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스도인은 "왜"전도해야 하며, 전도는 "무엇"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일까?
먼저, 성경이 말하는 전도는 "영혼 구원"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영혼 구원"이 말 그대로 죽은 다음 영혼을 내세적 천당으로 인도하는 것을 말한다면, 성경은 그런 전도를 말하지 않는다. 전도의 금과옥조 말씀인 마태복음 28장의 전도 대사명의 말씀을 보자.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3)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마 28:19-20)
이 말씀에 따르면 전도의 목적은 모든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대로 살게 하는 것이다. 영혼 구원에 대한 내용은 없다. 물론, 그렇게 살면 죽어 천국 간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그 다음 문제이다. 예수님께서 전도의 목적을 영혼 구원으로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마가복음의 병행구절에는 "구원"이 전도의 목적으로 나온다.
"너희는 온 세상에 나가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을 것이다.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표징들이 따를 터인데, 곧 그들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으로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들며, 독약을 마실지라도 절대로 해를 입지 않으며, 아픈 사람들에게 손을 얹으면 나을 것이다."(막 16:15-18)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구원"은 내세적 영혼 구원일까? 아니다. 이어지는 긴 부연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믿는 자들의 구원 현실은, 죽은 다음 일어나는 영혼의 내세적 구원이 아니라, 예수님과 동행할 때 주시는 지금-여기의 구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 전반이 그렇다. 신약 여기저기에 분명히 죽은 후 믿는 자들이 받게 될 내세적 구원에 대한 약속의 말씀이 있다.(전에 쓴 "하나님 나라" 묵상글 참고) 그러나, 예수님의 관심이 여기에 있지 않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는 현재적이고 미래적이되, 지금-여기 중심적이고 통전적이다.
바울 사도도 마찬가지이다. 바울 사도가 세계를 무대로 복음을 전하였을 때, 그의 전도 목적을, 그곳의 사람들이 죽은 후에 "천당" 가게 하기 위해서라고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런 이해는 바울 사도를 지나치게 협소하게 이해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영혼 구원"을 위해 전도해야 한다고 주창해 왔고 지금도 주창하고 있다. 신앙적 행위를 "영혼"을 위한 것으로 한정하면 자칫 영지주의가 될 수 있다. 초대교회는 영지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에 맞서 싸웠다.
자, 위의 논지를 수용한다고 하자. 전도가 필요없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전도의 목적이 영혼 구원에 있지 않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전도의 필요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영혼구원을 위한다"는 전도 목적을 상정하지 않는다면, 전도의 목적에 대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성경이 말하는 전도의 내용은 무엇이고 목적은 무엇인가? 전도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필요하다.
이미 쓴 "전도에 대한 묵상" 글에서 다음과 같은 점을 밝힌 바 있다.
- "전도"에 직접 해당하는 헬라어는 없다.
- "전도"에 가장 근접한 헬라어는 유앙겔리조(εὐαγγελίζω)인데, 복음을 전하다는 뜻이다.
- 유앙겔리조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유앙겔리조는 예수에 관한 이야기이거나, 예수 믿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다.
"전도하다"에 관한 이런 이해 가슴에 품고 아래 한 구절 말씀을 읽어보자.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요일 4:19)
이 한 구절의 말씀만큼 전도를 잘 설명하고 있는 말씀도 드물다. 전도는 하나님의 사랑, 곧 아가페로부터 출발한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사랑하고자 한다. (이때 하나님의 사랑은 단연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를 통하여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났기 때문이다.(롬 5:8))
-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여 인격적 변화를 경험하였다.
-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안에 고여 있지 않고, 우리로부터 넘쳐 흐른다.
- 넘쳐 흐르는 방식 중 하나가 전도이다.
그러므로, 전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변화받은 우리가 행하게 되는 자연스러운 아가페 행위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는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데, 사랑의 방식 중 하나가 전도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가 우리에게 차고 넘쳐 타자에게 흘러가는 방식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선교이고 다른 하나는 전도이다.
- 선교는 그 방향이, 안에서 출발하여 밖을 향한다. 선교의 다른 말은 베품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이웃과 나누는 베품 말이다. 이 베품에는 어떤 조건이나 목적이 따로 있지 않다. 교회로 데라고 오는 것이 목적일 수 없다. 그저 우리가 이미 받은 것을 나눔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나타내려는 것 뿐이다.
- 반면 전도의 방향은 밖에서 안이라 할 수 있다. 전도의 다른 말은 초대이다.
전도는 다시 두 가지 차원을 가진 초대인데
-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초대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것이 전도의 궁극적 목적이다. 이 전도는 어렵다. 예수님은 볼 수 없는 분이기 때문이다.
- 볼 수 없는 예수님을 볼 수 있는 곳이 교회이다. 예수님을 만날 수 없는 세상 속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현현이다.(요 14:12) 교회는 그런 곳이어야만 한다. 그래서 전도의 다른 하나의 방향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의 초대이다. 예수 향기가 흘러 예수를 느낄 수 있는 교회라면 전도傳道가 곧 전교傳敎가 될 수 있다. 만일 아직 교회가 그런 수준에 다다르지 못했다면, 전도에 집중하기 보다는 그리스도 향기나는 교회가 되어가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공동체로 초대하여, 그 사랑을 함께 나누며 그 사랑으로 서로 세워주며 그 사랑으로 살도록 서로 돕는 것. 전도는 그런 것이다. 전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앙겔리조에 대한 이해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아가페에 대한 이해 역시 깊어질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인은 "왜"전도해야 하며, 전도는 "무엇"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일까?
먼저, 성경이 말하는 전도는 "영혼 구원"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영혼 구원"이 말 그대로 죽은 다음 영혼을 내세적 천당으로 인도하는 것을 말한다면, 성경은 그런 전도를 말하지 않는다. 전도의 금과옥조 말씀인 마태복음 28장의 전도 대사명의 말씀을 보자.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3)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마 28:19-20)
이 말씀에 따르면 전도의 목적은 모든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대로 살게 하는 것이다. 영혼 구원에 대한 내용은 없다. 물론, 그렇게 살면 죽어 천국 간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그 다음 문제이다. 예수님께서 전도의 목적을 영혼 구원으로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마가복음의 병행구절에는 "구원"이 전도의 목적으로 나온다.
"너희는 온 세상에 나가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을 것이다.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표징들이 따를 터인데, 곧 그들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으로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들며, 독약을 마실지라도 절대로 해를 입지 않으며, 아픈 사람들에게 손을 얹으면 나을 것이다."(막 16:15-18)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구원"은 내세적 영혼 구원일까? 아니다. 이어지는 긴 부연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믿는 자들의 구원 현실은, 죽은 다음 일어나는 영혼의 내세적 구원이 아니라, 예수님과 동행할 때 주시는 지금-여기의 구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 전반이 그렇다. 신약 여기저기에 분명히 죽은 후 믿는 자들이 받게 될 내세적 구원에 대한 약속의 말씀이 있다.(전에 쓴 "하나님 나라" 묵상글 참고) 그러나, 예수님의 관심이 여기에 있지 않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는 현재적이고 미래적이되, 지금-여기 중심적이고 통전적이다.
바울 사도도 마찬가지이다. 바울 사도가 세계를 무대로 복음을 전하였을 때, 그의 전도 목적을, 그곳의 사람들이 죽은 후에 "천당" 가게 하기 위해서라고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런 이해는 바울 사도를 지나치게 협소하게 이해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영혼 구원"을 위해 전도해야 한다고 주창해 왔고 지금도 주창하고 있다. 신앙적 행위를 "영혼"을 위한 것으로 한정하면 자칫 영지주의가 될 수 있다. 초대교회는 영지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에 맞서 싸웠다.
자, 위의 논지를 수용한다고 하자. 전도가 필요없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전도의 목적이 영혼 구원에 있지 않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전도의 필요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영혼구원을 위한다"는 전도 목적을 상정하지 않는다면, 전도의 목적에 대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성경이 말하는 전도의 내용은 무엇이고 목적은 무엇인가? 전도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필요하다.
이미 쓴 "전도에 대한 묵상" 글에서 다음과 같은 점을 밝힌 바 있다.
"전도하다"에 관한 이런 이해 가슴에 품고 아래 한 구절 말씀을 읽어보자.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요일 4:19)
이 한 구절의 말씀만큼 전도를 잘 설명하고 있는 말씀도 드물다. 전도는 하나님의 사랑, 곧 아가페로부터 출발한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사랑하고자 한다. (이때 하나님의 사랑은 단연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를 통하여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났기 때문이다.(롬 5:8))
그러므로, 전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변화받은 우리가 행하게 되는 자연스러운 아가페 행위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는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데, 사랑의 방식 중 하나가 전도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가 우리에게 차고 넘쳐 타자에게 흘러가는 방식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선교이고 다른 하나는 전도이다.
전도는 다시 두 가지 차원을 가진 초대인데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공동체로 초대하여, 그 사랑을 함께 나누며 그 사랑으로 서로 세워주며 그 사랑으로 살도록 서로 돕는 것. 전도는 그런 것이다. 전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앙겔리조에 대한 이해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아가페에 대한 이해 역시 깊어질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