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탄절 이야기 중 가장 인상적인 이야기는 아마도, 동방박사 세 사람이 마굿간 구유에 뉘인 아기 예수를 찾아와 경배하는 장면일 것이다. 그 장면은 "그 어린 주 예수 눌자리 없어"나 "동방박사 세 사람 귀한 예물 가지고"와 같은 성탄 찬송과 함께, 아기 예수 탄생을 따뜻하게 우리 마음에 심어주며 성탄절의 대표 이미지가 되었다. 오늘 묵상의 주제는 그 이미지 속 주인공 동방박사이다.
첫째 이야기
놀라울 수도 있겠지만, 사실 '동방박사가 구유에 뉘인 아기 예수께 경배하는 이야기'는 성경에서 찾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성경을 잘 읽어 보자. 세 동방박사 이야기는 마태복음에만 나오는데, 그들이 아기 예수를 찾은 곳, 곧 별이 멈추어 선 곳은 마굿간이 아니라 베들레헴에 있는 예수님의 집이었다.
마 2:9, 11 그런데 동방에서 본 그 별이 그들 앞에 나타나서 그들을 인도해 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에 이르러서, 그 위에 멈추었다. 그들은 그 집에 들어가서, 아기가 그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서 그에게 경배하였다.
마태복음의 이야기에는 호적 조사 이야기도 없고, 마리와 요셉의 여행 이야기도 없으며, 당연히 마굿관이나 구유 이야기도 없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곳은 누가복음이다. 마리아와 요셉이 갈릴리 나사렛에서 유대의 베들레헴으로 호적 등록을 하려고 갔다가 아기를 낳게 된 것이다.
눅 2:7 마리아가 첫 아들을 낳아서,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눕혀 두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방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대로, 누가복음에는 동방박사 이야기가 없다. 누가복음에서 동방박사 역할을 하는 조연은 양떼를 지키는 목자들이다. 그러므로 동방박사들이 마굿간 구유에 뉘인 아기 예수를 경배했다는 이야기는, 마태의 탄생 이야기와 누가의 탄생 이야기를 합쳐 만든 이야기인 것이다.
둘째 이야기
동방박사에 사용된 헬라어는 μάγοι ἀπὸ ἀνατολῶν(마고이 아포 아나톨론)이다. ἀνατολή(아나톨레)는 '해 뜨는 곳' 곧 '동쪽'을 의미하고, ἀπὸ ἀνατολῶν은 '동쪽으로부터 온'이라는 뜻이다. 문제는 μάγοι(마고이)의 해석이다. 동방박사를 말 그대로 풀면 '동쪽에서 온 박사'인데, 마고이를 "박사"라고 번역한 것은 괜찮은 번역인가? 새번역과 개정개역 모두 "박사"에 각주를 붙이고 "점성가"를 덧붙여 두었다. 일단 "동방박사"의 "박사"가 오늘날 아카데미아의 "박사"와는 다른 부류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마고이'(단수 μάγος 마고스)는 어떤 부류를 일컫는 말인가? 점성가인가?
헬라어 렉시콘 BDAG는 마고스(μάγος)를 "페르시아와 바벨론의 지혜로운 사람과 사제(priest)로서, 천문(astrology)을 읽는데 능하고 꿈이나 다른 주술적 표징들(occult arts)을 읽는데 능한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아주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마고이는 페르시아 조로아스터교의 사제를 일컫는다고 추정되지만, 그것은 단지 기원에 대한 추정일 뿐이고, 마고이는 그 보다 넓은 카테고리를 담고 있다. 꼭 페르시아가 아니라도, 꼭 조로아스터교가 아니라도, 꼭 사제가 아니라도, "마고이"라고 불려진 예를 많이 찾을 수 있다.
마고이를 마고이 되게 하는 것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주술'이었다. 고대 문화 속에서 마고이들이 행하는 마게이아μαγεία는, 영어로는 흔히 magic이라 번역되지만, 오늘날의 마술사(예를 들어, 이은결이나 최현우)가 행하는 마술과는 거리가 멀었다. 마고이들이 행하는 매직은 한마디로, "하늘의 영적 권세들(transcendent powers)을 컨트롤하기 위한 의식(rite)"이다. 그 당시 마게이아는 종교적 성격을 가졌다는 점이 오늘날의 매직과는 달랐다. 그렇기 때문에 마게이아μαγεία를 옮길 수 있는 적절한 단어는 "주술"이고, 그것을 행하는 사람인 마고스는 "주술가"이다. 그렇게 번역하되, 고대의 주술은 오늘날의 주술(무속)이 가지고 있는 저급한 이미지가 아니라, 철학적 지혜나 종교적 능력과 연결된 제법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과, 주술가(마고스)들은 지금보다는 높은 사회적 대우를 받았다는 점을 기억하면 좋겠다.
예수 탄생 시기 페르시아는 파르티아(Parthia, 기원전 3세기-기원후 3세기)라는 이름으로 존재하였고, 로마에 정복당하지 않았다. 예수를 찾아 온 주술가들이 파르티아로부터 온 것인지 여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동방은 늘 신비한 땅이었고, 신비로 가득찬 마고이들이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는 그림은 아기 예수의 탄생에 신비함을 더하기에 충분한 이야기였다.
마태복음의 탄생 이야기 밖에서도 마고이를 찾아볼 수 있다. 성경 밖에서는 요세푸스, 저스틴 마터, Gospel of James 등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이 글에서는 성경의 용례만 살필 것이다. 성경 속 다른 마고이 용례만 살펴도 마고이의 뜻을 넓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마고이가 등장하는 칠십인역 성경은 다니엘서이다. 다니엘서 2장에 느부갓네살 왕이 꿈꾼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는 꿈풀이를 위하여 바빌론의 "마술사와 주술가와 점쟁이와 점성가들"(개정개역은 "박수와 술객과 점쟁이와 갈대아 술사")을 불러들였다.(2:2) 여기서 "주술가"(술객)에 해당하는 헬라어가 마고이이다. 같은 표현이 2장 10절에 한번 더 나온다. 우리는 다니엘서가 나열한 "마술가와 주술가와 점쟁이와 점성가"의 차이를 알지 못한다. 설득력 있는 추정은 이들 모두는 "주술가"들인데, 주술을 위해 사용하는 수단의 차이 때문에 달리 불렸을 것이라는 점이다.
신약의 다른 장면에 등장하는 마고이는 사도행전 8장이다. 사마리아에 있는 시몬이라는 사람이 등장하는데, 그에게 마고스나 마고이가 칭호로 사용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가 행한 일을 설명하는 9절의 동사 μαγεύω(마규오, 주술을 행하다)나 11절에서 그가 행한 일을 설명하는 명사 μαγεία(마게이아, 주술)는 그가 마고스였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서구에서는 그를 Simon Magus라고 부르는데 이때 Magus(라틴)는 μάγος애서 왔다.
사도행전 8:9-11
그 성에 시몬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마술(=주술)을 부려서 사마리아 사람들을 놀라게 하며, 스스로 큰 인물인 체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낮은 사람으로부터 높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사람이야말로 이른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의 소유자이다" 하고 말하면서, 그를 따랐다. 사람들이 그를 따른 것은, 오랫동안 그가 마술(=주술)로 그들을 놀라게 했기 때문이다.
시몬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μάγος가 "주술을 행하는 자"라는 의미로 넓게(동방, 특정종교, 사제라는 필터 없이)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더하여 시몬은 주술을 행하는 이들의 목적을 보여주는데, 자기 자신을 위하여 영적 존재의 힘이나 기운을 이용하겠다는 것이다. 사마리아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세례와 성령 세례를 받은 반면, 시몬 마구스는 끝내 성령을 받지 못한 인물로 부정적으로 기록되었다.
사도행전에서 다시 마고스를 만나는데, 13장에 나오는 바예수 혹은 엘리마라고 불리는 자이다. 6절과 8절에서 그를 마고스(마술사=주술사)라고 부른다. Bar-Jesus는 "예수의 아들"이라는 뜻이고, 엘루마는 아랍어 ꜥalima에서 온 말로, 그 뜻은 "미리 보다" "앞서 보다"이고, 그로부터 "선지자"의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름의 뜻은 '선지자'이지만, 사도행전은 주술을 행하는 그를 "거짓 선지자"(6절)라고 분명히 선언하였다. 바울사도가 주술가 바예수를 노려보며 한 말은 모든 주술가 혹은 주술 의존적인 자들에게 주는 의미심장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너, 속임수와 악행으로 가득 찬 악마의 자식아, 모든 정의의 원수야, 너는 주님의 바른 길을 굽게 하는 짓을 그치지 못하겠느냐? 보아라, 이제 주님의 손이 너를 내리칠 것이니, 눈이 멀어서 얼마 동안 햇빛을 보지 못할 것이다."(13:10-11)
주술을 행하는 자들은 영적 세계의 작은 영들과 소통하거나 소통하는 척 하면서("악마의 자식"),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선을 가장하지만 선함을 찾아볼 수 없다.("정의의 원수") 그들을 의존하는 자들은 오직 "자기의 욕심"으로 가득찬 자들로 더러운 "속임수와 악행"을 주술의 이름(신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려는 자들이다.
이렇듯 성경의 마고스 용례 안에서 마고스/마고이가 넓은 스펙트럼을 가진 단어라는 점을 살펴 보았다.
셋째 이야기
마태복음의 탄생 이야기에 나오는 헤롯왕은 이두매 곧 에돔 사람인데, 하스모니안 왕조에서 요직에 올랐던 아버지 안티파스와 함께 자기 권력을 키우는 일에 힘 썼다. 그 방식은 로마에 빌붙는 것이었고 그 결과 그는 혈통으로 유대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유대의 왕위에 올랐다. 이런 배경 때문에 그는 정통성 문제로 인하여 불안증에 시달을까? 그는 동방에서 온 주술가들의 말("유대인의 왕"이 태어날 것이라는)을 의심없이 믿었고, 결국 불안증에 못이겨 베들레헴과 그 주변에서 태어난 두 살 아래 사내 아이 모두를 죽이는 유아 학살을 감행하였다. 예수는 이런 비극적 사건을 배경으로 태어났고, 태어나자 마자 이집트 땅으로 한 밤중에 피신하여야만 하였다. 구약에서 이집트는 정치적 핍박을 받는 이들의 피난처였다.
왕상 11:17 그러나 하닷은 자기 아버지의 신하이던 에돔 사람들을 데리고서, 이집트로 도망하였다. 그 때에 하닷은 아직 어린 소년이었다.
왕상 11:40 솔로몬이 여로보암을 죽이려고 하니, 여로보암은 일어나서 이집트 왕 시삭에게로 도망하여, 솔로몬이 죽을 때까지 이집트에 머물러 있었다.
태어나자마자, 정치적 도피처 이집트로 피난해야 했던 예수의 이야기, 그것이 마태복음 예수 탄생 이야기의 핵심이다. 마태복음의 이 도입부는 예수님이 살아갈 삶이 어떤 종류의 삶인지 미리 보여준다. 비극적이며 슬픈 이야기인데, 이 이야기의 도입부에 헤롯의 불안증을 자극하는 엑스트라로 출연한 인물들이 동방박사인 것이다. 마태복음은 주술에 의존하는 왕이 저지를 수 있는 비극적 사건의 예를 보여주면서, 그런 왕의 피해자 아기 예수의 탄생을 서술하기 위하여 동방에서 온 주술가를 등장시키는 것이다.
엑스트라이지만, 동방박사 출연의 의미는 적다고 할 수 없다. 예수는 주술을 믿고 충동적으로 정책을 정하는 왕의 피해자가 되었다. 그런데 주술의 최고봉에 있는 마고이들은 예수께 와서 경배하였다. 이 아이러니를 통하여 마태복음은 모든 주술을 물리치는 예수 신앙을 탄생 이야기 속에 녹여 선포한 것이다. 예수 신앙은 주술을 꺽는다.
성탄절 이야기 중 가장 인상적인 이야기는 아마도, 동방박사 세 사람이 마굿간 구유에 뉘인 아기 예수를 찾아와 경배하는 장면일 것이다. 그 장면은 "그 어린 주 예수 눌자리 없어"나 "동방박사 세 사람 귀한 예물 가지고"와 같은 성탄 찬송과 함께, 아기 예수 탄생을 따뜻하게 우리 마음에 심어주며 성탄절의 대표 이미지가 되었다. 오늘 묵상의 주제는 그 이미지 속 주인공 동방박사이다.
첫째 이야기
놀라울 수도 있겠지만, 사실 '동방박사가 구유에 뉘인 아기 예수께 경배하는 이야기'는 성경에서 찾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성경을 잘 읽어 보자. 세 동방박사 이야기는 마태복음에만 나오는데, 그들이 아기 예수를 찾은 곳, 곧 별이 멈추어 선 곳은 마굿간이 아니라 베들레헴에 있는 예수님의 집이었다.
마 2:9, 11 그런데 동방에서 본 그 별이 그들 앞에 나타나서 그들을 인도해 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에 이르러서, 그 위에 멈추었다. 그들은 그 집에 들어가서, 아기가 그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서 그에게 경배하였다.
마태복음의 이야기에는 호적 조사 이야기도 없고, 마리와 요셉의 여행 이야기도 없으며, 당연히 마굿관이나 구유 이야기도 없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곳은 누가복음이다. 마리아와 요셉이 갈릴리 나사렛에서 유대의 베들레헴으로 호적 등록을 하려고 갔다가 아기를 낳게 된 것이다.
눅 2:7 마리아가 첫 아들을 낳아서,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눕혀 두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방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대로, 누가복음에는 동방박사 이야기가 없다. 누가복음에서 동방박사 역할을 하는 조연은 양떼를 지키는 목자들이다. 그러므로 동방박사들이 마굿간 구유에 뉘인 아기 예수를 경배했다는 이야기는, 마태의 탄생 이야기와 누가의 탄생 이야기를 합쳐 만든 이야기인 것이다.
둘째 이야기
동방박사에 사용된 헬라어는 μάγοι ἀπὸ ἀνατολῶν(마고이 아포 아나톨론)이다. ἀνατολή(아나톨레)는 '해 뜨는 곳' 곧 '동쪽'을 의미하고, ἀπὸ ἀνατολῶν은 '동쪽으로부터 온'이라는 뜻이다. 문제는 μάγοι(마고이)의 해석이다. 동방박사를 말 그대로 풀면 '동쪽에서 온 박사'인데, 마고이를 "박사"라고 번역한 것은 괜찮은 번역인가? 새번역과 개정개역 모두 "박사"에 각주를 붙이고 "점성가"를 덧붙여 두었다. 일단 "동방박사"의 "박사"가 오늘날 아카데미아의 "박사"와는 다른 부류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마고이'(단수 μάγος 마고스)는 어떤 부류를 일컫는 말인가? 점성가인가?
헬라어 렉시콘 BDAG는 마고스(μάγος)를 "페르시아와 바벨론의 지혜로운 사람과 사제(priest)로서, 천문(astrology)을 읽는데 능하고 꿈이나 다른 주술적 표징들(occult arts)을 읽는데 능한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아주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마고이는 페르시아 조로아스터교의 사제를 일컫는다고 추정되지만, 그것은 단지 기원에 대한 추정일 뿐이고, 마고이는 그 보다 넓은 카테고리를 담고 있다. 꼭 페르시아가 아니라도, 꼭 조로아스터교가 아니라도, 꼭 사제가 아니라도, "마고이"라고 불려진 예를 많이 찾을 수 있다.
마고이를 마고이 되게 하는 것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주술'이었다. 고대 문화 속에서 마고이들이 행하는 마게이아μαγεία는, 영어로는 흔히 magic이라 번역되지만, 오늘날의 마술사(예를 들어, 이은결이나 최현우)가 행하는 마술과는 거리가 멀었다. 마고이들이 행하는 매직은 한마디로, "하늘의 영적 권세들(transcendent powers)을 컨트롤하기 위한 의식(rite)"이다. 그 당시 마게이아는 종교적 성격을 가졌다는 점이 오늘날의 매직과는 달랐다. 그렇기 때문에 마게이아μαγεία를 옮길 수 있는 적절한 단어는 "주술"이고, 그것을 행하는 사람인 마고스는 "주술가"이다. 그렇게 번역하되, 고대의 주술은 오늘날의 주술(무속)이 가지고 있는 저급한 이미지가 아니라, 철학적 지혜나 종교적 능력과 연결된 제법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과, 주술가(마고스)들은 지금보다는 높은 사회적 대우를 받았다는 점을 기억하면 좋겠다.
예수 탄생 시기 페르시아는 파르티아(Parthia, 기원전 3세기-기원후 3세기)라는 이름으로 존재하였고, 로마에 정복당하지 않았다. 예수를 찾아 온 주술가들이 파르티아로부터 온 것인지 여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동방은 늘 신비한 땅이었고, 신비로 가득찬 마고이들이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는 그림은 아기 예수의 탄생에 신비함을 더하기에 충분한 이야기였다.
마태복음의 탄생 이야기 밖에서도 마고이를 찾아볼 수 있다. 성경 밖에서는 요세푸스, 저스틴 마터, Gospel of James 등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이 글에서는 성경의 용례만 살필 것이다. 성경 속 다른 마고이 용례만 살펴도 마고이의 뜻을 넓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마고이가 등장하는 칠십인역 성경은 다니엘서이다. 다니엘서 2장에 느부갓네살 왕이 꿈꾼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는 꿈풀이를 위하여 바빌론의 "마술사와 주술가와 점쟁이와 점성가들"(개정개역은 "박수와 술객과 점쟁이와 갈대아 술사")을 불러들였다.(2:2) 여기서 "주술가"(술객)에 해당하는 헬라어가 마고이이다. 같은 표현이 2장 10절에 한번 더 나온다. 우리는 다니엘서가 나열한 "마술가와 주술가와 점쟁이와 점성가"의 차이를 알지 못한다. 설득력 있는 추정은 이들 모두는 "주술가"들인데, 주술을 위해 사용하는 수단의 차이 때문에 달리 불렸을 것이라는 점이다.
신약의 다른 장면에 등장하는 마고이는 사도행전 8장이다. 사마리아에 있는 시몬이라는 사람이 등장하는데, 그에게 마고스나 마고이가 칭호로 사용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가 행한 일을 설명하는 9절의 동사 μαγεύω(마규오, 주술을 행하다)나 11절에서 그가 행한 일을 설명하는 명사 μαγεία(마게이아, 주술)는 그가 마고스였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서구에서는 그를 Simon Magus라고 부르는데 이때 Magus(라틴)는 μάγος애서 왔다.
사도행전 8:9-11
그 성에 시몬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마술(=주술)을 부려서 사마리아 사람들을 놀라게 하며, 스스로 큰 인물인 체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낮은 사람으로부터 높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사람이야말로 이른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의 소유자이다" 하고 말하면서, 그를 따랐다. 사람들이 그를 따른 것은, 오랫동안 그가 마술(=주술)로 그들을 놀라게 했기 때문이다.
시몬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μάγος가 "주술을 행하는 자"라는 의미로 넓게(동방, 특정종교, 사제라는 필터 없이)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더하여 시몬은 주술을 행하는 이들의 목적을 보여주는데, 자기 자신을 위하여 영적 존재의 힘이나 기운을 이용하겠다는 것이다. 사마리아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세례와 성령 세례를 받은 반면, 시몬 마구스는 끝내 성령을 받지 못한 인물로 부정적으로 기록되었다.
사도행전에서 다시 마고스를 만나는데, 13장에 나오는 바예수 혹은 엘리마라고 불리는 자이다. 6절과 8절에서 그를 마고스(마술사=주술사)라고 부른다. Bar-Jesus는 "예수의 아들"이라는 뜻이고, 엘루마는 아랍어 ꜥalima에서 온 말로, 그 뜻은 "미리 보다" "앞서 보다"이고, 그로부터 "선지자"의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름의 뜻은 '선지자'이지만, 사도행전은 주술을 행하는 그를 "거짓 선지자"(6절)라고 분명히 선언하였다. 바울사도가 주술가 바예수를 노려보며 한 말은 모든 주술가 혹은 주술 의존적인 자들에게 주는 의미심장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너, 속임수와 악행으로 가득 찬 악마의 자식아, 모든 정의의 원수야, 너는 주님의 바른 길을 굽게 하는 짓을 그치지 못하겠느냐? 보아라, 이제 주님의 손이 너를 내리칠 것이니, 눈이 멀어서 얼마 동안 햇빛을 보지 못할 것이다."(13:10-11)
주술을 행하는 자들은 영적 세계의 작은 영들과 소통하거나 소통하는 척 하면서("악마의 자식"),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선을 가장하지만 선함을 찾아볼 수 없다.("정의의 원수") 그들을 의존하는 자들은 오직 "자기의 욕심"으로 가득찬 자들로 더러운 "속임수와 악행"을 주술의 이름(신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려는 자들이다.
이렇듯 성경의 마고스 용례 안에서 마고스/마고이가 넓은 스펙트럼을 가진 단어라는 점을 살펴 보았다.
셋째 이야기
마태복음의 탄생 이야기에 나오는 헤롯왕은 이두매 곧 에돔 사람인데, 하스모니안 왕조에서 요직에 올랐던 아버지 안티파스와 함께 자기 권력을 키우는 일에 힘 썼다. 그 방식은 로마에 빌붙는 것이었고 그 결과 그는 혈통으로 유대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유대의 왕위에 올랐다. 이런 배경 때문에 그는 정통성 문제로 인하여 불안증에 시달을까? 그는 동방에서 온 주술가들의 말("유대인의 왕"이 태어날 것이라는)을 의심없이 믿었고, 결국 불안증에 못이겨 베들레헴과 그 주변에서 태어난 두 살 아래 사내 아이 모두를 죽이는 유아 학살을 감행하였다. 예수는 이런 비극적 사건을 배경으로 태어났고, 태어나자 마자 이집트 땅으로 한 밤중에 피신하여야만 하였다. 구약에서 이집트는 정치적 핍박을 받는 이들의 피난처였다.
왕상 11:17 그러나 하닷은 자기 아버지의 신하이던 에돔 사람들을 데리고서, 이집트로 도망하였다. 그 때에 하닷은 아직 어린 소년이었다.
왕상 11:40 솔로몬이 여로보암을 죽이려고 하니, 여로보암은 일어나서 이집트 왕 시삭에게로 도망하여, 솔로몬이 죽을 때까지 이집트에 머물러 있었다.
태어나자마자, 정치적 도피처 이집트로 피난해야 했던 예수의 이야기, 그것이 마태복음 예수 탄생 이야기의 핵심이다. 마태복음의 이 도입부는 예수님이 살아갈 삶이 어떤 종류의 삶인지 미리 보여준다. 비극적이며 슬픈 이야기인데, 이 이야기의 도입부에 헤롯의 불안증을 자극하는 엑스트라로 출연한 인물들이 동방박사인 것이다. 마태복음은 주술에 의존하는 왕이 저지를 수 있는 비극적 사건의 예를 보여주면서, 그런 왕의 피해자 아기 예수의 탄생을 서술하기 위하여 동방에서 온 주술가를 등장시키는 것이다.
엑스트라이지만, 동방박사 출연의 의미는 적다고 할 수 없다. 예수는 주술을 믿고 충동적으로 정책을 정하는 왕의 피해자가 되었다. 그런데 주술의 최고봉에 있는 마고이들은 예수께 와서 경배하였다. 이 아이러니를 통하여 마태복음은 모든 주술을 물리치는 예수 신앙을 탄생 이야기 속에 녹여 선포한 것이다. 예수 신앙은 주술을 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