γυμνάζω(굼나조)는 신약성경에만 4번 나오는 동사이다(딤전 4:7; 히 5:14; 12:11; 벧후 2:14). 이 단어를 개역성경에서는 ‘연단하다’ ‘익숙하다’로 번역하고 있다. 이 단어는 훈련(training)의 의미를 담고 있는데, 놀랍게도 구약 헬라어 성경 70인역에는 신구약 중간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마카비하 10:15에 단 한 번 나오고 있다. 이 단어가 구약성경에 나오지 않는 이유를 생각해 본다면, 신학적인 이유와 언어배경적인 이유 때문일 것이다.
‘훈련’을 통해서 인간의 성장 혹은 성취를 이루는 것은 헤브라이즘에서는 생소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개인의 성장이나 성취에 있어서 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 그리고 인도하심을 강조한다. 그것이 아브라함과 모세의 이야기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목적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인자하심을 시편의 저자들은 늘 노래하고 있다. 역경과 고난 속에서 훈련되고 성장하고 있지만, 이 성장을 개인적 훈련, 인간 노력의 산물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구약성경이 ‘훈련’이라는 개념과 단어가 생소한 것이기에 구약성경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 단어가 γυμνάζω(굼나조)이다.
γυμνάζω(굼나조)의 언어적인 배경은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소년들을 육체적 정신적 훈련을 시키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훈련은 γυμνάσιον(굼나시온)이라는 공공장소에서 하는 훈련을 말하는 것인데, 소년들은 벌거벗은 채로 훈련을 받았다. γυμνάζω(굼나조)의 어근에 해당하는 γυμνός(굼노스)는 ‘벌거벗은’(naked) 이라는 뜻을 가진 형용사이다. 그래서 γυμνάζω(굼나조)는 ‘벌거벗은 채 훈련하다’(exercise naked) 라는 뜻이다. 소년들이 γυμνάσιον(굼나시온)에서 벌거벗은 채, 올림픽 체전을 위한 체육훈련을 통해 궁극적으로 전쟁을 위한 군사훈련을 받는 것이다.
제 2 성전시대 셀류코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유대인들을 박해하면서 헬라화 정책을 시행하였다. 이스라엘 땅 예루살렘에 γυμνάσιον(굼나시온)을 세우고(마카비상 1:14; 마카비하 4:9, 12 ), 유대인 소년들을 헬라 소년들처럼 훈련시켰다. 심지어 유대인의 정체성을 말살하기 위해서, 굼나시온에서 벌거벗고 훈련하는 유대인 소년들이 할례표시를 보여주지 못하도록 강제로 수술을 받게 하였다(마카비상 1:15).
이런 언어적 유래를 갖고 있는 γυμνάζω(굼나조)를 신약성경의 후기서신들은 특별히 그리스도인의 경건과 영성의 훈련을 위한 단어로서 구별하고 있다. 바울이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딤전 4:7)는 교훈을 주며, 에베소 지역의 목회자로 일하는 그가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라는 거짓 가르침으로 교인들을 미혹하면서 경건과 상관없는 삶을 사는 그들과는 구별되는 경건의 훈련을 강조하고 있다. 혼인과 음식을 금하며 육신의 모양을 갖추려는 육체의 훈련(σωματικὴ γυμνασία 소마티케 굼나시아, 딤전 4:8)보다는 믿음의 말씀과 좋은 교훈으로 금생과 내생의 약속이 있는 훈련을 받으라고 권면한다.
히브리서 저자도 어린 아이 같이 미숙하게 사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단단한 음식과 같은 의의 말씀을 먹으며 훈련받아야 할 것을 강조한다(히 5:14). 그리스도인들에게 있는 고난은 결국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하는 유익을 주는 훈련이라고 말한다(히 12:11).
로마제국 내에서 도시마다 세워진 γυμνάσιον(굼나시온)에서 훈련받는 소년들에게 그 훈련은 결국 인간의 탐욕을 이루는 훈련과 교육일 뿐이다. 이 훈련은 마음의 탐욕을 채우는 훈련에 불과하다(벧후 2:14).
형용사 γυμνός(굼노스, 벌거벗은)는 ‘옷을 벗은’(naked)이라는 1차적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 용어는 하나님 앞에 드러나는 인간과 죄의 벌거벗음(uncovered)을 묵시적 은유적으로 자주 나타낸다. 부자 청년이 주님의 제자로서의 부르심을 거절하고 집에 돌아가고 나서, 잡혀가는 주님을 지켜보다가 홑이불을 빼앗겨 버리고 맨몸으로(γυμνός) 달아나는 이야기가 있다(막 14:52).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마가복음의 저자라는 교회전승은 주님 앞에 모든 것이 드러나고 드디어 제자가 되는 영적 변화와 훈련을 암시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의 죽음은 세상 사람처럼 벌거벗는 죽음(영혼이 육신을 벗는 것)이 아니라(고후 5:3), 다시 생명을 입는 것임을 강조한다.
γυμνάζω(굼나조)라는 동사는 그레코 로만의 세속적인 언어의 기원을 가지고 있지만, 성경의 저자들은 이것에 기독교적 옷을 입혔다. 경건과 영성의 훈련으로 받게 될 유익, 곧 의와 영광의 월계관을 받을 내세를 소망으로 삼게 하였다. 육체의 훈련(train naked)을 받았더라도 인생경기의 마지막은 결국 벌거벗는 죽음이다(die naked).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훈련은 이와는 다른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는 훈련이다. 그리스도로 옷 입는 훈련이고, 생명으로 옷 입는 죽음이다.
벗음으로 훈련받고, 벗음으로 죽는 인생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은 새롭게 입음으로 삶을 훈련받고, 생명으로 덧입는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γυμνάζω(굼나조)는 신약성경에만 4번 나오는 동사이다(딤전 4:7; 히 5:14; 12:11; 벧후 2:14). 이 단어를 개역성경에서는 ‘연단하다’ ‘익숙하다’로 번역하고 있다. 이 단어는 훈련(training)의 의미를 담고 있는데, 놀랍게도 구약 헬라어 성경 70인역에는 신구약 중간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마카비하 10:15에 단 한 번 나오고 있다. 이 단어가 구약성경에 나오지 않는 이유를 생각해 본다면, 신학적인 이유와 언어배경적인 이유 때문일 것이다.
‘훈련’을 통해서 인간의 성장 혹은 성취를 이루는 것은 헤브라이즘에서는 생소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개인의 성장이나 성취에 있어서 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 그리고 인도하심을 강조한다. 그것이 아브라함과 모세의 이야기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목적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인자하심을 시편의 저자들은 늘 노래하고 있다. 역경과 고난 속에서 훈련되고 성장하고 있지만, 이 성장을 개인적 훈련, 인간 노력의 산물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구약성경이 ‘훈련’이라는 개념과 단어가 생소한 것이기에 구약성경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 단어가 γυμνάζω(굼나조)이다.
γυμνάζω(굼나조)의 언어적인 배경은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소년들을 육체적 정신적 훈련을 시키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훈련은 γυμνάσιον(굼나시온)이라는 공공장소에서 하는 훈련을 말하는 것인데, 소년들은 벌거벗은 채로 훈련을 받았다. γυμνάζω(굼나조)의 어근에 해당하는 γυμνός(굼노스)는 ‘벌거벗은’(naked) 이라는 뜻을 가진 형용사이다. 그래서 γυμνάζω(굼나조)는 ‘벌거벗은 채 훈련하다’(exercise naked) 라는 뜻이다. 소년들이 γυμνάσιον(굼나시온)에서 벌거벗은 채, 올림픽 체전을 위한 체육훈련을 통해 궁극적으로 전쟁을 위한 군사훈련을 받는 것이다.
제 2 성전시대 셀류코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유대인들을 박해하면서 헬라화 정책을 시행하였다. 이스라엘 땅 예루살렘에 γυμνάσιον(굼나시온)을 세우고(마카비상 1:14; 마카비하 4:9, 12 ), 유대인 소년들을 헬라 소년들처럼 훈련시켰다. 심지어 유대인의 정체성을 말살하기 위해서, 굼나시온에서 벌거벗고 훈련하는 유대인 소년들이 할례표시를 보여주지 못하도록 강제로 수술을 받게 하였다(마카비상 1:15).
이런 언어적 유래를 갖고 있는 γυμνάζω(굼나조)를 신약성경의 후기서신들은 특별히 그리스도인의 경건과 영성의 훈련을 위한 단어로서 구별하고 있다. 바울이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딤전 4:7)는 교훈을 주며, 에베소 지역의 목회자로 일하는 그가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라는 거짓 가르침으로 교인들을 미혹하면서 경건과 상관없는 삶을 사는 그들과는 구별되는 경건의 훈련을 강조하고 있다. 혼인과 음식을 금하며 육신의 모양을 갖추려는 육체의 훈련(σωματικὴ γυμνασία 소마티케 굼나시아, 딤전 4:8)보다는 믿음의 말씀과 좋은 교훈으로 금생과 내생의 약속이 있는 훈련을 받으라고 권면한다.
히브리서 저자도 어린 아이 같이 미숙하게 사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단단한 음식과 같은 의의 말씀을 먹으며 훈련받아야 할 것을 강조한다(히 5:14). 그리스도인들에게 있는 고난은 결국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하는 유익을 주는 훈련이라고 말한다(히 12:11).
로마제국 내에서 도시마다 세워진 γυμνάσιον(굼나시온)에서 훈련받는 소년들에게 그 훈련은 결국 인간의 탐욕을 이루는 훈련과 교육일 뿐이다. 이 훈련은 마음의 탐욕을 채우는 훈련에 불과하다(벧후 2:14).
형용사 γυμνός(굼노스, 벌거벗은)는 ‘옷을 벗은’(naked)이라는 1차적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 용어는 하나님 앞에 드러나는 인간과 죄의 벌거벗음(uncovered)을 묵시적 은유적으로 자주 나타낸다. 부자 청년이 주님의 제자로서의 부르심을 거절하고 집에 돌아가고 나서, 잡혀가는 주님을 지켜보다가 홑이불을 빼앗겨 버리고 맨몸으로(γυμνός) 달아나는 이야기가 있다(막 14:52).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마가복음의 저자라는 교회전승은 주님 앞에 모든 것이 드러나고 드디어 제자가 되는 영적 변화와 훈련을 암시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의 죽음은 세상 사람처럼 벌거벗는 죽음(영혼이 육신을 벗는 것)이 아니라(고후 5:3), 다시 생명을 입는 것임을 강조한다.
γυμνάζω(굼나조)라는 동사는 그레코 로만의 세속적인 언어의 기원을 가지고 있지만, 성경의 저자들은 이것에 기독교적 옷을 입혔다. 경건과 영성의 훈련으로 받게 될 유익, 곧 의와 영광의 월계관을 받을 내세를 소망으로 삼게 하였다. 육체의 훈련(train naked)을 받았더라도 인생경기의 마지막은 결국 벌거벗는 죽음이다(die naked).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훈련은 이와는 다른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는 훈련이다. 그리스도로 옷 입는 훈련이고, 생명으로 옷 입는 죽음이다.
벗음으로 훈련받고, 벗음으로 죽는 인생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은 새롭게 입음으로 삶을 훈련받고, 생명으로 덧입는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