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점일획


요셉(יוֹסֵף)에 관한 묵상(김창주)

관리자
2025-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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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요셉을 ‘더하다’(יָסָף)로 풀이한다. ‘야웨께서 다른 아들을 하나 더 주시기를 원한다’(창 30:24)는 라헬의 고백에 근거한 것이다. 사전은 그 밖에 ‘더 주다’(창 38:26), ‘크게 하다’(사 26:15), ‘확장하다’(왕하 19:30; 사 29:19) 등도 제시한다. 요셉과 비슷한 이름 아삽(אָסָף)을 함께 살펴도 좋다. ‘모으다, 수집하다’는 뜻으로 역대기에 중요 인물로 나온다(대상 15:17). 노래하는 자 ‘아삽’은 성가대의 우두머리로 헤만과 에단 등과 함께 핵심 인물이며(대상 15:19; 스 2:41; 느 12:46) 시편의 저자로 언급된다(시편 50, 73-83).


다른 낱말과 결합하면 ‘엘리아삽’(אֶלְיָסָף), 또는 아비아삽(אֲבִיאָסָף)이나 에비아삽이 된다(출 6:24; 대상 6:23). 엘리아삽은 ‘내 하나님(אֵלִי)이 더하신다’는 뜻으로 민수기의 갓 지파의 활동에 관련되어 집중적으로 나온다(민 1:14; 3:24; 7:42; 10:20). 한편 ‘아버지’와 결합한 아비아삽/에비아삽은 ‘모으다, 수집하다’는 의미한다. 엘리아삽과 아비아삽의 미세한 차이는 ‘하나님’은 ‘더하고’(יָסָף) ‘아버지’는 ‘모은다’(אָסָף)는 점이다. 의도적인 구분인지 알 수 없으나 비슷한 의미로 통한다.



학자들은 요셉과 아삽의 어원에 대하여 한 뿌리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본다. 초기 히브리어에서 알레프(א)와 요드(י)는 둘 다 자음과 모음의 역할로 소리 형태가 매우 다양하다. 그것은 발음이 그만큼 불안정하기 때문에 벌어진 현상이다. 요셉과 아삽의 언어학적 음가는 하나에 있었다는 간접적인 증거이도 하다. 시간이 흐르면서 ‘더하다’와 ‘모으다’로 세분화되고, 나중에 (수치, 숨, 분노) ‘거두다’(창 30:23; 49:33; 시 85:3), 해가 ‘물러가다’(시 104:22) 등의 의미로 확장되었을 가능성은 크다.


요셉이 ‘야웨’와 합성된 형태로 나온 예가 두 차례 보인다. ‘여호셉’(יה֘וֹסֵף)과 요시뱌(יוֹסִפְיָה)다(시 81:5; 스 8:10).요셉이 뒤와 앞에 온 상태지만 사실 의미가 같은 이름이다. 이와 같이 두 낱말로 이뤄진 이름을 뒤바꿔 쓰는 방식은 구약성서에 빈번하게 쓰이는 수사법이다. 예컨대 ‘요나단 느다냐,’ ‘요엘 엘리야,’ ‘아하시야 여호아하스’(왕하 13:1), ‘요시야 요아스’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예레미야는 심지어 ‘여호야긴(יְהוֹיָכִן), 여고니야(יְכָונְיָה), 고니야(כָּנְיָהוּ)’ 등 세 가지 다른 철자법으로 기록한다. 그 중에서 단연 눈에 띄는 예는 밧세바와 그녀의 아버지 이름이다. 역대기 저자는 다윗과 밧세바의 스캔들을 의식해서인지 밧세바의 아버지 이름을 사무엘하의 그것과 달리 표기하고 있다. 즉 엘리암(אֱלִיעָם)을 암미엘(עַמִּיאֵל)로 바꾸고(삼하 11:3; 대상 3:5) 밧세바(בַת-שֶׁבַע)를 밧수아(בַת-שׁוּעַ)로 살짝 비틀었다. 게다가 실제 두 사람에 대한 사건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니 역대기에 기술된 ‘암미엘의 딸 밧수아’에서 다윗과의 탈선을 연상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라헬은 아들을 낳고 하나님이 내 부끄러움을 ‘씻으셨다’(אָסַף)고 고백하고 그 이름을 ‘요셉’(יוֹסֵף)이라 부른다(창 30:23-24). 여기서 두 동사가 만난다. 라헬의 명명에 ‘아샆’와 ‘야샆’이 대조적으로 맞물려 있는 것이다. 그녀가 불임으로 겪었던 수치를 ‘없애고’(아샆), 아들을 하나 ‘더하게’(야샆) 되었다. 라헬의 수모는 요셉의 탄생으로 해소되었다. 그렇다면 요셉은 ‘모으는’ 삶, 곧 ‘덧셈’을 살았을까? 토마스 만의 4부작 ‘요셉과 형제들’은 창세기의 요셉 이야기를 아마르나 시대를 배경으로 작가적 상상력을 더한다. 그렇다고 단지 역사와 소설 분량의 확장으로만 이해하면 곤란하다. 다시 말해 ‘하나님, 형제, 악마’에 관한 진지한 고민을 긴 호흡으로 풀어낸다. 요셉은 씨앗과 추수의 신”으로 축복받지만 형들의 지나친 모함과 질투로 극심한 고초를 겪는다. 요셉의 어원을 함께 살펴볼 수 있는 훌륭한 참고자료다.


한 부족의 신화에 갇혀 있던 청년이 세상의 한 복판에 내던져진 채 홀로 역사를 배우며 성장하는 과정이다. 요셉은 점점 나락으로 떨어지는 시련과 좌절을 극복하고 마침내 이집트의 ‘창고지기’에 올라 ‘악마’ 형들을 마주한다. 두어 차례 형들을 곤경에 빠뜨려 보복하는 듯했으나 결국에는 형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힌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날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도다”(창 50:20). 토마스 만은 여기서 요셉이 그의 잘난 체하던 허세와 과시에 대하여 형들의 용서를 비는 장면을 포착한다.


저의 미성숙 때문에 형들을 자극하고 범죄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것을 선으로 바꾸시어 많은 사람을 살게 하고 저 또한 성숙하게 하셨습니다. 용서를 빌어야 한다면, 제가 오히려 형님들께 간청해야 합니다.


요셉은 부모와 형제들을 고센에 정착하도록 돕고 보살핀다. 우리말의 ‘거두다’ 또한 히브리어 동사 ‘아샆’ (אָסָף)과 야샆’(יָסָף)을 동시에 내포한다. 열매를 ‘거두다’(사 62:9)는 수확을 의미하지만, 자녀를 ‘거두다’는 (약점을) 덮고 ‘보살피다’를 가리킨다(시 27:10). 요셉은 자신을 노예로 팔아 넘긴 형들의 허물과 잘못을 ‘가리고,’ 부모를 비롯한 모든 형제들을 이집트에 ‘모아’ 그들의 영혼과 생명까지 ‘거둔다.’ 어머니의 소원은 아들을 하나 더 달라는 것이었으나 요셉은 ‘더하고 모으는’ 삶에서 ‘베풀고 나누는’ 사람(der Ernährer)이 되었다. 애벌레가 탈바꿈하여 더 크고 너른 세상을 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