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의 존재와 사역은 비밀스러움과 드러냄이 공존하고 있다. 요한복음 1장 서문은 이 사실을 잘 드러내고 있다.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재하다가 세상의 빛으로 왔지만, 어둠의 세상은 그 존재를 깨닫지도 알지도 못한다(요 1:5, 10). 빛은 모든 어둠을 밝히고 드러내는 것이지만, 어둠에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이 빛을 모르는 모순적인 상황이다. 비밀스러움과 드러냄이 하나님의 계시라 할 수 있다. 이것을 표현하는 동사는 κρύπτω(크룹토)이고, 형용사는 κρυπτός(크룹토스)이다. 각각 신약성경에서 18번, 17번 사용되었다. 특별히 마태복음에서 각각 6번 사용되어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예수가 세상의 빛이고, 이 빛을 품은 사람들, 곧 산 위의 동네(교회)는 결코 숨길 수(κρύπτω)가 없고, 곧 드러나게 된다(마 5:14).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시온산의 영광처럼 많은 백성이 보게 되고 거기로 몰려오게 될 것을 암시하고 있다(사 2:3). 이런 드러냄은 결국 예수와 교회의 영광을 말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은밀한 존재로 사람들 가운데 나타나는 하나님의 지혜라 할 수 있다. 하나님께 하는 예수의 감사 기도 가운데, 숨기고 드러나는 하나님의 지혜를 찬양하고 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ἔκρυψας, you have hidden),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마 11:25-26).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이라는 말은 마태복음에서 율법선생이나 서기관, 바리새인들, 즉 유대교 지도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반면에 어린 아이들은 비천하고 세속적인 주님의 제자들을 암시하는 말이다. 이러한 숨김과 드러냄의 이중적 하나님의 역사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에서 하나님의 계시적 지혜임을 주님이 말씀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
혈육(사르크스 σάρξ)에게는 숨겨지는 것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택한 자에게는 드러나고 알게 되는 것임을 이중적으로 말하고 있다. 드러냄과 숨김의 이중성을 가장 분명하게 보이는 것이 예수의 비유의 가르침이다. 마가복음 4:33에서는 많은 비유로 예수님이 제자들을 가르치는 것은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 가르침을 주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군중이 없고 제자들과 있을 때에는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막 4:34) 라고 주님의 교훈을 분명히 드러내셨다. 하지만 마태복음은 비유는 동시에 군중에게는 숨겨진 지혜와 교훈임을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마 13:34-35).
감추인 것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 예수의 사역이지만, 또한 동시에 말씀하시지만 제자들이 깨닫지 못하고 그 뜻이 감추어진 것이 있었다(눅 18:34). 인자의 고난과 죽음은 비밀스러운 하나님의 뜻이었다. 하나님의 뜻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나라도 숨김과 드러남의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곧 천국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나타내기도 한다. 천국은 밭에 감추인(κεκρυμμένῳ, 케그룸메노) 보화와 같고, 숨겨진 값진 진주와 같은 것이다(마 13:44-45). 감추어졌으나 결국 시간이 지나서 드러나는 천국은 마치 밭에 심겨진 겨자씨와 같은 것이다(마 13:31).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나라를 겨자씨처럼 인생의 밭에 심고 있다. 그리고 세상의 빛을 인생의 품에 안고 있다. 세상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수 있지만, 결국 빛처럼 드러나게 되고, 나무처럼 자라나는 것이다. 작은 자이지만, 하나님의 뜻과 은혜로 하나님의 지혜를 가지게 된 사람이다. 숨김 속에 드러나는 영광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은밀한 중에 기도하고, 남 모르게 구제하고 봉사하지만, 결국 존귀하게 되고 영광스럽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숨김과 드러남의 역사이다.
예수의 존재와 사역은 비밀스러움과 드러냄이 공존하고 있다. 요한복음 1장 서문은 이 사실을 잘 드러내고 있다.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재하다가 세상의 빛으로 왔지만, 어둠의 세상은 그 존재를 깨닫지도 알지도 못한다(요 1:5, 10). 빛은 모든 어둠을 밝히고 드러내는 것이지만, 어둠에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이 빛을 모르는 모순적인 상황이다. 비밀스러움과 드러냄이 하나님의 계시라 할 수 있다. 이것을 표현하는 동사는 κρύπτω(크룹토)이고, 형용사는 κρυπτός(크룹토스)이다. 각각 신약성경에서 18번, 17번 사용되었다. 특별히 마태복음에서 각각 6번 사용되어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예수가 세상의 빛이고, 이 빛을 품은 사람들, 곧 산 위의 동네(교회)는 결코 숨길 수(κρύπτω)가 없고, 곧 드러나게 된다(마 5:14).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시온산의 영광처럼 많은 백성이 보게 되고 거기로 몰려오게 될 것을 암시하고 있다(사 2:3). 이런 드러냄은 결국 예수와 교회의 영광을 말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은밀한 존재로 사람들 가운데 나타나는 하나님의 지혜라 할 수 있다. 하나님께 하는 예수의 감사 기도 가운데, 숨기고 드러나는 하나님의 지혜를 찬양하고 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ἔκρυψας, you have hidden),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마 11:25-26).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이라는 말은 마태복음에서 율법선생이나 서기관, 바리새인들, 즉 유대교 지도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반면에 어린 아이들은 비천하고 세속적인 주님의 제자들을 암시하는 말이다. 이러한 숨김과 드러냄의 이중적 하나님의 역사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에서 하나님의 계시적 지혜임을 주님이 말씀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
혈육(사르크스 σάρξ)에게는 숨겨지는 것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택한 자에게는 드러나고 알게 되는 것임을 이중적으로 말하고 있다. 드러냄과 숨김의 이중성을 가장 분명하게 보이는 것이 예수의 비유의 가르침이다. 마가복음 4:33에서는 많은 비유로 예수님이 제자들을 가르치는 것은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 가르침을 주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군중이 없고 제자들과 있을 때에는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막 4:34) 라고 주님의 교훈을 분명히 드러내셨다. 하지만 마태복음은 비유는 동시에 군중에게는 숨겨진 지혜와 교훈임을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마 13:34-35).
감추인 것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 예수의 사역이지만, 또한 동시에 말씀하시지만 제자들이 깨닫지 못하고 그 뜻이 감추어진 것이 있었다(눅 18:34). 인자의 고난과 죽음은 비밀스러운 하나님의 뜻이었다. 하나님의 뜻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나라도 숨김과 드러남의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곧 천국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나타내기도 한다. 천국은 밭에 감추인(κεκρυμμένῳ, 케그룸메노) 보화와 같고, 숨겨진 값진 진주와 같은 것이다(마 13:44-45). 감추어졌으나 결국 시간이 지나서 드러나는 천국은 마치 밭에 심겨진 겨자씨와 같은 것이다(마 13:31).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나라를 겨자씨처럼 인생의 밭에 심고 있다. 그리고 세상의 빛을 인생의 품에 안고 있다. 세상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수 있지만, 결국 빛처럼 드러나게 되고, 나무처럼 자라나는 것이다. 작은 자이지만, 하나님의 뜻과 은혜로 하나님의 지혜를 가지게 된 사람이다. 숨김 속에 드러나는 영광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은밀한 중에 기도하고, 남 모르게 구제하고 봉사하지만, 결국 존귀하게 되고 영광스럽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숨김과 드러남의 역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