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ubris ὕβρις
잠언 11:2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
잠언 29:23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
잠언의 이 두 구절 말씀에서 "교만"과 "겸손"이 대비되고 있다. 칠십인역에서 "교만"에 사용된 헬라어는 휴브리스ὕβρις이다. 휴브리스를 묵상하며 굳이 구약 칠십인역을 인용한 것은, 신약에서 이 단어가 별로 사용되지 않았고, 드물게 사용된 경우에도 "교만"의 뜻으로 사용되지 않고 "손해, 손상"의 뜻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휴브리스(ὕβρις)의 뜻은 세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 하나는 자신에 대해 지나친 자부심을 갖는 것이다. "교만한 마음"인데, 영어로는 arrogance이다.
- 다른 하나는 "교만한 마음"이 다른 사람을 향하여 발산되어 불손하게 대하는 태도를 뜻한다. 한글로는 "오만"이고 영어로는 Insolence이다. 박한표(클릭)는 자만 교만 거만 오만을 구별하여, 자기에 대한 자부심에서 출발하여 점차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태도를 나타내는 단어로 자만 교만 자만 오만을 꼽으며 이 네 단어가 어떻게 미묘하게 다른지 논하였는데, 유익한 글이다. 이 해석에 따르면 교만은 방자와 오만은 불손과 어울리는 단어이다. 휴브리스는 교만과 오만 모두를 담고 있는 단어이다.
- 휴브리스가 남에게 표현되면 당하는 사람은 손해, 손상, 능욕을 입게 된다. 신약성서의 휴브리스는 용례는 교만, 오만 보다는 그로 인하여 당하게 되는 손해 송상 능욕에 집중되어 있다. (행 27:10, 21, 고후 12:10)
휴브리스의 동사형 휴브리조ὑβρίζω 역시 신약에서는 주로 "모욕하다"(마 22:6, 행 14:5, 눅 18:32, 살전 2:2)에 한정되어 사용되었다. 그러나 휴브리스/휴브리조의 뿌리 뜻은 교만한 마음이나 오만한 행동이라는 점을 기억하자.
위에서 휴브리스가 직접 사용된 잠언을 예로 들었지만, 성경에는 휴브리스가 직접 사용되지 않았어도 휴브리스가 문제되는 여러 장면은 많다. 선악과를 따먹는 아담과 하와 이야기도, 자신들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바벨탑을 쌓은 선조도, 그들의 행동은 오만이었고 그 바탕에는 교만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휴브리스가 문제의 핵심이다. 예언서에서 비판 받는 이스라엘의 문제 역시 휴브리스였고, 주변 강대국의 문제도 휴브리스였다.
휴브리스에 대한 논의는 성경 밖 그리스 고전 문학 논의에서 활발하다. 휴브리스와 관련하여 휴브리스-아테-네메시스의 사이클을 흔히 이야기하지만, 휴브리스를 일으키는 원인으로 아레테부터 살피는 것이 좋겠다. 이 사이클은 여러 성경 이야기를 이해하는 틀거리가 될 것이다.
ἀρετή 아레테 excellence
무엇인가에 보이는 탁월함을 아레테라 한다. 좁은 의미에서는 도덕적 탁월함(덕 virtue)을 뜻하지만, 넓게는 빼어난 능력을 뜻하여 고대 그리스의 교육의 목적이(클릭) 된다.
아킬레우스의 예를 들어보자. 아킬레우스는 싸움을 잘 하고 전투에 능하였다. 그리스에서 아킬레우스를 능가할 전사는 없었다. 그는 싸움에 아레테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아킬레우스의 자부심(pride)이었다. 자부심을 갖는 단계는 아무 문제가 없다
ὕβρις 휴브리스 arrogance
그런데 자신의 능력과 잘남에 대한 자부심이 지나치면 자만심이 들어오고 휴브리스에 빠지게 된다. 휴브리스는 아레테에 대한 과도한 자부심이다. 휴브리스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신약의 구절이 있다.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인데, 예수님의 이 비유는 이렇게 시작된다.
스스로 의롭다고 확신하고 남을 멸시하는 몇몇 사람에게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눅 18:9)
이 비유에서 휴브리스라는 단어는 사용되지 않았지만, 이보다 더 휴브리스를 잘 정의하는 표현이 있을까 싶다. 휴브리스는 "스스로를 의롭다고 확신하여 남을 멸시하는 마음"이다. 약간의 변형도 가능하겠다. "스스로 잘 났다고 생각하여, 스스로 능력 있다고 생각하여, 스스로 많이 가졌다고 생각하여"와 같은 변형 말이다.
ἄτη 아테 어리석은 행동
휴브리스에 빠지면, 즉 교만한 마음을 갖게 되면, 눈이 멀고 귀가 막히게 된다. 제대로 판단할 수 있는 합리적 이성을 잃어버린다. 그 결과 해서는 안될 짓을 하고 만다. 이 행동을 아테라고 한다. 함부로 말하고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아킬레스는 트로이 성의 왕자 헥토르와 싸워 이겼다. 거기까지는 아레테를 보인 일이고 프라이드를 가질만한 일로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런데, 그의 마음에 휴브리스가 들어왔다. 눈이 멀고 귀가 막혀 해서는 안될 일을 하고 말았다. 헥토의 시신을 돌려주지 않고 마차에 매단채 달려, 자기 백성을 위하여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장수 헥토르의 시신을 모욕한 것이다. 아테의 예이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휴브리스에 빠진 바리새파 사람은 이렇게 기도하였다. 기도의 순서를 원문에 가깝게 바꾸면 이렇다.
A: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내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눅 18:12)
B: 나는, 내가 다른 사람과 같지 않은데, 남의 것을 빼앗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 특별히 이 세리와는 같지 않아 감사합니다.(눅 18:11)
A는 이 바리새인의 아레테이다. 금식하고 십일조 바치는 종교적 헌신을 평생 해왔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아레테가 휴브리스와 아테로 드러나 버렸다. B는 휴브리스의 마음과 그것이 남을 비난하는 아테로 발현되었음을 보여준다. 이것이 바리새인의 문제였다.
νέμεσις 네메시스 하나님의 응징
아레테, 휴브리스, 아테 다음에 하나 더 기억할 단어는 네메시스이다. 휴브리스에 빠져 아테를 행한 인간들을 신들이 그냥 두지 않는다. 휴브리스의 끝은 인간이 스스로 신의 자리를 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 최고 전사 아킬레스가 싸움에서 패배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불멸의 전사 아킬레스는 파리스가 쏜 화살에 아킬레스건을 맞아 죽고 말았다. 화살로 아킬레스건을 맞춘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데, 아폴론 신이 파리스를 도와주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이렇게 휴브리스에 빠진 아킬레스는 아폴론 신의 네메시스에 의해 죽임 당하였다.
누가복음 비유에 나오는 네메시스는 무엇인가?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서 자기 집으로 내려간 사람은, 저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라 이 세리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눅 18:14)
자신은 자신의 종교적 아레테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인정 받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했겠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는 그런 인정을 받지 못하였고, 스스로 높였기 때문에 결국은 낮아질 것이라 말씀하셨다.
문학 속 휴브리스 사이클
주술에 심취하여, 왕이 될 운명이라는 주술가의 예언을 듣고, 휴브리스에 빠져 왕이 되겠다는 꿈을 꾼 사람이 있다. 그는 휴브리스 때문에 눈이 멀어서, 자신의 앞 길에 방해가 되는 사람을 핍박하고 죽이기까지 하는 아테를 저질렀다. 그의 아내는 한 술 더 떠서 그가 용기를 잃을 때마다 옆에서 격려하고 더욱 표악해 질 것을 독촉하였다. 그렇게 바라던 왕이 되기는 하였지만, 결국은 신의 네메시스 때문에 그의 아내는 실성하였고, 그는 죽임당한다. 누구 이야기인가? 세익스피어 비극의 주인공 멕베스 이야기이다. 세익스피어의 비극에도 휴브리스, 아테, 네메시스라는 사이클을 볼 수 있다.
놀랍게도 휴브리스 이야기는 현대 경영학의 한 주제이기도 하다. 학술 DB 경영학 논문들 제목 속에서 CEO Hubris라든지 Brand Hubris와 같은 단어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성공하여 큰 기업을 이룬 CEO가 휴브리스에 빠졌을 때, 다른 사람 말을 전혀 듣지 않고 아테를 행하고, 그 결과 그의 회사가 큰 위험에 빠지게 되는 사례에 관한(혹은 이를 방지할 방안)에 관한 논문들이다.
아레테와 그에 따른 자부심은 좋은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휴브리스를 불러들이면 아테, 네메시스로 이어져 파멸하고 만다. 내 마음의 상태를 살펴볼 일이다.
Hubris ὕβρις
잠언 11:2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
잠언 29:23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
잠언의 이 두 구절 말씀에서 "교만"과 "겸손"이 대비되고 있다. 칠십인역에서 "교만"에 사용된 헬라어는 휴브리스ὕβρις이다. 휴브리스를 묵상하며 굳이 구약 칠십인역을 인용한 것은, 신약에서 이 단어가 별로 사용되지 않았고, 드물게 사용된 경우에도 "교만"의 뜻으로 사용되지 않고 "손해, 손상"의 뜻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휴브리스(ὕβρις)의 뜻은 세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휴브리스의 동사형 휴브리조ὑβρίζω 역시 신약에서는 주로 "모욕하다"(마 22:6, 행 14:5, 눅 18:32, 살전 2:2)에 한정되어 사용되었다. 그러나 휴브리스/휴브리조의 뿌리 뜻은 교만한 마음이나 오만한 행동이라는 점을 기억하자.
위에서 휴브리스가 직접 사용된 잠언을 예로 들었지만, 성경에는 휴브리스가 직접 사용되지 않았어도 휴브리스가 문제되는 여러 장면은 많다. 선악과를 따먹는 아담과 하와 이야기도, 자신들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바벨탑을 쌓은 선조도, 그들의 행동은 오만이었고 그 바탕에는 교만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휴브리스가 문제의 핵심이다. 예언서에서 비판 받는 이스라엘의 문제 역시 휴브리스였고, 주변 강대국의 문제도 휴브리스였다.
휴브리스에 대한 논의는 성경 밖 그리스 고전 문학 논의에서 활발하다. 휴브리스와 관련하여 휴브리스-아테-네메시스의 사이클을 흔히 이야기하지만, 휴브리스를 일으키는 원인으로 아레테부터 살피는 것이 좋겠다. 이 사이클은 여러 성경 이야기를 이해하는 틀거리가 될 것이다.
ἀρετή 아레테 excellence
무엇인가에 보이는 탁월함을 아레테라 한다. 좁은 의미에서는 도덕적 탁월함(덕 virtue)을 뜻하지만, 넓게는 빼어난 능력을 뜻하여 고대 그리스의 교육의 목적이(클릭) 된다.
아킬레우스의 예를 들어보자. 아킬레우스는 싸움을 잘 하고 전투에 능하였다. 그리스에서 아킬레우스를 능가할 전사는 없었다. 그는 싸움에 아레테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아킬레우스의 자부심(pride)이었다. 자부심을 갖는 단계는 아무 문제가 없다
ὕβρις 휴브리스 arrogance
그런데 자신의 능력과 잘남에 대한 자부심이 지나치면 자만심이 들어오고 휴브리스에 빠지게 된다. 휴브리스는 아레테에 대한 과도한 자부심이다. 휴브리스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신약의 구절이 있다.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인데, 예수님의 이 비유는 이렇게 시작된다.
스스로 의롭다고 확신하고 남을 멸시하는 몇몇 사람에게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눅 18:9)
이 비유에서 휴브리스라는 단어는 사용되지 않았지만, 이보다 더 휴브리스를 잘 정의하는 표현이 있을까 싶다. 휴브리스는 "스스로를 의롭다고 확신하여 남을 멸시하는 마음"이다. 약간의 변형도 가능하겠다. "스스로 잘 났다고 생각하여, 스스로 능력 있다고 생각하여, 스스로 많이 가졌다고 생각하여"와 같은 변형 말이다.
ἄτη 아테 어리석은 행동
휴브리스에 빠지면, 즉 교만한 마음을 갖게 되면, 눈이 멀고 귀가 막히게 된다. 제대로 판단할 수 있는 합리적 이성을 잃어버린다. 그 결과 해서는 안될 짓을 하고 만다. 이 행동을 아테라고 한다. 함부로 말하고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아킬레스는 트로이 성의 왕자 헥토르와 싸워 이겼다. 거기까지는 아레테를 보인 일이고 프라이드를 가질만한 일로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런데, 그의 마음에 휴브리스가 들어왔다. 눈이 멀고 귀가 막혀 해서는 안될 일을 하고 말았다. 헥토의 시신을 돌려주지 않고 마차에 매단채 달려, 자기 백성을 위하여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장수 헥토르의 시신을 모욕한 것이다. 아테의 예이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휴브리스에 빠진 바리새파 사람은 이렇게 기도하였다. 기도의 순서를 원문에 가깝게 바꾸면 이렇다.
A: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내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눅 18:12)
B: 나는, 내가 다른 사람과 같지 않은데, 남의 것을 빼앗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 특별히 이 세리와는 같지 않아 감사합니다.(눅 18:11)
A는 이 바리새인의 아레테이다. 금식하고 십일조 바치는 종교적 헌신을 평생 해왔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아레테가 휴브리스와 아테로 드러나 버렸다. B는 휴브리스의 마음과 그것이 남을 비난하는 아테로 발현되었음을 보여준다. 이것이 바리새인의 문제였다.
νέμεσις 네메시스 하나님의 응징
아레테, 휴브리스, 아테 다음에 하나 더 기억할 단어는 네메시스이다. 휴브리스에 빠져 아테를 행한 인간들을 신들이 그냥 두지 않는다. 휴브리스의 끝은 인간이 스스로 신의 자리를 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 최고 전사 아킬레스가 싸움에서 패배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불멸의 전사 아킬레스는 파리스가 쏜 화살에 아킬레스건을 맞아 죽고 말았다. 화살로 아킬레스건을 맞춘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데, 아폴론 신이 파리스를 도와주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이렇게 휴브리스에 빠진 아킬레스는 아폴론 신의 네메시스에 의해 죽임 당하였다.
누가복음 비유에 나오는 네메시스는 무엇인가?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서 자기 집으로 내려간 사람은, 저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라 이 세리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눅 18:14)
자신은 자신의 종교적 아레테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인정 받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했겠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는 그런 인정을 받지 못하였고, 스스로 높였기 때문에 결국은 낮아질 것이라 말씀하셨다.
문학 속 휴브리스 사이클
주술에 심취하여, 왕이 될 운명이라는 주술가의 예언을 듣고, 휴브리스에 빠져 왕이 되겠다는 꿈을 꾼 사람이 있다. 그는 휴브리스 때문에 눈이 멀어서, 자신의 앞 길에 방해가 되는 사람을 핍박하고 죽이기까지 하는 아테를 저질렀다. 그의 아내는 한 술 더 떠서 그가 용기를 잃을 때마다 옆에서 격려하고 더욱 표악해 질 것을 독촉하였다. 그렇게 바라던 왕이 되기는 하였지만, 결국은 신의 네메시스 때문에 그의 아내는 실성하였고, 그는 죽임당한다. 누구 이야기인가? 세익스피어 비극의 주인공 멕베스 이야기이다. 세익스피어의 비극에도 휴브리스, 아테, 네메시스라는 사이클을 볼 수 있다.
놀랍게도 휴브리스 이야기는 현대 경영학의 한 주제이기도 하다. 학술 DB 경영학 논문들 제목 속에서 CEO Hubris라든지 Brand Hubris와 같은 단어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성공하여 큰 기업을 이룬 CEO가 휴브리스에 빠졌을 때, 다른 사람 말을 전혀 듣지 않고 아테를 행하고, 그 결과 그의 회사가 큰 위험에 빠지게 되는 사례에 관한(혹은 이를 방지할 방안)에 관한 논문들이다.
아레테와 그에 따른 자부심은 좋은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휴브리스를 불러들이면 아테, 네메시스로 이어져 파멸하고 만다. 내 마음의 상태를 살펴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