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성경에서 오직 바울의 갈라디아서에만 언급된 하나의 단어가 있다. 그것은 Ἰουδαϊσμός(유다이스모스)라는 단어이다. 갈라디아서 1:13-14에서 단 두 번 언급된다:
“내가 이전에 유대교((Ἰουδαϊσμός, 유다이스모스)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며 멸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Ἰουδαϊσμός, 유다이스모스)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갈 1:13-14).
한글 성경에서는 Ἰουδαϊσμός(유다이스모스)를 ‘유대교’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유대인들의 신앙과 종교를 뜻하는 말로서 단순하게 생각하게 된다. 이 단어가 다른 곳에서는 사용되고 있지 않지만, 바울은 바리새인의 삶에서 벗어나 복음을 전파하고 변증하는 사도로 살면서, 그가 전하는 복음을 비방하고 적대하고 드디어 박해를 받았던 결정적인 이유가 유대인들이 신봉하는 유대교((Ἰουδαϊσμός, 유다이스모스) 자체임을 바울서신들이나 사도행전 이야기에서 알 수가 있다.
Ἰουδαϊσμός(유다이스모스)는 구약 70인경에서는 신구약 중간시대 마카비 가문의 독립운동을 다루는 마카비하에 4번 나온다. 마카비하의 저자는 키레네 사람 야손이 쓴 다섯권의 책을 한권의 책으로 자신이 다시 요약하여 쓴다고 서문에 말하면서 특별히 그가 다룬 이야기의 주제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 그들이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와 그의 아들 유피톨하고 싸운 이야기, 또 유다교(Ἰουδαϊσμός, 유다이스모스)를 위해서 용감하게 싸운 영웅들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천사들의 도움으로 적은 병력으로 온 땅을 점령하고 많은 야만인들을 몰아내고, 온 천하에 이름난 그 성전을 회복하고 예루살렘 성을 해방시키고, 거의 없어져 가던 법을 재확립한 이야기와, 주님께서 그들에게 모든 원조를 베풀어 주신 이야기 등이다”(마카비하 2:20-22).
저항운동의 지도자 유다 마카비의 항전은 유대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의 투쟁이야기라 저자는 분명히 말한다:
“유다 마카베오와 그 동지들은 여러 촌락으로 몰래 들어가서 그들의 친족들을 불러내고, 유다 민족의 전통(Ἰουδαϊσμός)을 꾸준히 지켜온 사람들을 소집하여 육천 명 가량의 사람들을 모아 놓았다”(마카비하 8:1).
마카비의 저항운동이나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마카비 상하의 이야기에서 분명한 것은 이 운동의 시작은 헬라의 셀류코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4세(에피파네스)가 이스라엘 땅에 헬라문화를 이식하면서, 예루살렘 성전제사를 페지하고, 유대인의 할례의식을 금지하며, 유대인들의 생활방식을 헬라인처럼 만들려는 시도에 반발하였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유대인을 유대인처럼 살지 못하게 하려는 이방권력에 무장봉기한 것이다. 신구약 중간시대에 나타난 유대교의 바리새파는 이 시대에 나타난 중요한 한 종교세력이었다. 사도 바울이 사용한 Ἰουδαϊσμός(유다이스모스)는 단순한 종교와 신앙을 지칭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유대인처럼 사는 것,” 바울이 젊은 시절 훈련받았던 바리새파의 선생들이 남긴 전통을 따라 사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바울이 사용한 Ἰουδαϊσμός(유다이스모스)의 의미이다. 이방지역에 있는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차별 없는 복음을 말하면서 과연 유대인 답게 살 수 있는 것인가의 이슈는 디아스포라의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있는 곳에서 쉽게 해결되지 않는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사도행전 15장에서 이 문제를 가지고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예루살렘 사도들이 의견을 나누고는 주님의 형제 야고보가 타협안을 제시한 것을 교회는 받아들이고 안디옥 교회에 그 결과를 통보하였다. 그것은 유대인은 유대인처럼 살게 해 주고, 이방인은 이방인처럼 살게 해 주면서, 서로의 생활방식을 인정하고 존중해 주는 것이었다(행 15:19-21). 하지만 이것은 언제나 일관된 원칙으로 모두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예가 바로 게바(베드로)가 안디옥 교회에서 이방인 크리스천들과 음식법(정결법)에 구애되지 않고 식사를 하다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 야고보의 사람들(유대인 크리스천들, 할례자들)이 왔을 때, 이방인과 식탁의 교제를 한 것을 보여주기 싫어서 바나바와 함께 자리를 피한 것이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눈에 외식의 죄로 보여, 게바를 면전에서 비판하였다. 그 비판내용은 바울이 평생 싸우고 있는 유대교(Ἰουδαϊσμός,유다이스모스)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 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 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갈 2:14)
유대인 답게 산다는 것은 ‘할례를 받고 율법의 모든 것을 지키는 삶’을 말한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유대교(Ἰουδαϊσμός)이다. 이방인 선교를 위해 일하는 유대인 크리스천들은 유대인다운 삶을 포기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유대인 선교를 위해서는 유대인다운 삶을 또한 살아야 한다. 바울은 선교의 전략으로 이것을 분명히 하였다(고전 9:19-21).
한 사람의 생명을 얻기 위하여 바울은 때로 유대인의 삶(유대교)을 포기하고, 때로 자신의 동족 유대인을 얻기 위하여 유대인의 삶을 지속하였다. 복음을 위하여 모든 사람의 종이 되는 사도의 모습이었다.
신약성경에서 오직 바울의 갈라디아서에만 언급된 하나의 단어가 있다. 그것은 Ἰουδαϊσμός(유다이스모스)라는 단어이다. 갈라디아서 1:13-14에서 단 두 번 언급된다:
“내가 이전에 유대교((Ἰουδαϊσμός, 유다이스모스)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며 멸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Ἰουδαϊσμός, 유다이스모스)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갈 1:13-14).
한글 성경에서는 Ἰουδαϊσμός(유다이스모스)를 ‘유대교’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유대인들의 신앙과 종교를 뜻하는 말로서 단순하게 생각하게 된다. 이 단어가 다른 곳에서는 사용되고 있지 않지만, 바울은 바리새인의 삶에서 벗어나 복음을 전파하고 변증하는 사도로 살면서, 그가 전하는 복음을 비방하고 적대하고 드디어 박해를 받았던 결정적인 이유가 유대인들이 신봉하는 유대교((Ἰουδαϊσμός, 유다이스모스) 자체임을 바울서신들이나 사도행전 이야기에서 알 수가 있다.
Ἰουδαϊσμός(유다이스모스)는 구약 70인경에서는 신구약 중간시대 마카비 가문의 독립운동을 다루는 마카비하에 4번 나온다. 마카비하의 저자는 키레네 사람 야손이 쓴 다섯권의 책을 한권의 책으로 자신이 다시 요약하여 쓴다고 서문에 말하면서 특별히 그가 다룬 이야기의 주제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 그들이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와 그의 아들 유피톨하고 싸운 이야기, 또 유다교(Ἰουδαϊσμός, 유다이스모스)를 위해서 용감하게 싸운 영웅들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천사들의 도움으로 적은 병력으로 온 땅을 점령하고 많은 야만인들을 몰아내고, 온 천하에 이름난 그 성전을 회복하고 예루살렘 성을 해방시키고, 거의 없어져 가던 법을 재확립한 이야기와, 주님께서 그들에게 모든 원조를 베풀어 주신 이야기 등이다”(마카비하 2:20-22).
저항운동의 지도자 유다 마카비의 항전은 유대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의 투쟁이야기라 저자는 분명히 말한다:
“유다 마카베오와 그 동지들은 여러 촌락으로 몰래 들어가서 그들의 친족들을 불러내고, 유다 민족의 전통(Ἰουδαϊσμός)을 꾸준히 지켜온 사람들을 소집하여 육천 명 가량의 사람들을 모아 놓았다”(마카비하 8:1).
마카비의 저항운동이나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마카비 상하의 이야기에서 분명한 것은 이 운동의 시작은 헬라의 셀류코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4세(에피파네스)가 이스라엘 땅에 헬라문화를 이식하면서, 예루살렘 성전제사를 페지하고, 유대인의 할례의식을 금지하며, 유대인들의 생활방식을 헬라인처럼 만들려는 시도에 반발하였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유대인을 유대인처럼 살지 못하게 하려는 이방권력에 무장봉기한 것이다. 신구약 중간시대에 나타난 유대교의 바리새파는 이 시대에 나타난 중요한 한 종교세력이었다. 사도 바울이 사용한 Ἰουδαϊσμός(유다이스모스)는 단순한 종교와 신앙을 지칭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유대인처럼 사는 것,” 바울이 젊은 시절 훈련받았던 바리새파의 선생들이 남긴 전통을 따라 사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바울이 사용한 Ἰουδαϊσμός(유다이스모스)의 의미이다. 이방지역에 있는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차별 없는 복음을 말하면서 과연 유대인 답게 살 수 있는 것인가의 이슈는 디아스포라의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있는 곳에서 쉽게 해결되지 않는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사도행전 15장에서 이 문제를 가지고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예루살렘 사도들이 의견을 나누고는 주님의 형제 야고보가 타협안을 제시한 것을 교회는 받아들이고 안디옥 교회에 그 결과를 통보하였다. 그것은 유대인은 유대인처럼 살게 해 주고, 이방인은 이방인처럼 살게 해 주면서, 서로의 생활방식을 인정하고 존중해 주는 것이었다(행 15:19-21). 하지만 이것은 언제나 일관된 원칙으로 모두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예가 바로 게바(베드로)가 안디옥 교회에서 이방인 크리스천들과 음식법(정결법)에 구애되지 않고 식사를 하다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 야고보의 사람들(유대인 크리스천들, 할례자들)이 왔을 때, 이방인과 식탁의 교제를 한 것을 보여주기 싫어서 바나바와 함께 자리를 피한 것이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눈에 외식의 죄로 보여, 게바를 면전에서 비판하였다. 그 비판내용은 바울이 평생 싸우고 있는 유대교(Ἰουδαϊσμός,유다이스모스)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 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 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갈 2:14)
유대인 답게 산다는 것은 ‘할례를 받고 율법의 모든 것을 지키는 삶’을 말한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유대교(Ἰουδαϊσμός)이다. 이방인 선교를 위해 일하는 유대인 크리스천들은 유대인다운 삶을 포기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유대인 선교를 위해서는 유대인다운 삶을 또한 살아야 한다. 바울은 선교의 전략으로 이것을 분명히 하였다(고전 9:19-21).
한 사람의 생명을 얻기 위하여 바울은 때로 유대인의 삶(유대교)을 포기하고, 때로 자신의 동족 유대인을 얻기 위하여 유대인의 삶을 지속하였다. 복음을 위하여 모든 사람의 종이 되는 사도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