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점일획


"속죄론"에 대한 묵상(우진성)

관리자
2025-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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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예수의 죽음에 대한 묵상(클릭)을 썼다. 고난 주간을 맞이하며 예수의 죽음을 해석하는 한 방식인 속죄론에 대한 묵상글을 나눈다. 

속죄(론)는 영어로 atonement라 한다. 고린도전서 15장 3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초대교회 케리그마 진술이 나오는데, 이 진술을 영어로 담아낸 단어가 atonement이다. 헬라어 개념으로 atonement에 해당하는 단어는 없다. 위에 언급한 고전 15:3도 헬라어로는 Χριστὸς ἀπέθανεν ὑπὲρ τῶν ἁμαρτιῶν ἡμῶν(크리스토스 아페싸넨 휘페르 톤 하마르티온 헤몬)과 같이 풀어 썼지 특정 단어로 이 사상을 표현하지 않았다. 

영어성경 ESV에는 atonement가 단 한번도 나오지 않는다. NRSV, KJV, NIV를 다 합치면 다음 네 구절의 단어를 atonement로 변역하였다. 그렇게 번역된 헬라어 단어가 atonement의 고유한 뜻을 담고 있는 단어인 경우는 단 한 곳 뿐이다. 


로마서 3:25a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를 속죄제물로 내주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피를 믿을 때에 유효합니다. (속죄제물 헬라어는 ἱλαστήριον힐라스테리온으로 "속죄판"으로 번역하는것이 낫다. 전에 쓴 힐라스테리온 묵상 글 클릭.)

히브리서 9:5a 그리고 그 언약궤 위에는 영광에 빛나는 그룹들이 있어서, 속죄판을 그 날개로 내리덮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이것들을 자세히 말할 때가 아닙니다.(같은 단어 힐라스테리온이 여기서는 속죄판으로 번역됨. 이 번역의 위의 로마서 번역보다 나은 번역)

히브리서 2:17b 그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자비롭고 성실한 대제사장이 되심으로써, 백성의 죄를 대신 갚으시기 위한 것입니다.(ἱλάσκομαι힐라스코마이. 위의 힐라스테리온의 동사형. "~를 만족시키다. 달래다"의 뜻인데, 아래 안셀름의 만족설과 연결된다. 신약 전체에서 이 단어가 그나마 atonement에 가장 가깝다.)

로마서 5:11b 우리는 지금 그(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해를 하게 된 것입니다.("화해"에 사용된 헬라어는 καταλλαγή카탈라게로 "속죄" 보다는 말 그대로 "화해"로 번역된다.)


위의 히브리서 2:17절의 ἱλάσκομαι힐라스코마이가 그나마 attonement에 가깝지만, 이 역시 "진노한 하나님을 달래다"는 뜻으로, "죄와 그 결과를 무력화하다"는 뜻의 atonement와는 거리가 있다. 

이와 같이, 신약에는 사실상 atonement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는다. 개념을 담고 있는 단어 없이, "예수가 우리를 위하여/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와 같은 케리그마 전승이 전해지는 것이다. 이 전승은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고백이다. 초대교회에서는 "예수님의 죽음"을 그렇게 이해한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를/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진술의 의미는 무엇일까? "속죄론"(atonement) 개념이 성경 자체에 없고, 후에 확립된 신학 이론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진술의 의미는 속죄론 교리를 넘어서서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속죄론 형성에 대해 잠시 더 살펴보자. 초대교회는 예수의 죽음을 구약 속죄 제사에 빗대어 이해하였다. 다음 성경 구절들은 그것을 보여준다. 


레위기 1:1-2 제물을 가져 온 사람은 번제물의 머리 위에 자기의 손을 얹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것을 속죄하는 제물로 받으실 것이다. 그런 다음에 제물을 가져 온 사람은 거기 주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아야 하고, 아론의 혈통을 이어받은 제사장들은 그 피를 받아다가 회막 어귀에 있는 제단 둘레에 그 피를 뿌려야 한다.

요한복음 1:36 예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서, "보아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 하고 말하였다.(예수를 제물에 비유)

로마서 3:25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를 속죄제물(ἱλαστήριον=언약궤 위 속죄판)로 내주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피를 믿을 때에 유효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들이 이제까지 지은 죄를 너그럽게 보아주심으로써 자기의 의를 나타내시려는 것이었습니다.(예수를 제물의 피가 뿌려지는 속죄판에 비유)

히브리서 9:12 단 한 번에 지성소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는 염소나 송아지의 피로써가 아니라, 자기의 피로써,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예수를 대제사장에 비유)


이렇게 레위기의 속죄 제사 규정은 예수의 죽음을 해석하는 틀거리를 제공하여 주었고, 그 해석 위에 속죄론이 형성되었다. 속죄론은 제사에 빗대어 비유적으로 예수의 죽음을 설명하는 방식이다. 비유가 아니라면 예수는 동시에 제물, 속죄판, 대제사장이 될 수 없다. 여기서 속죄론에 대해 두 가지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1. 비유는 어떤 실체를 쉽고 익숙한 방식으로 가리키는 데 그 사용의 목적이 있는데, 예수 죽음을 설명하는 언어에서 "실체"는 사라지고 "비유"만 남았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진술은 분명 속죄 제사에 빗대어 예수의 죽음을 이해한 데서 온 비유적 진술이다. 속죄론은 제사에 익숙한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의 죽음을 설명하는 가장 쉬운 방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사가 없는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은 속죄론에 사용된 제사 언어를 배우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러는 사이에 예수 죽음의 의미는 속죄라는 비유 언어로만 남게 되었다. 
  2. 이렇듯 속죄 제사 비유가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강력하게 작동하다 보니, 예수님의 죽음을 "우리를 위한 죽음"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우리의 죄를 위한 죽음"으로 이해하는 쪽에 방점이 찍히게 되었다. 속죄론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죄"를 전제한 언어이다. 인간이 죄가 없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위한 죽음"과 "우리 죄를 위한 죽음"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전자의 예수 죽음 이해는 "죽음을 가져오는/죽음에 직면한 인간의 여러 상황"을 향하여 열려 있는 반면, 후자는 "죄-심판"이라는 틀거리 안에서만 이해된다. 속죄론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속죄론이 예수님의 죽음을 설명하기에 "좁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속죄론이 좁아서 담기 어려운 신앙 담론 중 하나는 제자도이다. 예를 들어, 속죄론에 근거하여 설교한 어느 대학 교목의 설교 요약을 보자. 


  •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를 따를 수 없다. 
  • 예수가 이미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우리의 죄를 속죄하시고 다 해결했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를 따를 필요가 없다.
  •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총을 거부하는 것이고 믿음이 아니라 나의 의로 구원을 받으려는 노력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를 따라서도 안된다.


여기에 제자도가 들어갈 가리가 있는가? "오직 믿음에 의한 구원"이라는 사상은 속죄론의 귀결이며, 제자도와 병립하기 쉽지 않다. "성화"를 이야기하며 "제자도"를 말하는 것이 최선이겠지만,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제자도는 분명 "성화"로는 담을 수 없는 높은 수준의 제자도이다. 

조금 더 부연해 보자. 예순님은 분명 자신을 따르는 제자가 나오길 바라셨다. 그러므로 제자도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다. 예수님께서는 심지어 자신과 같은 죽음을 감당하는 이가 자신의 제자들 사이에서 더 나오길 원하였다. 너무 높은 요구라서 감히 입에 올리기도 어려워 기독교인들이 회피하고 부담스러워하는 제자도가 아래 구절 속에 분명히 담겨 있다. 


  • 누가복음 14장을 따르면, 예수의 제자가 되는 길은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내나 자식이나, 형제나 자매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고(26절),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될 수 없는 길이다. 십자가를 향한 여정에서 하신 이런 말씀은 어떤 비유적 상징적 독법도 허용하지 않는다. 
  • 예수님께서 마지막 식사 때 제자들에게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고 하셨는데, 이 때 예수님께서 유언으로 "행하라"고 명하신 "이것"은, 떡을 들고 감사기도 드리고 떼어 나눠주는 성만찬을 행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이것은 너를 위해 주는 내 몸이다"(고전 11:24 사역)에 담겨 있는 실천을 너희도 행하라는 말씀이다. 그 실천은 타자를 위해 생명까지 내주는 삶이다. 
  • 이 점을 가장 명징하게 담고 있는 구절은 요한일서 3장 16절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자매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예수는 그의 죽음에 배타적 의미를 부여하기 보다는, 자신을 따라 타자를 목숨까지 버리는 이들이 나오길 바랐고, 초대교회에는 이와 같이 가장 높은 수준의 제자도가 존재하였다. 따라서 예수 죽음의 의미를 배타적 유일회적 사건으로 해석하기 보다는, 예수를 따라/예수와 같은 류의 죽음을 당한 사람들의 죽음까지 포함하여 해석할 수 있는 틀이 필요하다. 전통적 속죄론을 보충할 예수 죽음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예수님의 제자도 가르침 속에서 예수님은, 속죄론이 전제하는 것과 같은 자신만의 배타적이고 유일회적인 죽음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속죄 제사가 역할하던 죄를 씻는 죽음을 말씀하신 것도 아니다. 예수님은 "많은 다른 사람을 위하여 죽는 죽음"이라는 보편적 죽음으로 자신의 죽음을 설명하시고, 제자들도 그런 죽음을 향해 나아오길 바라셨다. 다음 두 구절은 이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 마가복음 10:45 인자는 . . .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
  • 요한복음 12:24-26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자기의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생에 이르도록 그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나를 섬기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있는 곳에는, 나를 섬기는 사람도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높여주실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 설명하는 "속죄"론 에 더하여 더 넓은 지평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설명할 언어가 필요하다. 일전에 쓴 noble death는(클릭) 그런 지평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속죄론은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죽었다"고 말한다면, noble death는 "예수님이 우리를 대표해서 죽었다"고 설명하는 이해이다. 배현주는 "신약성서 속죄론에 관한 한 연구" 결론을 이렇게 맺는다. 


많은 학자들이 신약성서의 언어, 특히 바울의 속죄 언어를 "대표"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훨씬 더 적합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 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는 고린도후서 5장 14절의 말씀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대표하는 분이고 그의 대표성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지속적으로 동일시 할 수 있는 관계를 가지게 된다.(배현주, 112)


"대신하여" 죽은 것과 "대표하여" 죽은 것이 비슷하게 들려도 큰 해석의 차이를 가져올 수 있다. 예수가 우리를 "대신하여" 속죄 제물이 되어 죽었다"는 믿음 안에서 "예수는 감사와 예배의 대상"이 되고, 인간은 그 은혜를 누리기만 하면 되는 존재가 되기 쉽다. 반면 "대표하여" 죽었다는 표현은 예수님과 인간 사이의 연속성/동질성/연대감을 잘 표현하고 있다. "예수의 죽음은 인간의 극한적인 심연에 동참하는 대표자의 죽음"(배현주, 112)이 되는 것이고, 그 죽음을 목격한/인정한 인간은, 새로운 생명으로 나아가기 위하여 죽음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의 초대에 응답해야 하는 거룩한 부담 앞에 서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