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욥바와 가이사랴
사도행전 10장에는 베드로 사도가 로마 백부장 고넬료의 집을 방문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고넬료의 집이 위치한 곳은 가이샤라Caesarea라는 항구도시인데, 헤롯왕이 설계하고 건설한 다음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 가이사랴Augustus Caesar에게 헌정한 도시였다. 이곳은 전적으로 이방인을 위한 도시로 유대인은 시민권을 가질 수 없었다. 이곳에 로마군대 1천명이 주둔하고 있었고, 고넬료는 그 군대의 백부장 중 한 명이었다. 고넬료는 욥바에 있는 베드로 사도를 자신의 집으로 초청하였고, 그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가족(household)에 더하여 자신의 친척과 친구들까지 집에 초대하였다.(24절) 베드로 사도가 가이샤라로 오기 전 머물던 도시 욥바는 솔로몬 시대부터 사용된 전통적인 유대 항구 도시(역대하 2:16, 에스라 3:7, 요나서 1:3)였다. 베드로는 욥바의 신도 몇몇과 함께 가이샤라의 고넬료를 방문하였다.(23절)
하나님은 어떤 분?
이 만남 자체가 복음의 견지에서 역사적이다. 이 역사적인 장면에서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서 입술을 열어 설교를 시작하는데, 그 첫 문장이 이랬다.
οὐκ ἔστιν προσωπολήμπτης ὁ θεός
욱크 에스틴 프로소포렘프테스 호 테오스
헬라어 문장은 순서대로 강조점이 놓인다. 위의 문장에서 제일 강조하는 단어는 "~이 아니다"(οὐκ ἔστιν)인데, 하나님의 성품을 "~이 아니다"로 설명하는 것이다. 여기서 "~"에 해당하는 단어는 프로소포렘프테스προσωπολήμπτης인데, 오늘 묵상하고자 하는 단어이다. 베드로 사도가 고넬료에게 소개한 하나님의 속성은 무엇일까?
이 단어를 부정어와 합하여 개역개정에서는 "사람을 외모로 가리지 아니하신다"로 번역하였고, 새번역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신다"로 번역하였다. 이 번역을 딱히 틀렸다고는 할 수는 없지만, 프로소포렘프테스의 의미를 묵상하면 이 문장의 의미가 더 분명하게 다가온다.
사실 프로소포렘프테스의 의미는 이어지는 35절이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가 어느 민족에 속하여 있든지, 다 받아 주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행 10:35)
새번역이 택한 이 번역은 아래의 개역개정에 비해 프로소포렘프테스의 의미를 더 잘 드러내 주는데, 하나님께서는 어느 민족에 속해 있든지 "외적인 조건"에 따라 차별하지 않으시고 일정한 "내적 조건"을(경외, 의를 행함) 갖춘다면 똑같이 받아 주신다는 말이다.
차별 없는 하나님
베드로 사도의 설교 안에 이미 프로소포렘프테스를 설명하는 언급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소포렘프테스의 번역이 까다로운 이유는 성경 안에 용례가 이 구절 외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성경 밖에서도 용례를 찾기 어렵다. 이 단어는 오직 사도행전 10:34절에만 나오는 단어이다. 그런데 다행히 유사어가 있다. 프로소포렘프시아προσωπολημψία인데, 이 단어의 용례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아래 구절들에서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
-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함이 없이 대하시기 때문입니다.(로마서 2:11)
- 주인 된 이 여러분, 종들에게 이와 같이 대하고, 위협을 그만두십시오. 그들의 주님이시요 여러분의 주님이신 분께서 하늘에 계신다는 것과, 주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여러분은 아십시오.(에베소서 6:9)
- 불의를 행하는 사람은, 자기가 행한 불의의 대가를 받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사람을 보고 차별을 하는 일이 없습니다.(골로새서 3:25)
-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영광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마십시오.(야고보서 2:1)
프로소포렘프시아προσωπολημψία의 뜻은 이렇게 명백하게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이다. 프로소포렘프테스는 여기에 사용된 프로소포렘프시아와 뜻이 같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두 단어 모두 "얼굴 혹은 외모"를 뜻하는 프로소폰πρόσωπον에 "취하다"(take)라는 뜻을 지닌 람바노λαμβάνω가 더해진 합성어의 파생형이기 때문이다.
προσωπο+λήμπτης
προσωπο+λημψία
따라서 프로소포렘프테스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신다"라고 했을 때, 그 명확한 뜻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이다.
하나님께는 차별이 없다. 하나님에 대한 이런 이해는 이미 구약의 구절들에서 힌트를 찾아볼 수 있다. 사무엘이 이새의 집안에 왕이 될 사람에게 기름 부으러 갔을 때, 이새의 장남 엘리압의 외모를 보고 감탄하고 있으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셨다. "너는 그의 준수한 겉모습과 큰 키만을 보아서는 안 된다. 그는 내가 세운 사람이 아니다. 나는 사람이 판단하는 것처럼 그렇게 판단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겉모습만을 따라 판단하지만, 나 주는 중심을 본다."(사무엘상 16:7)
신명기가 전하는 율법도 하나님을 이렇게 소개한다.
이 세상에는 신도 많고, 주도 많으나, 당신들의 주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시고, 참 주님이십니다. 그분만이 크신 권능의 하나님이시요,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며, 사람을 차별하여 판단하시거나(οὐ θαυμάζει πρόσωπον), 뇌물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시며,(신명기 10:17)
하나님이 이러하시니 하나님의 복음에도 차별이 있을 수 없다.
차별 없는 복음
"차별없는 복음"의 은혜를 힘주어 강조한 분은 바울 사도이다. 그가 로마 사람들에게 쓴 편지에 이런 강조가 도드라진다.
로마서 3장
- 그런데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오는 것인데, 모든 믿는 사람에게 미칩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이 없습니다.(22절)
- 참으로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할례를 받은 사람도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하시고,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도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하십니다.(30절)
로마서 10장
-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율법의 끝마침이 되셔서, 모든 믿는 사람에게 의가 되어 주셨습니다.(4절)
- 성경은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합니다.(11절)
-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주님이 되어 주시고,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풍성한 은혜를 내려주십니다.(12절)
-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13절)
외적 조건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복음의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베풀어져야 한다. 이런 성경의 사상을 표현하는 또 다른 방식은 예수님이 모든 사람의 주님이 되셨다는 고백이다. 이 고백은 고넬료 집에서 행한 베드로 설교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다음에 따라온다.
예수, 모든 사람의 주님
οὗτός ἐστιν πάντων κύριος
예수 그리스도는 만민의 주님(사도행전 10:36b)
사실 "만민의 주"라는 표현은 로마 황제를 위한 레토릭이었다. 1세기 작가/연설가 Dio Chrysostom은 로마 황제에 대해 말하길 "αὐτὸς ὢν κύριος ἁπάντων τῶν πραγμάτων"(Orat. 56.11.3)이라 하였는데, 번역하면 "그 자신이 모든 문제의 주님 되는 분"이다. 2세기 역사가Dio Cassius도 로마 황제에 대하여 이런 찬사를 바쳤다. "μόνος ἀναμφιλόγως κύριος ἁπάντων"(Hist. Rom. 56.39), 번역하면 "그만이 홀로 논란의 여지없이 모두의 주님이 되는 분"이다. 군주는 "모든 사람" 곧 "만민"의 주님이 되어야 한다는 사상은 플라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플라톤은 권력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ζητῶν εἶναι κύριος ἁπάντων"(Leg. 922d1)을 권면하였다. "모든 사람의 주님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설교에서 예수님을 "모든 사람"의 주님이라고 고백한 것은, 로마 황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모든 사람의 주님"이라는 점을 고백했다는 점에서 반 제국적이고, 동시에 "차별 없는 하나님"의 전통 위에 예수께서 서 있다고 이해한 것이다.
차별 없는 그리스도인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는 분이다. 하나님은 그러하지만 사람들은 끊임없이 신의 사랑, 은혜, 호의를 독점하여, 하나님을 자신의 뒷배로 만들어 남을 배척하는 근거로 삼으려 한다. 그러나 그런 노력으로 자기가 만든 하나님이 있다면, 그런 하나님은 그저 우상일 뿐이다. 베드로 사도가 고넬료에게 소개한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다. 그 하나님을 믿는 우리도 사람을 차별하면 안된다.
위에 인용한 야고보서의 권면으로 글을 맺는다.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영광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마십시오.(야고보서 2:1)
욥바와 가이사랴
사도행전 10장에는 베드로 사도가 로마 백부장 고넬료의 집을 방문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고넬료의 집이 위치한 곳은 가이샤라Caesarea라는 항구도시인데, 헤롯왕이 설계하고 건설한 다음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 가이사랴Augustus Caesar에게 헌정한 도시였다. 이곳은 전적으로 이방인을 위한 도시로 유대인은 시민권을 가질 수 없었다. 이곳에 로마군대 1천명이 주둔하고 있었고, 고넬료는 그 군대의 백부장 중 한 명이었다. 고넬료는 욥바에 있는 베드로 사도를 자신의 집으로 초청하였고, 그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가족(household)에 더하여 자신의 친척과 친구들까지 집에 초대하였다.(24절) 베드로 사도가 가이샤라로 오기 전 머물던 도시 욥바는 솔로몬 시대부터 사용된 전통적인 유대 항구 도시(역대하 2:16, 에스라 3:7, 요나서 1:3)였다. 베드로는 욥바의 신도 몇몇과 함께 가이샤라의 고넬료를 방문하였다.(23절)
하나님은 어떤 분?
이 만남 자체가 복음의 견지에서 역사적이다. 이 역사적인 장면에서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서 입술을 열어 설교를 시작하는데, 그 첫 문장이 이랬다.
οὐκ ἔστιν προσωπολήμπτης ὁ θεός
욱크 에스틴 프로소포렘프테스 호 테오스
헬라어 문장은 순서대로 강조점이 놓인다. 위의 문장에서 제일 강조하는 단어는 "~이 아니다"(οὐκ ἔστιν)인데, 하나님의 성품을 "~이 아니다"로 설명하는 것이다. 여기서 "~"에 해당하는 단어는 프로소포렘프테스προσωπολήμπτης인데, 오늘 묵상하고자 하는 단어이다. 베드로 사도가 고넬료에게 소개한 하나님의 속성은 무엇일까?
이 단어를 부정어와 합하여 개역개정에서는 "사람을 외모로 가리지 아니하신다"로 번역하였고, 새번역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신다"로 번역하였다. 이 번역을 딱히 틀렸다고는 할 수는 없지만, 프로소포렘프테스의 의미를 묵상하면 이 문장의 의미가 더 분명하게 다가온다.
사실 프로소포렘프테스의 의미는 이어지는 35절이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가 어느 민족에 속하여 있든지, 다 받아 주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행 10:35)
새번역이 택한 이 번역은 아래의 개역개정에 비해 프로소포렘프테스의 의미를 더 잘 드러내 주는데, 하나님께서는 어느 민족에 속해 있든지 "외적인 조건"에 따라 차별하지 않으시고 일정한 "내적 조건"을(경외, 의를 행함) 갖춘다면 똑같이 받아 주신다는 말이다.
차별 없는 하나님
베드로 사도의 설교 안에 이미 프로소포렘프테스를 설명하는 언급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소포렘프테스의 번역이 까다로운 이유는 성경 안에 용례가 이 구절 외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성경 밖에서도 용례를 찾기 어렵다. 이 단어는 오직 사도행전 10:34절에만 나오는 단어이다. 그런데 다행히 유사어가 있다. 프로소포렘프시아προσωπολημψία인데, 이 단어의 용례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아래 구절들에서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
프로소포렘프시아προσωπολημψία의 뜻은 이렇게 명백하게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이다. 프로소포렘프테스는 여기에 사용된 프로소포렘프시아와 뜻이 같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두 단어 모두 "얼굴 혹은 외모"를 뜻하는 프로소폰πρόσωπον에 "취하다"(take)라는 뜻을 지닌 람바노λαμβάνω가 더해진 합성어의 파생형이기 때문이다.
προσωπο+λήμπτης
προσωπο+λημψία
따라서 프로소포렘프테스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신다"라고 했을 때, 그 명확한 뜻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이다.
하나님께는 차별이 없다. 하나님에 대한 이런 이해는 이미 구약의 구절들에서 힌트를 찾아볼 수 있다. 사무엘이 이새의 집안에 왕이 될 사람에게 기름 부으러 갔을 때, 이새의 장남 엘리압의 외모를 보고 감탄하고 있으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셨다. "너는 그의 준수한 겉모습과 큰 키만을 보아서는 안 된다. 그는 내가 세운 사람이 아니다. 나는 사람이 판단하는 것처럼 그렇게 판단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겉모습만을 따라 판단하지만, 나 주는 중심을 본다."(사무엘상 16:7)
신명기가 전하는 율법도 하나님을 이렇게 소개한다.
이 세상에는 신도 많고, 주도 많으나, 당신들의 주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시고, 참 주님이십니다. 그분만이 크신 권능의 하나님이시요,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며, 사람을 차별하여 판단하시거나(οὐ θαυμάζει πρόσωπον), 뇌물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시며,(신명기 10:17)
하나님이 이러하시니 하나님의 복음에도 차별이 있을 수 없다.
차별 없는 복음
"차별없는 복음"의 은혜를 힘주어 강조한 분은 바울 사도이다. 그가 로마 사람들에게 쓴 편지에 이런 강조가 도드라진다.
로마서 3장
로마서 10장
외적 조건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복음의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베풀어져야 한다. 이런 성경의 사상을 표현하는 또 다른 방식은 예수님이 모든 사람의 주님이 되셨다는 고백이다. 이 고백은 고넬료 집에서 행한 베드로 설교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다음에 따라온다.
예수, 모든 사람의 주님
οὗτός ἐστιν πάντων κύριος
예수 그리스도는 만민의 주님(사도행전 10:36b)
사실 "만민의 주"라는 표현은 로마 황제를 위한 레토릭이었다. 1세기 작가/연설가 Dio Chrysostom은 로마 황제에 대해 말하길 "αὐτὸς ὢν κύριος ἁπάντων τῶν πραγμάτων"(Orat. 56.11.3)이라 하였는데, 번역하면 "그 자신이 모든 문제의 주님 되는 분"이다. 2세기 역사가Dio Cassius도 로마 황제에 대하여 이런 찬사를 바쳤다. "μόνος ἀναμφιλόγως κύριος ἁπάντων"(Hist. Rom. 56.39), 번역하면 "그만이 홀로 논란의 여지없이 모두의 주님이 되는 분"이다. 군주는 "모든 사람" 곧 "만민"의 주님이 되어야 한다는 사상은 플라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플라톤은 권력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ζητῶν εἶναι κύριος ἁπάντων"(Leg. 922d1)을 권면하였다. "모든 사람의 주님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설교에서 예수님을 "모든 사람"의 주님이라고 고백한 것은, 로마 황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모든 사람의 주님"이라는 점을 고백했다는 점에서 반 제국적이고, 동시에 "차별 없는 하나님"의 전통 위에 예수께서 서 있다고 이해한 것이다.
차별 없는 그리스도인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는 분이다. 하나님은 그러하지만 사람들은 끊임없이 신의 사랑, 은혜, 호의를 독점하여, 하나님을 자신의 뒷배로 만들어 남을 배척하는 근거로 삼으려 한다. 그러나 그런 노력으로 자기가 만든 하나님이 있다면, 그런 하나님은 그저 우상일 뿐이다. 베드로 사도가 고넬료에게 소개한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다. 그 하나님을 믿는 우리도 사람을 차별하면 안된다.
위에 인용한 야고보서의 권면으로 글을 맺는다.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영광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마십시오.(야고보서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