중요한 구절이다. 그런데, 이 구절 속 전치사 하나가 오역되고 있고, 그로 인하여 예수님의 가르침이 오해 되고 있다.
21절의 마지막 문장은 헬라어로 이렇다.
ἡ βασιλεία τοῦ θεοῦ ἐντὸς ὑμῶν ἐστιν.
헤 바실레이아 투 쎄우 엔토스 휘몬 에스틴
이 문장에서 전치사 엔토스ἐντὸς를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따라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곳(τοπος/topos)에 대한 이해가 달라진다. 하나님 나라는 "지금 여기 와 있지만 현저하게 드러나지 않는 나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 말씀이 귀하다. 최소 그 나라가 어디에 이루어지는지 정도는 알아야 하나님 나라를 찾든 참여하든 이루든 할 것 아닌가.
엔토스 전치사의 한글 번역은 둘로 나뉜다. 하나는 개정개역처럼 "안에"로 번역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새번역이나 공동번역처럼 "가운데"로 번역하는 경우이다.(새번역의 경우는 각주에 "안에"라는 번역을 제시하였다.) 영어 번역의 경우도 "in the midst of"(ESV), "within"(WEB, KJV), "among"(NRSV)으로 갈린다. 영어 번역에서 "in the midst of"라는 NRSV 번역은, "in the midst of"가 공간적 개념으로 쓰이기 보다는 "전쟁 중에" "가뭄 중에"와 같이 시간적 개념으로 주로 사용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어색하다. 결국 영어 번역도 한글 번역과 다르지 않게 among(가운데)이냐 within(안에)이냐로 갈린다.
이 두 번역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다른 이해를 제공한다. 엔토스를 "가운데"로 번역하면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한데, 하나는 지금 청중 가운데 서 있는 "예수님"을 하나님 나라로 이해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너희의 관계 안에" 혹은 "너희 공동체에"로 이해하는 경우이다. 이런 해석을 옹호하는 해석자들은 "너희"가 복수라는 점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든다.
반면, 엔토스를 "안에"로 번역하면 하나님 나라는 "마음"에 이루어지는 실재로 이해하거나, 더 넓게는 한 사람 한 사람 존재 안에 이루어지는 실재로 이해할 수 있다. "너희"가 복수라는 점은 이런 해석에 방해 되지는 않는다. "너희 한 사람 한 사람 안에"라는 뜻으로 ἐντὸς ὑμῶν을 번역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ἐντὸς를 "가운데"와 "안에" 두 가지 모두로 번역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하나님 나라에 대한 해석은 이 전치사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관련된 전반적인 문맥에서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내가 이 글을 통하여 주장하는 바는 단순하며 분명하다. 엔토스ἐντὸς에는 영어의 among이나 한글의 "가운데"라는 뜻이 없다. 엔토스는 사람을 포함한 어떤 실재의 내부(inside, within)를 뜻하지, 여러 실재의 "가운데"나 "사이"를 뜻하지 않는다.
엔토스 보다 훨씬 많이 사용되는 전치사 엔ἐν은 엔토스와 달리 "안에"로도 사용되었고 "가운데"로도 사용되었다. 엔이 "가운데"로 사용된 예를 하나 들어보자.
갈1:14 14나는 내 동족 가운데서among my people(ἐν τῷ γένει μου엔토게네이무), 나와 나이가 같은 또래의 많은 사람보다 유대교 신앙에 앞서 있었으며, 내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는 일에도 훨씬 더 열성이었습니다.
여기서 전치사 엔을 엔토스로 대체할 수 있는가? 할 수 없다. 엔이라는 널리 알려진 전치사 대신 엔토스라는 드물게 사용된 전치사를 사용한 의도는, 여러 개의 가운데가 아니라 하나의 "안"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1.신약과 구약 칠십인역의 엔토스 용례들이 이 점을 보여준다.
시편 39:3 3 가슴 속(ἐντός μου) 깊은 데서 뜨거운 열기가 치솟고
시편 103:1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ἐντός μου)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시편 109:22 나는 가난하고 빈곤합니다. 내 마음(ἐντός μου) 깊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마태 23:26 눈 먼 바리새파 사람들아! 먼저 잔 안을(ἐντὸς τοῦ ποτηρίου) 깨끗이 하여라. 그리하면 그 겉도 깨끗하게 될 것이다.”
2. 성경과 초대교부 문서의 lexicon인 BDAG는 엔토스의 정의definition로 within과 inside만을 제시하지 among을 제시하지 않는다.
3.고전 그리스어 사전인 Liddell & Scott 역시 엔토스의 정의로 within과 inside만을 제시한다. 고전 속의 용례들 역시 엔토스가 어떤 것(사람 포함)의 "내부"를 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엔토스를 "가운데"로 번역한 새번역 등의 번역은 적절하다 볼 수 없고, 이런 번역에 기반하여 하나님 나라를 "관계" 속에 이루어지는 실재로 보는 해석 또한 적어도 이 구절이 전하는 바는 아니다. 또한 너희 가운데 서 계신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라는 해석 역시 이 구절이 전하는 바가 아니다.
ἐντὸς ὑμῶν의 의미는 단순하다. 둘러 선 사람들 각자 안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그 "안에"를 꼭 "마음 안에" 있다는 식으로 좁힐 필요는 없다. 마음이 중요하지만, 마음으로 한정할 이유가 이 구절에는 없기 때문이다. "너희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있다"가 누가복음 17:21의 엔토스를 잘 살린 번역이다. 이 번역에 근거하여 하나님 나라를 해석하면, 하나님 나라는 우리 마음 안에 이루어지고, 삶에 이루어지고, 존재 안에 이루어지는 실재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이루어지는 실재이지, 국가나 정치체제가 아니라는 말씀이다. 유대인들이 고대하던 하나님 나라와 예수님이 가르친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다르다. "하나님 나라"라고 할 때 "나라"에 해당하는 바실레이아는 국가가 아니라 통치라는 뜻이다. 그런데 통치라는 표현 역시 왕정이나 국가를 전제로 하는 것처럼 들려 오해를 줄 여지가 있다. 통치 대신 "다스림"이라는 표현이 좋겠다. 하나님 나라는 무엇일까?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상태를 말한다. 하나님 관점으로 표현한 것이 "하나님의 다스림"이라면, 그것을 우리 관점에서 표현하면 무엇일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상태"라고 할 수 있겠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출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