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
지금 마가복음은 16:20절로 끝나지만, 초기 사본들은 16:8에서 끝나고 후대 사본들에만 그 뒷 부분은 포함되어 있다. 성경을 유심히 보면, 9-10절은 [ ]로 묶여 있다. 그 부분이 후대 사본에만 나온다는 표시이다. 이로부터 16;8에서 끝나는 "원 마가복음"이 있었다고 학자들은 추정한다. 이 이론을 따르자면, 첫 복음서 마가복음을 끝맺는 단어가 '포페오'φοβέω이다. 아니 정확하게는 ἐφοβοῦντο γάρ(에포분토 가르)라는 짧은 문장으로 끝난다. 이 문장은 성경 해석자들에게 많은 어려움을 주었다. '가르'γάρ가 접속사인데, 문장이 접속사로 끝나는 점이 낯설었기 때문이고, 복음서의 마지막이 "두려워하였다"인 점도 어색하였기 때문이다.
'가르'는 종속절을 이끌며, 주문장의 일이 발생하게 된 "원인, 이유"를 설명하는 접속사이다. 예를 들어, 마가복음 1장 22절을 보자.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에 놀랐다. 예수께서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 있게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이 두 문장에서, 뒷 문장은 앞 문장의 "원인"을 설명하는 문장인데, 이를 위해 뒷 문장을 이끄는 접속사가 '가르'이고 이 구절에서는 "때문이다"로 번역되었다.
ἐφοβοῦντο γάρ (에보분토 가르)
마가복음 16:8의 마지막 문장인데, 문장이 두 단어로 이루어졌다. 뒤에 온 단어 '가르'는 후치접속사로 늘 문장의 두 번째 단어 자리에 온다. 앞에 온 단어 '포베오'는 자동사로도 사용되어 목적어 없이 사용될 수 있다. 이 두 가지를 이해한다면, 원 마가복음의 마지막 문장이 낯설 이유가 없다. '가르'가 후치접속사이기 때문에 '포베오' 다음에 온 것일 뿐이다. 후치가 아니었다면 문장은 γάρ ἐφοβοῦντο(가르 에포분토)가 되었을 것이다. 이러거나 저러거나 뜻은 같다. (예수의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이 아무에게 아무 말도 못한 것은) 그들이 두려워하였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다소 길게 이 짧은 문장에 대해 설명한 이유는, 원 마가복음을 닫는 단어는 형식상으로는 '가르'이지만, 의미상으로는 '포베오'라는 점을 이야기하기 위해서이다. '가르'는 문법적 관습에 의해 뒤에 온 것이지 내용적으로는 종속절을 이끄는 접속사일 뿐이다. 이 문장을 "그들은 두려워하였다. 왜냐하면..."으로 해석한 다음, 원 마가복음의 끝이 '가르'를 통하여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는 열린 결론이라는 식으로, '가르' 중심으로 해석하면 곤란하다. 의미상 마지막 단어는 '포베오'이다. "그들은 두려워하였다." 그렇게 원 마가복음은 두려움으로 끝난다. 예수의 죽음은 체험하였지만, 예수의 부활은 아직 체험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경험하는 제자들의 두려움을 표현하며 끝맺은 것이다.
II.
두려움에 빠진 제자들 이야기로 마가복음이 끝난 반면, 복음서에는 μὴ φοβηθῆτε(메 포베쎄테)라는 명령법이 자주 등장한다. "두려워하지 말아라"는 뜻이다. 마태복음 10:31/누가복음 12:7 병행구가 대표적이다. 이 본문 속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근거로 1)두려움의 대상이 된 세상 권세자이 아니라 창조주-심판주이신 하나님이야 말로 두려워할 대상인데, 2)그 하나님께서 너희를 돌보시는 분이시니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자주 겁에 질렸고, 그때마다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아라"며 용기를 주셨다.
물위를 걸어 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유령이라며 겁에 질렸을 때(마14:27, 막6:50 , 요6:20)
변화산에서 구름 속에서 들리는 음성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 . ."를 듣고 제자들이 얼굴을 땅에 대고 몹시 두려워하였을 때(마 17:7)
회장당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회당장을 향하여(막5:36, 눅8:50)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가 잡힌 후 두려워하는 야고보와 요한에게(눅5:10)
"두려워하지 말아라"는 메시지는 복음서 밖에서도 발견된다. 예를 들어,
그러나 정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여러분은 복이 있습니다. 그들의 위협을 무서워하지 말며, 흔들리지 마십시오.(히3:14)
예수님은 우리를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하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힘입어 죽음 앞에서 담대할 수 있다.
또 일생 동안 죽음의 공포 때문에 종노릇하는 사람들을 해방시키시기 위함이었습니다.(히2:15)
요한일서는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이긴다고 한다. 이때 두려움은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구절을 '사랑하면 겁이 없어진다'는 식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사랑의 계명을 지킨 사람에게는 심판이 있을 수 없으니, 심판의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된다는 뜻이다.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되었다는 사실은 이 점에 있으니, 곧 우리로 하여금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담대해지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사신 대로 또한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렇게 살기 때문입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두려움은 징벌과 관련이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요일4:17-18)
III.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태도는 "두려워해야 한다"로 표현되었다. 이때 두려움은 "경외"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하다.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였다. "나는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가리지 아니하시는 분이시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가 어느 민족에 속하여 있든지, 다 받아 주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행10:34-35)
여러분은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그러나 그 자유를 악을 행하는 구실로 쓰지 말고, 하나님의 종으로 사십시오. 모든 사람을 존중하며, 믿음의 식구들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십시오.(벧전2:16-17)
그는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려라.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가 이르렀다.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의 근원을 만드신 분께 경배하여라."(계14:7)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우리를 회개로 인도한다. 또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태도는 신앙적으로 건강한 상태임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두려운 분이심을 알기에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 앞에서 환히 드러났습니다. 여러분의 양심에도 우리가 환히 드러나기를 바랍니다.(고후5:11)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는 이러한 약속이 있으니, 육과 영의 모든 더러움에서 떠나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온전히 거룩하게 됩시다.(고후7:1)
그러는 동안에 교회는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온 지역에 걸쳐서 평화를 누리면서 튼튼히 서 갔고, 주님을 두려워하는 마음과 성령의 위로로 정진해서, 그 수가 점점 늘어갔다.(행9:31)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죄악 속에 빠지기 쉽다. 그래서 죄악 속에 있는 인간의 실존에 대한 한마디 표현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태도"이다.
"그들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롬3:18)
Iv.
"두려워하다"가 긍정적 의미로 쓰이는 경우도 있다. 좋은 일을 위해 염려를 많이 하다라는 뜻으로 쓰이는 경우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안식에 들어가리라는 약속이 아직 남아 있는 동안에, 여러분 가운데서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도록, 두려운 마음으로 조심하십시오.(히4:1)
그러나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뱀이 그 간사한 꾀로 하와를 속인 것과 같이, 여러분의 생각이 부패해서,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대한 진실함[과 순결함]을 저버리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고후11:3)
그리고 사람을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분을 여러분이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으니, 여러분은 나그네 삶을 사는 동안 두려운 마음으로 살아가십시오.(벧전1:17)
죄를 짓는 사람을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서, 나머지 사람들도 두려워하게 하십시오.(딤전 5:20)
V.
두려워하지 말아라/두려워하라. 이렇게 성경에는 두려움과 관련한 두 상반되는 권면이 교차하고 있다. 한마디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은 두려워하지 말고, 두려워할 분을 두려워하고 두려워할 때에 두려워하라는 말이다. 이런 상반되는 권면을 가장 잘 표현해 주는 본문은 위에서 언급한 누가복음 12장 4-7절이다(마태18:28-31). 이 본문은 다음과 같이 세 문단으로 나눌 수 있는데, 각 문단을 통하여 "두려워하지 말아라" - "두려워하라" - "두려워하지 말아라"가 교차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내 친구인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육신은 죽여도 그 다음에는 그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희가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를 내가 보여 주겠다. 죽인 다음에 지옥에 던질 권세를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분을 두려워하여라. 참새 다섯 마리가 두 냥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하나라도, 하나님께서는 잊고 계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너희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고 계신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수사학 2권 5장에서 두려움에 대해 정의하기를 "두려움은 파괴나 고통을 야기할 임박한 위험을 생각할 때 느끼는 일종의 고통 또는 불안"이라고 하였다. 핵심어는 "임박한"이다. 아무리 큰 위험이라도 임박해 있지 않으면 걱정은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우리가 불의해 지거나 아둔해 지는 것은 큰 문제이지만, 눈 앞의 작은 문제에 비해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 결과가 멀리 있기 때문이다. 두려운 대상은 가까이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런 임박한 위험의 예로 "힘있는 사악함"을 들었다. 불의한 권력자들이 힘을 갖고 그것을 행사하면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라는 말이다.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두려움의 반대말로 자신감을 제시하면서, "자신감은 우리를 구원해주는 것은 가까이 있고, 두려운 것은 없거나 멀리 있다는 생각에 따르는 기대"라고 정의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두려움/자신감에 관한 정의는 위의 예수님 말씀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며 거기 있는 사악한 권력자들에게 두려움을 느끼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물으신 것이다. 누가 가까이 있느냐? 사악한 권력자이냐 아니면 창조주 하나님이냐? 사악한 권력자와 비교할 수 없는 능력을 가진 창조주 하나님께서 네 곁에 "머리카락을 셀 수 있을만큼" 가까이 계시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두려워해야 할 분은 오직 한분 하나님이시니, 다른 어떤 존재도 두려워하지 말아라.
I.
지금 마가복음은 16:20절로 끝나지만, 초기 사본들은 16:8에서 끝나고 후대 사본들에만 그 뒷 부분은 포함되어 있다. 성경을 유심히 보면, 9-10절은 [ ]로 묶여 있다. 그 부분이 후대 사본에만 나온다는 표시이다. 이로부터 16;8에서 끝나는 "원 마가복음"이 있었다고 학자들은 추정한다. 이 이론을 따르자면, 첫 복음서 마가복음을 끝맺는 단어가 '포페오'φοβέω이다. 아니 정확하게는 ἐφοβοῦντο γάρ(에포분토 가르)라는 짧은 문장으로 끝난다. 이 문장은 성경 해석자들에게 많은 어려움을 주었다. '가르'γάρ가 접속사인데, 문장이 접속사로 끝나는 점이 낯설었기 때문이고, 복음서의 마지막이 "두려워하였다"인 점도 어색하였기 때문이다.
'가르'는 종속절을 이끌며, 주문장의 일이 발생하게 된 "원인, 이유"를 설명하는 접속사이다. 예를 들어, 마가복음 1장 22절을 보자.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에 놀랐다. 예수께서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 있게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이 두 문장에서, 뒷 문장은 앞 문장의 "원인"을 설명하는 문장인데, 이를 위해 뒷 문장을 이끄는 접속사가 '가르'이고 이 구절에서는 "때문이다"로 번역되었다.
ἐφοβοῦντο γάρ (에보분토 가르)
마가복음 16:8의 마지막 문장인데, 문장이 두 단어로 이루어졌다. 뒤에 온 단어 '가르'는 후치접속사로 늘 문장의 두 번째 단어 자리에 온다. 앞에 온 단어 '포베오'는 자동사로도 사용되어 목적어 없이 사용될 수 있다. 이 두 가지를 이해한다면, 원 마가복음의 마지막 문장이 낯설 이유가 없다. '가르'가 후치접속사이기 때문에 '포베오' 다음에 온 것일 뿐이다. 후치가 아니었다면 문장은 γάρ ἐφοβοῦντο(가르 에포분토)가 되었을 것이다. 이러거나 저러거나 뜻은 같다. (예수의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이 아무에게 아무 말도 못한 것은) 그들이 두려워하였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다소 길게 이 짧은 문장에 대해 설명한 이유는, 원 마가복음을 닫는 단어는 형식상으로는 '가르'이지만, 의미상으로는 '포베오'라는 점을 이야기하기 위해서이다. '가르'는 문법적 관습에 의해 뒤에 온 것이지 내용적으로는 종속절을 이끄는 접속사일 뿐이다. 이 문장을 "그들은 두려워하였다. 왜냐하면..."으로 해석한 다음, 원 마가복음의 끝이 '가르'를 통하여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는 열린 결론이라는 식으로, '가르' 중심으로 해석하면 곤란하다. 의미상 마지막 단어는 '포베오'이다. "그들은 두려워하였다." 그렇게 원 마가복음은 두려움으로 끝난다. 예수의 죽음은 체험하였지만, 예수의 부활은 아직 체험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경험하는 제자들의 두려움을 표현하며 끝맺은 것이다.
II.
두려움에 빠진 제자들 이야기로 마가복음이 끝난 반면, 복음서에는 μὴ φοβηθῆτε(메 포베쎄테)라는 명령법이 자주 등장한다. "두려워하지 말아라"는 뜻이다. 마태복음 10:31/누가복음 12:7 병행구가 대표적이다. 이 본문 속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근거로 1)두려움의 대상이 된 세상 권세자이 아니라 창조주-심판주이신 하나님이야 말로 두려워할 대상인데, 2)그 하나님께서 너희를 돌보시는 분이시니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자주 겁에 질렸고, 그때마다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아라"며 용기를 주셨다.
물위를 걸어 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유령이라며 겁에 질렸을 때(마14:27, 막6:50 , 요6:20)
변화산에서 구름 속에서 들리는 음성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 . ."를 듣고 제자들이 얼굴을 땅에 대고 몹시 두려워하였을 때(마 17:7)
회장당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회당장을 향하여(막5:36, 눅8:50)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가 잡힌 후 두려워하는 야고보와 요한에게(눅5:10)
"두려워하지 말아라"는 메시지는 복음서 밖에서도 발견된다. 예를 들어,
그러나 정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여러분은 복이 있습니다. 그들의 위협을 무서워하지 말며, 흔들리지 마십시오.(히3:14)
예수님은 우리를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하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힘입어 죽음 앞에서 담대할 수 있다.
또 일생 동안 죽음의 공포 때문에 종노릇하는 사람들을 해방시키시기 위함이었습니다.(히2:15)
요한일서는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이긴다고 한다. 이때 두려움은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구절을 '사랑하면 겁이 없어진다'는 식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사랑의 계명을 지킨 사람에게는 심판이 있을 수 없으니, 심판의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된다는 뜻이다.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되었다는 사실은 이 점에 있으니, 곧 우리로 하여금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담대해지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사신 대로 또한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렇게 살기 때문입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두려움은 징벌과 관련이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요일4:17-18)
III.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태도는 "두려워해야 한다"로 표현되었다. 이때 두려움은 "경외"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하다.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였다. "나는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가리지 아니하시는 분이시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가 어느 민족에 속하여 있든지, 다 받아 주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행10:34-35)
여러분은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그러나 그 자유를 악을 행하는 구실로 쓰지 말고, 하나님의 종으로 사십시오. 모든 사람을 존중하며, 믿음의 식구들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십시오.(벧전2:16-17)
그는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려라.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가 이르렀다.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의 근원을 만드신 분께 경배하여라."(계14:7)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우리를 회개로 인도한다. 또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태도는 신앙적으로 건강한 상태임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두려운 분이심을 알기에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 앞에서 환히 드러났습니다. 여러분의 양심에도 우리가 환히 드러나기를 바랍니다.(고후5:11)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는 이러한 약속이 있으니, 육과 영의 모든 더러움에서 떠나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온전히 거룩하게 됩시다.(고후7:1)
그러는 동안에 교회는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온 지역에 걸쳐서 평화를 누리면서 튼튼히 서 갔고, 주님을 두려워하는 마음과 성령의 위로로 정진해서, 그 수가 점점 늘어갔다.(행9:31)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죄악 속에 빠지기 쉽다. 그래서 죄악 속에 있는 인간의 실존에 대한 한마디 표현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태도"이다.
"그들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롬3:18)
Iv.
"두려워하다"가 긍정적 의미로 쓰이는 경우도 있다. 좋은 일을 위해 염려를 많이 하다라는 뜻으로 쓰이는 경우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안식에 들어가리라는 약속이 아직 남아 있는 동안에, 여러분 가운데서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도록, 두려운 마음으로 조심하십시오.(히4:1)
그러나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뱀이 그 간사한 꾀로 하와를 속인 것과 같이, 여러분의 생각이 부패해서, 여러분이 그리스도께 대한 진실함[과 순결함]을 저버리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고후11:3)
그리고 사람을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분을 여러분이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으니, 여러분은 나그네 삶을 사는 동안 두려운 마음으로 살아가십시오.(벧전1:17)
죄를 짓는 사람을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서, 나머지 사람들도 두려워하게 하십시오.(딤전 5:20)
V.
두려워하지 말아라/두려워하라. 이렇게 성경에는 두려움과 관련한 두 상반되는 권면이 교차하고 있다. 한마디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은 두려워하지 말고, 두려워할 분을 두려워하고 두려워할 때에 두려워하라는 말이다. 이런 상반되는 권면을 가장 잘 표현해 주는 본문은 위에서 언급한 누가복음 12장 4-7절이다(마태18:28-31). 이 본문은 다음과 같이 세 문단으로 나눌 수 있는데, 각 문단을 통하여 "두려워하지 말아라" - "두려워하라" - "두려워하지 말아라"가 교차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내 친구인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육신은 죽여도 그 다음에는 그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희가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를 내가 보여 주겠다. 죽인 다음에 지옥에 던질 권세를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분을 두려워하여라. 참새 다섯 마리가 두 냥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하나라도, 하나님께서는 잊고 계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너희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고 계신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수사학 2권 5장에서 두려움에 대해 정의하기를 "두려움은 파괴나 고통을 야기할 임박한 위험을 생각할 때 느끼는 일종의 고통 또는 불안"이라고 하였다. 핵심어는 "임박한"이다. 아무리 큰 위험이라도 임박해 있지 않으면 걱정은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우리가 불의해 지거나 아둔해 지는 것은 큰 문제이지만, 눈 앞의 작은 문제에 비해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 결과가 멀리 있기 때문이다. 두려운 대상은 가까이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런 임박한 위험의 예로 "힘있는 사악함"을 들었다. 불의한 권력자들이 힘을 갖고 그것을 행사하면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라는 말이다.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두려움의 반대말로 자신감을 제시하면서, "자신감은 우리를 구원해주는 것은 가까이 있고, 두려운 것은 없거나 멀리 있다는 생각에 따르는 기대"라고 정의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두려움/자신감에 관한 정의는 위의 예수님 말씀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며 거기 있는 사악한 권력자들에게 두려움을 느끼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물으신 것이다. 누가 가까이 있느냐? 사악한 권력자이냐 아니면 창조주 하나님이냐? 사악한 권력자와 비교할 수 없는 능력을 가진 창조주 하나님께서 네 곁에 "머리카락을 셀 수 있을만큼" 가까이 계시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두려워해야 할 분은 오직 한분 하나님이시니, 다른 어떤 존재도 두려워하지 말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