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들어가는 말
인간은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이라고 부르며 피조세계의 대장 노릇하기를 즐겨한다. 그러나 성서는 인간은 피조세계의 한 구성원이며 흙에서 나와서 흙으로 돌아가는(창 3:19; 전 3:20; 12:7; 욥 4:19; 8:19; 10:9; 34:15; 시 104:29) 유한적 존재임을 되풀이해서 알려준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도 아니지만 티끌과 같은 무상한 가치없는 존재도 아닌,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 살아가는 소중한 존재이다.
창세기 2장 7절은 최초 인간의 창조를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아담을 아다마(땅, אֲדָמָה)의 아파르(עָפָר)로 만드셨다”고 묘사한다. 히브리어 아파르(עָפָר)는 우가릿어('pr)와 아카드어(eperu), 그리고 아라비아어('afarun)과 동족어이다. 그 뜻은 '티끌, 먼지, 지면의 가루, 부스러기'를 뜻한다. 아마르나 가나안(Amarna Canaanite)에서는 이 단어가 haparu(='aparu)로 발견되었다. 히브리 남성명사인 아파르(עָפָר)는 구약에서 '티끌 혹은 먼지,' 즉 '땅의 마르고 가는 가루'를 뜻하는 용어로 스트롱스에 따르면 총 110회 사용된다. 이 땅 위에 티끌이 많고 널리 퍼져있기 때문에 아브라함에게 수 많은 후손을 약속할 때 비유로 사용되었다.(창 13:6) 티끌은 눈에 잘 보이지 않고 너무 흔하기 때문에 가치 없는 어떤 것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습 1:17) 또한 가벼운 성격 때문에 흩어지는 것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왕하 13:7)
아파르(עָפָר)는 구약에서 통상 '재'로 번역되는 동의 명사 에페르(אֵפֶר)와 짝말로 나온다. 에페르(אֵפֶר)는 구약에서 21회 나온다. 재는 애통의 전통적인 표시였다(사 61:3). 베옷(사크, שַׂק)을 입고 잿더미 위에 앉아 있는 행위는 비통과 회개의 표시이며, 금식의 표시이기도 했다. (삼하 13:19; 사 58:5; 렘 6:26; 겔 27:30; 욘 3:6; 단 9:3; 에 4:1) 애곡의 상징으로 재를 하늘로 던져 머리로 뒤집어 쓴다.(욥 2:8)
아파르(עָפָר)와 에페르(אֵפֶר)는 언어유희(paronomasia)를 이루어 중언법으로 구약에 세 번 언급된다.(창 18:27; 욥 30:19; 42:6) 한국어 음역으로 읽어만 봐도, 이 짝말이 모음만 다르고 자음이 같아 반복되는 음율을 느낄 수 있다. 두 말이 짝을 이루어 인간의 존재 정체성을 묘사한다. 즉, 아파르 봐에페르(עָפָר וָאֵפֶר)로서 인간은 티끌로 만들어진, 그리고 살다가 재로 사라질, 그 자체로는 무색무취(생명없음)의 존재이다. 이는 '가치없는 존재'라기보다 '생명이 없는 무상의 존재'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맞다. 이러한 무상적 존재가 생명체로 살아나 유의미한 존재가 되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숨(너샤마, נְשָׁמָה 창 2:7)을 불어넣어주신 은총 때문이다. 결국 아파르 봐에페르(עָפָר וָאֵפֶר)는 인간의 비천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의 본질을 표현해주는 짝말이다. 갓난아기가 부모에게 의존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고 가치없는 존재가 아닌 것과 같다.
그럼에도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고난 상황에 처하면 자신을 버려져서 비천하고 쓸모없게 되어버린 존재라고 쉽게 한탄한다. 욥도 마찬가지였다. 욥기에는 이 짝말이 30:19와 42:6에 두 번 언급되는 데, 30:19에서 욥은 이 짝말을 자신이 비천한 존재로 떨어진 처지를 애통해하면서 사용한다. 그러나 폭풍우 가운데서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 그분의 창조주로서의 위엄과 피조물을 향한 사랑을 목격한 후, 이제 자신의 예전 생각을 거두고 아파르 봐에페르(עָפָר וָאֵפֶר)란 단어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됨을 하나님께 고백한다. 두 절을 직역하면 그 차이를 더 분명하게 볼 수 있다.
הֹרָ֥נִי לַחֹ֑מֶר וָ֜אֶתְמַשֵּׁ֗ל כֶּעָפָ֥ר וָאֵֽפֶר׃ (호라니 라호멜 봐에트맛셀 케아파르 봐에페르)
나를 진흙 가운데 던지시니, 내가 아파르 봐에페르(티끌과 재)처럼 되었구나 (욥 30:19)
עַל־כֵּ֭ן אֶמְאַ֣ס וְנִחַ֑מְתִּי עַל־עָפָ֥ר וָאֵֽפֶר׃ (알-켄 에메아쓰 베니함티 알-아파르 봐에페르)
그리하여 내가 (예전 생각을) 거두고, 아파르 봐에페르(티끌과 재)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욥 42:6)
전통적으로 '회개하다'로 번역된 동사 나함(נָחַם)은 '다시 생각하다'는 뜻도 있고, 잿더미 위에서 회개하는 장면을 묘사하는 장면에서 두 단어의 짝말이 나온 경우가 없다. 뿐만 아니라, 욥기 전체의 주제가 욥이 죄가 없음에도 고난을 받은 내용을 다루고 있음을 고려할 때, 42:6을 회개의 전형적인 장면으로 보기 어렵다. 욥이 만일 회개했다면, 그의 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소중하게 여기는 생명(욥 자신)을 버림받은 비천한 존재로 비하했던 잘못된 생각이다.
우리도 고난이 찾아오거나, 일이 내 뜻데로 풀리지 않을 때, 욥기 30장 19절에서의 욥처럼 하나님께 버려진 비천한 존재로 애통하며, “어찌하여”를 외치기 보다, 욥기 42장 6절의 욥처럼 나를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고 내 눈의 방향을 바꿔 주를 바라보고 인내하는 신앙인이 되기를 바란다.
1. 들어가는 말
인간은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이라고 부르며 피조세계의 대장 노릇하기를 즐겨한다. 그러나 성서는 인간은 피조세계의 한 구성원이며 흙에서 나와서 흙으로 돌아가는(창 3:19; 전 3:20; 12:7; 욥 4:19; 8:19; 10:9; 34:15; 시 104:29) 유한적 존재임을 되풀이해서 알려준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도 아니지만 티끌과 같은 무상한 가치없는 존재도 아닌,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 살아가는 소중한 존재이다.
창세기 2장 7절은 최초 인간의 창조를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아담을 아다마(땅, אֲדָמָה)의 아파르(עָפָר)로 만드셨다”고 묘사한다. 히브리어 아파르(עָפָר)는 우가릿어('pr)와 아카드어(eperu), 그리고 아라비아어('afarun)과 동족어이다. 그 뜻은 '티끌, 먼지, 지면의 가루, 부스러기'를 뜻한다. 아마르나 가나안(Amarna Canaanite)에서는 이 단어가 haparu(='aparu)로 발견되었다. 히브리 남성명사인 아파르(עָפָר)는 구약에서 '티끌 혹은 먼지,' 즉 '땅의 마르고 가는 가루'를 뜻하는 용어로 스트롱스에 따르면 총 110회 사용된다. 이 땅 위에 티끌이 많고 널리 퍼져있기 때문에 아브라함에게 수 많은 후손을 약속할 때 비유로 사용되었다.(창 13:6) 티끌은 눈에 잘 보이지 않고 너무 흔하기 때문에 가치 없는 어떤 것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습 1:17) 또한 가벼운 성격 때문에 흩어지는 것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왕하 13:7)
아파르(עָפָר)는 구약에서 통상 '재'로 번역되는 동의 명사 에페르(אֵפֶר)와 짝말로 나온다. 에페르(אֵפֶר)는 구약에서 21회 나온다. 재는 애통의 전통적인 표시였다(사 61:3). 베옷(사크, שַׂק)을 입고 잿더미 위에 앉아 있는 행위는 비통과 회개의 표시이며, 금식의 표시이기도 했다. (삼하 13:19; 사 58:5; 렘 6:26; 겔 27:30; 욘 3:6; 단 9:3; 에 4:1) 애곡의 상징으로 재를 하늘로 던져 머리로 뒤집어 쓴다.(욥 2:8)
아파르(עָפָר)와 에페르(אֵפֶר)는 언어유희(paronomasia)를 이루어 중언법으로 구약에 세 번 언급된다.(창 18:27; 욥 30:19; 42:6) 한국어 음역으로 읽어만 봐도, 이 짝말이 모음만 다르고 자음이 같아 반복되는 음율을 느낄 수 있다. 두 말이 짝을 이루어 인간의 존재 정체성을 묘사한다. 즉, 아파르 봐에페르(עָפָר וָאֵפֶר)로서 인간은 티끌로 만들어진, 그리고 살다가 재로 사라질, 그 자체로는 무색무취(생명없음)의 존재이다. 이는 '가치없는 존재'라기보다 '생명이 없는 무상의 존재'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맞다. 이러한 무상적 존재가 생명체로 살아나 유의미한 존재가 되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숨(너샤마, נְשָׁמָה 창 2:7)을 불어넣어주신 은총 때문이다. 결국 아파르 봐에페르(עָפָר וָאֵפֶר)는 인간의 비천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의 본질을 표현해주는 짝말이다. 갓난아기가 부모에게 의존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고 가치없는 존재가 아닌 것과 같다.
그럼에도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고난 상황에 처하면 자신을 버려져서 비천하고 쓸모없게 되어버린 존재라고 쉽게 한탄한다. 욥도 마찬가지였다. 욥기에는 이 짝말이 30:19와 42:6에 두 번 언급되는 데, 30:19에서 욥은 이 짝말을 자신이 비천한 존재로 떨어진 처지를 애통해하면서 사용한다. 그러나 폭풍우 가운데서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 그분의 창조주로서의 위엄과 피조물을 향한 사랑을 목격한 후, 이제 자신의 예전 생각을 거두고 아파르 봐에페르(עָפָר וָאֵפֶר)란 단어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됨을 하나님께 고백한다. 두 절을 직역하면 그 차이를 더 분명하게 볼 수 있다.
הֹרָ֥נִי לַחֹ֑מֶר וָ֜אֶתְמַשֵּׁ֗ל כֶּעָפָ֥ר וָאֵֽפֶר׃ (호라니 라호멜 봐에트맛셀 케아파르 봐에페르)
나를 진흙 가운데 던지시니, 내가 아파르 봐에페르(티끌과 재)처럼 되었구나 (욥 30:19)
עַל־כֵּ֭ן אֶמְאַ֣ס וְנִחַ֑מְתִּי עַל־עָפָ֥ר וָאֵֽפֶר׃ (알-켄 에메아쓰 베니함티 알-아파르 봐에페르)
그리하여 내가 (예전 생각을) 거두고, 아파르 봐에페르(티끌과 재)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욥 42:6)
전통적으로 '회개하다'로 번역된 동사 나함(נָחַם)은 '다시 생각하다'는 뜻도 있고, 잿더미 위에서 회개하는 장면을 묘사하는 장면에서 두 단어의 짝말이 나온 경우가 없다. 뿐만 아니라, 욥기 전체의 주제가 욥이 죄가 없음에도 고난을 받은 내용을 다루고 있음을 고려할 때, 42:6을 회개의 전형적인 장면으로 보기 어렵다. 욥이 만일 회개했다면, 그의 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소중하게 여기는 생명(욥 자신)을 버림받은 비천한 존재로 비하했던 잘못된 생각이다.
우리도 고난이 찾아오거나, 일이 내 뜻데로 풀리지 않을 때, 욥기 30장 19절에서의 욥처럼 하나님께 버려진 비천한 존재로 애통하며, “어찌하여”를 외치기 보다, 욥기 42장 6절의 욥처럼 나를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고 내 눈의 방향을 바꿔 주를 바라보고 인내하는 신앙인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