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점일획


θεραπεύω(테라퓨오, 고치다)에 대하여

김범식
2023-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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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사역을 흔히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한다. 하나는 가르침(teaching)이고, 다른 하나는 치유사역(healing)이다.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을 복음서 저자들은 그렇게 서술하였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마 4:23).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그 제자의 많은 무리와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받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눅 6:17).

예수의 가르침은 치유 사역과 함께 진행되었고, 특별히 병든 자들과 장애인들이 예수를 통하여 치유 받는 자리에서 복음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서 61장을 인용하면서 메시아의 사역이 그런 사역인 것으로 선포하였다(눅 4:18). 또한 감옥에 갇힌 세례요한에게 전하도록 하시는 주님의 말씀은 메시아의 증거가 장애인과 나병 환자가 치유되고, 죽은 자가 살아나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라 메시아에 대한 선지자들의 비전을 인용하며 말하였다(마 11:5-6).

‘치료하다’ 혹은 ‘병 고치다’라는 뜻의 단어로서 θεραπεύω(테라퓨오)를 사용하는데,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43번 나온다. 그 중에 마태복음에 16번, 누가복음에 14번, 사도행전에 5번, 마가복음에 5번이 나온다. 예수의 사역에서 병 고침의 사역이 두드러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단어는 원래 고전 헬라어에서 세속적 용어로 사용되어, 사람과의 관계에서 “섬기다”(serve)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종이 주인을 섬기는 것, 혹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섬기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동사 θεραπεύω(테라퓨오)였다. 드물게는 종교적인 측면에서 ‘신을 섬기다’의 용례로 사용되었고, 의사가 환자를 돌보거나 의학적 치료를 하는 것에 사용되었다. 치료의 개념에는 육신의 치료뿐만 아니라, 몸과 영혼의 치유를 뜻하는 신적인 도움을 말하기도 하였다.

헬라어 구약성경(LXX) 에스더 책에는 모르드개가 “왕궁 문에 앉은 자’라고 하는 표현하면서 ‘왕궁 문을 섬기다’(θεραπεύω, 테라퓨오)라며, 어떤 관료적 직위를 가진 왕의 신하인 것을 말하고 있다(에 2:19; 6:10). θεραπεύω(테라퓨오)의 현재분사형은 주인이나 왕을 섬기는 종(servant)을 뜻하였다(사 54:17). 이 단어는 육체적 치료나 마음과 영혼의 돌봄을 뜻하는 단어로서 유대교 문학에서 사용되었다.

예수 당시의 유대교는 육체적 치유를 행하는 기적행위자에 대한 의심과 거부감이 분명히 있었다. 갈릴리 순회사역을 하며 치유사역과 권능을 행하던 예수는 잠시 고향 나사렛 마을을 방문하였는데, 나사렛에서는 제한된 치유사역을 하였을 뿐이고, 갈릴리의 다른 마을처럼 권능을 보여주지 못하였다고 기록한다(막 6:5). 이것은 나사렛 사람들이 육신의 치유에 대한 기적행위자의 행위를 불신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요셉의 아들 예수의 성장과정을 지켜보았던 그들이기에 불신한 것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육신치유에 대한 치유행위를 믿지 못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기적행위자에 대한 유대교의 근본적 거부감일 수도 있고, 떠돌이 치유마술사들이나 기적행위자의 주장을 거짓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예수의 치유행위를 바알세불의 힘을 이용한 마술적 행위로 간주한 유대교 지도자들이었다(마 12:22-30; 막 3:20-30).

복음서 저자가 기록하는 예수의 치료행위는 단순히 치유행위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예수의 치유행위를 따라할 수 있었던 제자들이었지만, 그 치료행위가 가능하지 않았던 순간들이 제자들에게 있었다(마 17:16). 이것은 예수의 치료사역이 단순히 치료목적만을 가진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호칭하며,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라고 소리지르는 귀신들의 질문과 축귀의 역사는 축귀를 통한 치유가 결코 단순한 치료가 아님을 보여준다(마 8:28-34; 막 5:1-20).

예수의 치료행위는 육체적 치료라는 실제적 사건이기도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의미하는 상징적 행위와 깊이 연관된 것이었다. ‘치료의 이적’을 메시아의 증거로 요구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는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고 말하며 인자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이방인에게까지 전파되는 복음의 역사만을 이야기하였다(마 12:38-42).

예수의 힘을 전수받았다고 생각한 제자들은 치료행위를 계속할 수 없었다. 사도들과 교회의 치유사역은 절대적으로 복음전파와 함께 하는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단순히 치료행위를 하는 과시하는 치료사역은 예수와 성령의 사역과 관련없는 것이다.

신약성경에서 θεραπεύω(테라퓨오)는 ‘치유’를 나타나내는 동사이지만, 오직 사도행전 17:25에서만 고전 헬라어의 일반적 용례로 사용되었다.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θεραπεύεται테라퓨에타이, served)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단순한 치유행위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이 아니었다. 죄인과 함께 교제한다고 비방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예수는 병든 자에게 의사가 필요한 것처럼, 죄인에게 회개와 구원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 자신이 온 것이라고 말씀한다(막 2:27; 눅 5:3132). 육신의 치유는 영혼구원을 위한 메시아의 전인적 치유 사역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