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버이 주일을 앞두고 루디아를 묵상한다. 유럽 최초의 그리스도교 개종자였고, 소아시아 두아디라 출신의 이방인이었고,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유대교에 호감을 가지고 하나님을 공경하는 이였고, 사업가였고, 가장(paterfamilias)이었고, 무엇보다 여성이었다. 그는 초대교회에서 여성 지도력을 상징한다.
루디아는 사도행전 16장에 등장한다. 사도행전 16장은 바울 사도 일행이 처음으로 유럽으로 건너간 이야기가 나오는 장이다.
11 ~15절
우리는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서,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갔고, 거기에서 빌립보에 이르렀다. 빌립보는 마케도니아 지방에서 으뜸가는 도시요, 로마 식민지였다. 우리는 이 도시에서 며칠 동안 묵었는데, 안식일에 성문 밖 강가로 나가서, 유대 사람이 기도하는 처소가 있음직한 곳을 찾아갔다. 우리는 거기에 앉아서, 모여든 여자들에게 말하였다. 그들 가운데 루디아라는 여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색 옷감 장수로서, 두아디라 출신이요,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이었다. 주님께서 그 여자의 마음을 여셨으므로, 그는 바울의 말을 귀담아 들었다. 그 여자가 집안 식구와 함께 세례를 받고나서 "나를 주님의 신도로 여기시면, 우리 집에 오셔서 묵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그리고 우리를 강권해서,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다.
아시아에서 전도길을 성령께서 막으셨을 때, 드로아(오늘날 이름 차나칼레, 옛이름 트로이, 아래 지도 노란색 동그라미)에서 환상을 본다. 마케도니아 사람 하나가 바울 앞에 서서 "마케도니아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간청하는 환상이었다(행 16:9). 이 환상을 보고 바울 사도는 드로아를 떠나 배를 타고 에게해를 건너 네압볼리(오늘날 이름 카발라, 옛이름 네아풀리스, 아래 지도 파란색 동그라미)에 도착한다. 바울 사도가 최초로 유럽 땅에 발을 딛는 순간이다. 바울 사도는 네압볼리에서 전도하지 않고 바로 빌립보(필립파이, 아래 지도 빨간색 동그라미, 오늘날에는 유적지만 남음)로 간다.


-빌립보 배후에 서 있는 바위투성이 산 오르벨로스(Mt.Orbelos)에서 내려본 빌립보-
빌립보는 도시로 발전하는 데 두 가지 중요한 정치적 사건을 만난다. 하나는 이 도시를 마케도니아의 필립2세(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가 정복하고(BC 4세기) 자신의 이름을 이 도시에 붙이고, 도시를 대대적으로 정비한 후 이 도시에 마케도니아 자치도시 지위를 준 일이다. 다른 하나는 빌립보 전투인데, 기원전 42년에 로마 제국의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우스 연합군이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반란군(율리우스 시저 암살)과 벌인 전투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우스(율리우스 시저 계승) 측의 승리로 끝났다. 이 전투에 참가한 군인들 중 은퇴를 하는 인원들이 빌립보에 정착한다. 빌립보는 퇴역 군인들의 도시가 되었는데, 로마 직할시로서 빌립보 시민들은 로마 시민들과 동등한 법적 경제적(세제) 혜택을 누렸다. 거기다 빌립보는 교통의 요지였다. 바울 일행이 들어온 네압볼리에서 8km 정도 떨어져 있었고, 네압볼리에서 시작되어 암비볼리(행 17:1)와 데살로니가, 베뢰아로 이어지는 에그나티아 도로(Via Egnatia)가 빌립보를 지나간다. 가히 마게도니아에서 "으뜸 가는 도시"(행 16:12)라는 말을 들을 만하다.
이 지리적 여건을 따라 루디아가 빌립보에 왔다. 루디아는 두아디라(Thyatira, 오늘날 튀르키예의 Akhisar, 위의 지도에서 오렌지색 동그라미) 출신이다. 그 도시는 예로부터 자색(purple) 염색업이 발달하였다. 두아디라에는 어느 도시보다 많은 염색업 종사자와 그들의 조합이 존재했다.

자색 염색은 당시 가능한 염색 색깔 중 가장 내기 어려운 색이었다. 바닷달팽이에서 추출한 염료로 색을 만들었기 때문인데, 식물에서 색을 만드는 것보다 어렵고 특별한 지식과 기술이 있어야 하는 작업이었다. 식물에서도 자색을 추출할 수 있었지만(Roccella tinctoria (a lichen) and madder root), 달팽이 추출 염료를 최고로 쳤다. 한때 자색은 황제만 입을 수 있는 색이었기 때문에, 자색은 곧 황제의 색이라 여겨졌다. 루디아는 사도행전에서 "자색 옷감 장수"(πορφυρόπωλις포르퓌로폴리스. 이 단어의 뿌리 단어인 πορφύρα포르퓌라에서 영어 purple이 나왔다)로 불린다(행 16:14). 염색 기술자가 아니라 옷감을 떼다 파는 상인이었다. 루디아가 어떤 사연으로 빌립보에 정착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바울 사도의 행로(드로아-네압볼리-빌립보)를 바울 사도 보다 먼저 밟았을 것이다. 빌립보는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도시였다. 고급 직물인 자색 옷감에 대한 수요가 많았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루디아는 두아디라-빌립보를 연결하여 아시아의 자색 옷감을 유럽에 판매하는 상인이 되었고, 그의 사업을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루디아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이었다"(행 16:14). 일전에 일점일획을 통하여 쓴 적 있지만(링크),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εβομένη τὸν θεόν에보메네 톤 쎄온)은 유대인에게 호감을 가지고 유대인의 삶의 방식을 따르는 이방인을 일컫는 말이다. 유대교 개종자와 달리 이들은 완전히 유대인으로 개종한 이들은 아니었고, 유대인 회당 예배에 참여하였는지 여부는 불분명하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루디아의 고향 두아디라에는 유대교 회당이 있었다는 점이 고고학적으로 밝혀졌다. 루디아는 고향에서부터 "세보메노이"로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성문 밖 강가에서 기도하던 이 여성의 마음을 여셨다고 전한다(행 16:13~14). 루디아의 기도는 무엇이었을까? 주님께서 루디아를 바울 사도에 앞서 예비하셨다.
바울 사도의 말을 귀담아들은 루디아는 바울 사도를 자신의 집에 초청하여 자기 집 식구들(ὁ οἶκος αὐτῆς호 오이코스 아우테스)과 함께 세례를 받았다. 유럽에서 처음 세례받고 그리스도교에 입교한 사람은 루디아와 그의 집 식구들이었다. "집 식구"에 사용된 헬라어 οἶκος(오이코스)는 건물로서의 집(house)라는 의미도 있지만 "집에 거하는 식구"(household)라는 의미도 있다. 그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핵가족 개념의 가족(family)은 없었다. 관계로서의 오이코스는 직계 가족은 물론이고 함께 사는 친지, 머물러 사는 객, 그리고 그 집에서 일하는 노예까지 포함하는 말이다. 보통 30-50명 규모로 추정하고, 많게는 2~3천 규모를 이루기도 하였다. 오이코스(집안)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같은 오이코스(이때는 건물로서의 오이코스)에 사는 사람들로 정의할 수도 있지만, 더 정확한 정의는 가장(paterfamilias)의 영향 아래 있는 사람이다. 오이코스의 수장이 가장이었고, 그는 종교를 비롯한 많은 것을 결정하였다. 그가 개종하면 오이코스 구성원 모두가 함께 개종하였다. 루디아는 자기 오이코스의 가장이었고, 그가 개종했을 때 그의 집안 식구 모두 개종한 것이다. 바울을 많이 도운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 중, 남편 아굴라가 있었지만 여성인 브리스길라(Πρίσκιλλα프리스킬라, 예를 들어 행 18:18은 이 스펠링으로)/브리스가(Πρίσκαν프리스칸, 예를 들어 로마서 16:3은 이 스펠링으로)가 가장이었다고 추정하는 데, 브리스길라처럼 루디아는 여성 가장이었다.
루디아의 집은 교회가 되었다. 빌립보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난 바울 사도 일행은 "감옥에서 나와서 루디아의 집으로 갔다. 그리고 거기서 신도들을 만나 그들을 격려하고 떠났다"(행 16:40). 루디아의 집에 신도들이 모여 있었다. 교회의 조직적 모양새가 없던 시절에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곳이 교회였는데, 루디아의 집(오이코스)이 그런 역할을 하였다. 유럽 최초의 교회는 최초의 그리스도교 개종자이자 사업가였던 여성, 루디아의 집에 세워졌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 사도의 경제적 후견인이 되어 바울 사도의 선교를 적극 후원하였다(빌 4:15~16, 18). 이 후원의 중심이 루디아였을 것이다. 루디아의 빌립보 교회 외에 다른 빌립보 교회를 상정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바울 사도의 선교는 루디아와 브리스길라, 두 여성 그리스도인의 경제적 후원에 크게 힘입어 가능했다.

-루디아의 세례터. 행 16:13은 이곳을 "성문 밖 강가"라 말하지만, 우리가 보게 되는 곳은 "성문 밖 개울"이다-
가부장적인 시대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바울 사도는 전도를 위하여 빌립보의 개울가로 나아가서 그곳에서 여성들을 만났다. 그 개울가는 여성들의 공간이었을(빨래터) 가능성이 높다. 그랬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루디아를 만날 수 있었다. 바울 사도는 여성들을 만나 가르치고 함께 일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17:4의 데살로니가 전도, 17:12 베뢰아 전도). 그리스도 안에서는 이미 남자와 여자의 차별이 사라졌기 때문이다(갈 3:28).
어버이 주일을 앞두고 루디아를 묵상한다. 유럽 최초의 그리스도교 개종자였고, 소아시아 두아디라 출신의 이방인이었고,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유대교에 호감을 가지고 하나님을 공경하는 이였고, 사업가였고, 가장(paterfamilias)이었고, 무엇보다 여성이었다. 그는 초대교회에서 여성 지도력을 상징한다.
루디아는 사도행전 16장에 등장한다. 사도행전 16장은 바울 사도 일행이 처음으로 유럽으로 건너간 이야기가 나오는 장이다.
11 ~15절
우리는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서,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갔고, 거기에서 빌립보에 이르렀다. 빌립보는 마케도니아 지방에서 으뜸가는 도시요, 로마 식민지였다. 우리는 이 도시에서 며칠 동안 묵었는데, 안식일에 성문 밖 강가로 나가서, 유대 사람이 기도하는 처소가 있음직한 곳을 찾아갔다. 우리는 거기에 앉아서, 모여든 여자들에게 말하였다. 그들 가운데 루디아라는 여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색 옷감 장수로서, 두아디라 출신이요,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이었다. 주님께서 그 여자의 마음을 여셨으므로, 그는 바울의 말을 귀담아 들었다. 그 여자가 집안 식구와 함께 세례를 받고나서 "나를 주님의 신도로 여기시면, 우리 집에 오셔서 묵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그리고 우리를 강권해서,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다.
아시아에서 전도길을 성령께서 막으셨을 때, 드로아(오늘날 이름 차나칼레, 옛이름 트로이, 아래 지도 노란색 동그라미)에서 환상을 본다. 마케도니아 사람 하나가 바울 앞에 서서 "마케도니아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간청하는 환상이었다(행 16:9). 이 환상을 보고 바울 사도는 드로아를 떠나 배를 타고 에게해를 건너 네압볼리(오늘날 이름 카발라, 옛이름 네아풀리스, 아래 지도 파란색 동그라미)에 도착한다. 바울 사도가 최초로 유럽 땅에 발을 딛는 순간이다. 바울 사도는 네압볼리에서 전도하지 않고 바로 빌립보(필립파이, 아래 지도 빨간색 동그라미, 오늘날에는 유적지만 남음)로 간다.
-빌립보 배후에 서 있는 바위투성이 산 오르벨로스(Mt.Orbelos)에서 내려본 빌립보-
빌립보는 도시로 발전하는 데 두 가지 중요한 정치적 사건을 만난다. 하나는 이 도시를 마케도니아의 필립2세(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가 정복하고(BC 4세기) 자신의 이름을 이 도시에 붙이고, 도시를 대대적으로 정비한 후 이 도시에 마케도니아 자치도시 지위를 준 일이다. 다른 하나는 빌립보 전투인데, 기원전 42년에 로마 제국의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우스 연합군이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반란군(율리우스 시저 암살)과 벌인 전투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우스(율리우스 시저 계승) 측의 승리로 끝났다. 이 전투에 참가한 군인들 중 은퇴를 하는 인원들이 빌립보에 정착한다. 빌립보는 퇴역 군인들의 도시가 되었는데, 로마 직할시로서 빌립보 시민들은 로마 시민들과 동등한 법적 경제적(세제) 혜택을 누렸다. 거기다 빌립보는 교통의 요지였다. 바울 일행이 들어온 네압볼리에서 8km 정도 떨어져 있었고, 네압볼리에서 시작되어 암비볼리(행 17:1)와 데살로니가, 베뢰아로 이어지는 에그나티아 도로(Via Egnatia)가 빌립보를 지나간다. 가히 마게도니아에서 "으뜸 가는 도시"(행 16:12)라는 말을 들을 만하다.
이 지리적 여건을 따라 루디아가 빌립보에 왔다. 루디아는 두아디라(Thyatira, 오늘날 튀르키예의 Akhisar, 위의 지도에서 오렌지색 동그라미) 출신이다. 그 도시는 예로부터 자색(purple) 염색업이 발달하였다. 두아디라에는 어느 도시보다 많은 염색업 종사자와 그들의 조합이 존재했다.
자색 염색은 당시 가능한 염색 색깔 중 가장 내기 어려운 색이었다. 바닷달팽이에서 추출한 염료로 색을 만들었기 때문인데, 식물에서 색을 만드는 것보다 어렵고 특별한 지식과 기술이 있어야 하는 작업이었다. 식물에서도 자색을 추출할 수 있었지만(Roccella tinctoria (a lichen) and madder root), 달팽이 추출 염료를 최고로 쳤다. 한때 자색은 황제만 입을 수 있는 색이었기 때문에, 자색은 곧 황제의 색이라 여겨졌다. 루디아는 사도행전에서 "자색 옷감 장수"(πορφυρόπωλις포르퓌로폴리스. 이 단어의 뿌리 단어인 πορφύρα포르퓌라에서 영어 purple이 나왔다)로 불린다(행 16:14). 염색 기술자가 아니라 옷감을 떼다 파는 상인이었다. 루디아가 어떤 사연으로 빌립보에 정착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바울 사도의 행로(드로아-네압볼리-빌립보)를 바울 사도 보다 먼저 밟았을 것이다. 빌립보는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도시였다. 고급 직물인 자색 옷감에 대한 수요가 많았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루디아는 두아디라-빌립보를 연결하여 아시아의 자색 옷감을 유럽에 판매하는 상인이 되었고, 그의 사업을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루디아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이었다"(행 16:14). 일전에 일점일획을 통하여 쓴 적 있지만(링크),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εβομένη τὸν θεόν에보메네 톤 쎄온)은 유대인에게 호감을 가지고 유대인의 삶의 방식을 따르는 이방인을 일컫는 말이다. 유대교 개종자와 달리 이들은 완전히 유대인으로 개종한 이들은 아니었고, 유대인 회당 예배에 참여하였는지 여부는 불분명하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루디아의 고향 두아디라에는 유대교 회당이 있었다는 점이 고고학적으로 밝혀졌다. 루디아는 고향에서부터 "세보메노이"로 살았을 가능성이 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성문 밖 강가에서 기도하던 이 여성의 마음을 여셨다고 전한다(행 16:13~14). 루디아의 기도는 무엇이었을까? 주님께서 루디아를 바울 사도에 앞서 예비하셨다.
바울 사도의 말을 귀담아들은 루디아는 바울 사도를 자신의 집에 초청하여 자기 집 식구들(ὁ οἶκος αὐτῆς호 오이코스 아우테스)과 함께 세례를 받았다. 유럽에서 처음 세례받고 그리스도교에 입교한 사람은 루디아와 그의 집 식구들이었다. "집 식구"에 사용된 헬라어 οἶκος(오이코스)는 건물로서의 집(house)라는 의미도 있지만 "집에 거하는 식구"(household)라는 의미도 있다. 그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핵가족 개념의 가족(family)은 없었다. 관계로서의 오이코스는 직계 가족은 물론이고 함께 사는 친지, 머물러 사는 객, 그리고 그 집에서 일하는 노예까지 포함하는 말이다. 보통 30-50명 규모로 추정하고, 많게는 2~3천 규모를 이루기도 하였다. 오이코스(집안)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같은 오이코스(이때는 건물로서의 오이코스)에 사는 사람들로 정의할 수도 있지만, 더 정확한 정의는 가장(paterfamilias)의 영향 아래 있는 사람이다. 오이코스의 수장이 가장이었고, 그는 종교를 비롯한 많은 것을 결정하였다. 그가 개종하면 오이코스 구성원 모두가 함께 개종하였다. 루디아는 자기 오이코스의 가장이었고, 그가 개종했을 때 그의 집안 식구 모두 개종한 것이다. 바울을 많이 도운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 중, 남편 아굴라가 있었지만 여성인 브리스길라(Πρίσκιλλα프리스킬라, 예를 들어 행 18:18은 이 스펠링으로)/브리스가(Πρίσκαν프리스칸, 예를 들어 로마서 16:3은 이 스펠링으로)가 가장이었다고 추정하는 데, 브리스길라처럼 루디아는 여성 가장이었다.
루디아의 집은 교회가 되었다. 빌립보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난 바울 사도 일행은 "감옥에서 나와서 루디아의 집으로 갔다. 그리고 거기서 신도들을 만나 그들을 격려하고 떠났다"(행 16:40). 루디아의 집에 신도들이 모여 있었다. 교회의 조직적 모양새가 없던 시절에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곳이 교회였는데, 루디아의 집(오이코스)이 그런 역할을 하였다. 유럽 최초의 교회는 최초의 그리스도교 개종자이자 사업가였던 여성, 루디아의 집에 세워졌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 사도의 경제적 후견인이 되어 바울 사도의 선교를 적극 후원하였다(빌 4:15~16, 18). 이 후원의 중심이 루디아였을 것이다. 루디아의 빌립보 교회 외에 다른 빌립보 교회를 상정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바울 사도의 선교는 루디아와 브리스길라, 두 여성 그리스도인의 경제적 후원에 크게 힘입어 가능했다.
-루디아의 세례터. 행 16:13은 이곳을 "성문 밖 강가"라 말하지만, 우리가 보게 되는 곳은 "성문 밖 개울"이다-
가부장적인 시대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바울 사도는 전도를 위하여 빌립보의 개울가로 나아가서 그곳에서 여성들을 만났다. 그 개울가는 여성들의 공간이었을(빨래터) 가능성이 높다. 그랬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루디아를 만날 수 있었다. 바울 사도는 여성들을 만나 가르치고 함께 일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17:4의 데살로니가 전도, 17:12 베뢰아 전도). 그리스도 안에서는 이미 남자와 여자의 차별이 사라졌기 때문이다(갈 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