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교회에서 흔히 듣던 얘기 중 하나는 이것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율법’)을 법률조항으로 여겨 각종 세부 사항과 시행세칙을 만들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서 일을 하면 안 되는데, 달걀 하나 이상의 무게를 드는 것은 ‘일’로 간주되었고, 백 보 이상을 걷는 것도 ‘일’이었다. 이런 세세한 조항들로 당대의 종교지도자들은 사람들을 죄인으로 옭아매었다.
정확한 디테일은 생각나지 않지만, 대충 이런 얘기였습니다. 인터넷 자료들을 검색해 보면, 미쉬나(Mishnah)의 규정에 따르면 ‘달걀 하나’가 아니라 ‘새 알 크기의 돌멩이’고, ‘백 보’가 아니라 ‘2km’라고 정보를 수정해 주는 분도 계십니다(사실 이것도 그리 정확한 정보는 아닙니다). 이런 식의 얘기를 통해 설교자들이 하고 싶은 얘기는, 유대인들은 신앙의 방향이 잘못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했지만, 예수님은, 혹은 바울은, 혹은 우리 기독교는 그런 잘못된 방향이 아니라 참된 신앙으로 이끈다는 비교우위였을 것입니다.
주일학교 때부터 들어온 이런 이야기들이 심어놓은 선입견을 교정하는 데 수십년의 공부가 필요했습니다. 초기 유대교(대략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5세기까지)가 구약의 말씀들을 제대로 지키고자 율법의 세세한 조항들을 꼬치꼬치 따지고 들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왜 그랬냐 하면 그래야만 살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죽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대공동체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잘 보여주는 구절은 잠언 6장 23절입니다.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토라 תּוֹרָה)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평행법/대구법(parallelism)에 의거해 이 구절의 단어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명령”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이 단어는 “법”이라고 번역한 단어와 짝단어입니다. “법”은 히브리어 토라(תּוֹרָה)를 번역한 것입니다. 토라는 어원적으로는 ‘가르침, 인도’를 뜻하는 단어이고, 구체적으로는 모세5경(을 비롯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하반절에서 이 “명령”과 “법”에 상응하는 단어는 “훈계의 책망”입니다. 즉, 하나님이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명령하시고 가르치시는 것은 우리를 훈계하시고 책망하시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우리를 혼내시며 이래저래 잔소리를 하시는 걸까요? 그 이유가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명령=법=훈계의 책망’이 하나의 의미를 여러 단어로 표현한 것처럼, “등불”과 “빛”도 짝단어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밝은 빛과 같은 것이고 어둠을 밝히는 등불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 등불과 빛은 단순히 주위를 환하게 하는 것만이 목적이 아닙니다. 하반절의 “생명의 길”이 이 등불과 빛의 목적을 설명해줍니다. 생명으로 가는 길을 밝히 보여주는 빛이고 그 길로 인도하는 등불이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명령/법/훈계의 책망”을 따라야만 생명의 길로 갈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멸망과 죽음의 길로 간다는 뜻입니다. 왜 구약시대의 사람들이, 그리고 초기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알고자 목숨을 걸었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삶과 죽음, 생명과 멸망의 갈림길에서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미쉬나 1권 2장 페아(פֵּאָה)
초기 유대교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잘 알 수 있는 예 하나를 들어봅시다. 미쉬나 중 페아(פֵּאָה)라는 소제목이 붙은 부분인데, 그 단어 자체는 ‘모퉁이나 구석(corner)’ 혹은 ‘옆면이나 가장자리(side)’를 뜻합니다. 성경에서는 수염이나 구렛나루의 끄트머리를 가리키기도 하고, 물건의 옆면이나 동서남북 중 하나의 방향을 가리킬 때도 쓰입니다. 미쉬나의 페아가 다루는 구절은 레위기를 본문으로 합니다.
레위기 19:9-10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 모퉁이(페아 פֵאָה)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레위기 23:22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밭 모퉁이(페아 פֵאָה)까지 다 베지 말며 떨어진 것을 줍지 말고 그것을 가난한 자와 거류민을 위하여 남겨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하나님의 명령은 간단합니다. 추수할 때 자신의 밭에 나는 모든 곡식을 다 베어 가지 말고 일부를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남겨놓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이것을 실행하려니 여러 문제가 발생합니다. 네모난 밭일 경우에 네 모서리 모두를 남겨 두어야 하나? 남긴다면 대체 어느 정도를 남겨야 하나? 추수를 한꺼번에 하지 못할 때, 가난한 사람들은 밭 주인의 추수가 다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만약 밭의 소유주가 2명 이상인데, 그 소유주 중에 토라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이방인(미쉬나의 경우 주로 로마인을 가리킴)이 있을 경우에, 추수의 일부를 남기는 문제는 어떻게 해야하나? 단순한 명령을 실천하는 일은 전혀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곧 깨닫게 됩니다.
페아의 규정들 혹은 권고사항
미쉬나는 이러한 다양한 상황에서 레위기의 명령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에 대해 여러 랍비들의 의견을 나열합니다. 미쉬나 페아의 시작은 다음과 같습니다.
"측정단위가 없는 것은 다음과 같다: 페아, 맏물, 절기의 제물, 자비로운 행위, 토라 공부"(페아 1, 1: 미쉬나 1권, 107)
‘측정단위가 없다’는 것은 성경에서 그 상한선이나 하한선을 명시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밭 모퉁이를 남기고, 첫 열매(“맏물”)와 제물을 하나님께 바치고, 선행을 베풀고 하나님의 말씀(토라)을 배우고 익히라는 명령은 있지만 어느 정도까지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개인에 따라 많이 할 수도 있고 적게 할 수도 있습니다. 많이 하면 좋겠지만 그렇다고 무분별하게 많이만 한다고 좋은 것은 아닐 것입니다. 또 개인의 욕심이나 게으름으로 적게 하면 안 되기 때문에 랍비들은 오랜 세월 그 적당한 정도에 대해 논의를 해왔고, 그 논의들을 집대성한 것이 바로 미쉬나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적당한 정도’라는 것 또한 랍비들마다 견해가 다르다는 점입니다. 미쉬나는 이 다양한 랍비들의 견해들을 나란히 열거해 놓습니다. 이 랍비는 이렇게 말한다, 저 랍비는 저렇게 말한다는 식입니다. 누구 말이 옳고 누구 말이 틀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법률조항이 아닙니다. 법률적 강제성이 없고 또한 처벌 규정도 없습니다. 처벌 규정이 없다는 것이 미쉬나의 특징이며 미쉬나의 성격이 무엇인지 가장 잘 보여줍니다. 미쉬나는 결코 사람들을 억압하고 강제하기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자,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행하고자 몸부림치던 사람들이 제시한 다양한 의견들을 통해 신앙인 각자가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성경에 (모호하게) 기록된 하나님의 명령을 ‘건강한’ 방향으로 행할 수 있도록 돕는 문서입니다.
랍비들은 우선 페아의 하한선부터 설정합니다.
“페아는 [전체 곡식의] 1/60보다 적어서는 안 된다. 페아에 대한 측정단위가 없다고 말하지만 모든 것은 밭의 크기와 가난한 이의 수와 [추수하는 곡식의] 생산량에 맞추어 정해야 한다”(페아 1, 2. 미쉬나 1권, 108).
상한선은 언급하지 않고 60분의 1이라는 하한선만 설정해 놓은 것이 흥미롭습니다. 이보다 더 많이 할 수는 있지만 더 적게 하면 안 된다고 못을 박고 나서, 랍비들은 중요한 고려사항 세 가지를 언급합니다: 얼마나 큰 밭을 가지고 있는가, 그 밭의 생산량은 얼마인가, 그리고 얼마나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그 마을에 살고 있는가. 밭이 아무리 커도 생산량이 적을 수 있고, 작은 규모의 밭이라도 많은 소출을 낼 수 있다는 걸 고려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가난한 이의 수’입니다. 이 모든 명령과 규례가 가난한 이들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랍비들은 가능한 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다 고려합니다.
“집 주인이 이곳저곳을 여행하다가, 떨어뜨린 것과 잊어버린 것과 페아와 가난한 자를 위한 십일조를 취해야 했다면 그는 [그것들을] 취할 것이며, 그가 자기 집으로 돌아오면 그것을 되갚아주어야 한다. 엘리에제르 랍비의 말이다. [다른] 랍비들은 말한다. [여행하는] 때에 그는 가난한 이였기 때문에 [되갚을 필요가 없다]. (페아 5, 4: 미쉬나 1권, 141-142)
이 규정은 재산이 있는 사람이 자신이 머무는 곳을 떠나 타지에 간 경우, 그가 먹을 것이 없어 그 지역 사람의 밭에 있는 음식물로 배를 채운 경우를 상정합니다. 랍비 엘리에제르는 이 사람은 재산이 있는 사람이므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 뒤에 여행 중에 취한 것을 되갚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 주장에 모든 랍비들이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되갚을 필요가 없다는 다른 랍비들 의견도 있습니다. 이렇게 미쉬나는 다양한 해석들을 함께 열거합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어느 해석 어느 주장이 맞다고 편을 들어주지 않습니다.
“페아는 낫을 사용하여 자르거나 삽으로 퍼서도 안 된다. 그것으로 동료(이웃)들을 칠 수 있기 때문이다.” (페아 4, 4: 미쉬나 1권, 130)
밭 주인이 남긴 페아를 가난한 사람들이 취할 때 도구를 사용하면 안 된다는 규정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너무 많은 페아를 차지할까 봐 걱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음식물을 취하다가 서로 다치게 되는 상황을 염려하는 것입니다. 랍비들이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페아는 하루에 세 번, 아침, 점심, 저녁에 행할 수 있다. 가믈리엘 랍비는 말한다. 이것은 [페아 행위를] 줄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아키바 랍비는 말한다. [페아 행위를] 늘리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페아 4, 5: 미쉬나 1권, 131)
밭 주인은 가난한 사람들이 와서 페아로 남겨둔 곡식을 취할 수 있는 기회를 하루 세 번은 주어야 한다고 권고합니다. 페아를 하루 중 어느 특정한 시간으로 한정해 놓으면 가난한 사람들이 못 오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못된 밭 주인이 마음대로 페아의 시간을 한밤중이나 이른 새벽으로 정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동일한 권고에 대해 랍비들은 다른 이유를 제시합니다. 랍비 가믈리엘은 밭 주인이 인색하게 페아의 기회를 줄이지 못하도록 이런 권고사항이 필요하다고 말한 반면, 랍비 아키바는 반대로, 선배 랍비들이 이런 규정을 정해 놓은 것은 밭 주인이 너무 많은 시간에 밭을 개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해석합니다.
미쉬나 전체에서 페아의 위치가 주는 의미
미쉬나는 총 6개의 책(세데르)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 제라임(씨뿌림)
- 모에드(절기)
- 나쉼(여성들)
- 네지킨(손해)
- 코다쉼(거룩한 것들)
- 토호롯(정결한 것들)
첫 권인 제라임(씨뿌림)은 총 열한 가지 장(마세켓)으로 나뉘는데, 2번부터 11번까지가 모두 농경에 대한 것입니다. 페아는 제라임의 두번째 장에 위치합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중요한 문제이고, 그를 위한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이 밭에 씨를 뿌리는 것이니 제라임이 미쉬나의 첫번째 책이라는 것은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습니다. 제라임의 첫 장은 베라콧(‘복’)입니다. 이 장은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한 다양한 기도들을 다룹니다. 땅은 하나님의 것이고 거기서 무엇인가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니, 농사를 시작하면서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는 것 역시 지극히 당연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고 복 주시기를 바라며 이제 막 씨를 뿌려야 할 시점에 유대인들은 페아를 다룬다는 점입니다. 아직 씨를 뿌리기도 전에 가난한 사람들(난민, 고아, 과부 등)에게 어떻게 나누어야 할 지부터 염려한 것입니다. 이 점이 아주 이상합니다. 수확할 때 남겨두어야 하는 부분에 대한 언급은 곡식이 다 익은 후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그러나 미쉬나는 페아의 규정을 ‘봉헌’이나 ‘십일조’, ‘첫 열매(맏물)’보다 훨씬 먼저 위치해 놓습니다. 즉, 하나님께 무엇을 바칠 것인가, 십일조는 어떻게 드려야 하며 거룩한 것과 정결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기도 전에 자신의 소유물을 가난한 이웃들과 어떻게 나누어야 하는지부터 다루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를 올린 뒤(베라콧) 이들의 시선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이었습니다.
이번에 번역된 미쉬나 완역 중 1권의 번역과 주해를 담당한 권성달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세데르 『제라임』의 실질적인 내용 가운데 도움이 시급한 사람들을 언급한 것에서 유대인들의 결속성과 공동체성이라는 특징을 파악할 수 있다. 유대 공동체에 속하는 한 적어도 먹을 게 없어서 굶어 죽는 일은 없어야 하며 만일 그러한 일이 발생한다면 이는 유대 공동체 전체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성서 시대는 물론 기원후 70년 예루살렘 파괴와 132-135년에 발생한 바르 코크바 반란 이후 전 세계로 흩어져 디아스포라가 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페아』의 조항들은 그들을 하나로 묶는 힘의 원천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미쉬나 1권, 131)
“각자도생”이 올해의 사자성어처럼 되어버린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밭 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과 그 명령을 올바로 실행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초기 유대공동체의 집단지성이 주는 울림이 더욱 크게 느껴집니다.
참고: 미쉬나 전체가 우리나라 학자들에 의해 완역되었습니다. 미쉬나는 아주 압축적이고 함축적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좋은 안내자 없이는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미쉬나를 우리말로 번역하고 주해를 단 학자들은 유대학을 오래 공부하신 권위자들로서 믿고 추천할 수 있는 분들입니다. 관심 있는 분은 아래의 링크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미쉬나 번역 주해서 1-6 + 미쉬나 길라잡이 세트 http://aladin.kr/p/LqJfl
어렸을 때 교회에서 흔히 듣던 얘기 중 하나는 이것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율법’)을 법률조항으로 여겨 각종 세부 사항과 시행세칙을 만들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서 일을 하면 안 되는데, 달걀 하나 이상의 무게를 드는 것은 ‘일’로 간주되었고, 백 보 이상을 걷는 것도 ‘일’이었다. 이런 세세한 조항들로 당대의 종교지도자들은 사람들을 죄인으로 옭아매었다.
정확한 디테일은 생각나지 않지만, 대충 이런 얘기였습니다. 인터넷 자료들을 검색해 보면, 미쉬나(Mishnah)의 규정에 따르면 ‘달걀 하나’가 아니라 ‘새 알 크기의 돌멩이’고, ‘백 보’가 아니라 ‘2km’라고 정보를 수정해 주는 분도 계십니다(사실 이것도 그리 정확한 정보는 아닙니다). 이런 식의 얘기를 통해 설교자들이 하고 싶은 얘기는, 유대인들은 신앙의 방향이 잘못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했지만, 예수님은, 혹은 바울은, 혹은 우리 기독교는 그런 잘못된 방향이 아니라 참된 신앙으로 이끈다는 비교우위였을 것입니다.
주일학교 때부터 들어온 이런 이야기들이 심어놓은 선입견을 교정하는 데 수십년의 공부가 필요했습니다. 초기 유대교(대략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5세기까지)가 구약의 말씀들을 제대로 지키고자 율법의 세세한 조항들을 꼬치꼬치 따지고 들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왜 그랬냐 하면 그래야만 살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죽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대공동체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잘 보여주는 구절은 잠언 6장 23절입니다.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토라 תּוֹרָה)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평행법/대구법(parallelism)에 의거해 이 구절의 단어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명령”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이 단어는 “법”이라고 번역한 단어와 짝단어입니다. “법”은 히브리어 토라(תּוֹרָה)를 번역한 것입니다. 토라는 어원적으로는 ‘가르침, 인도’를 뜻하는 단어이고, 구체적으로는 모세5경(을 비롯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하반절에서 이 “명령”과 “법”에 상응하는 단어는 “훈계의 책망”입니다. 즉, 하나님이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명령하시고 가르치시는 것은 우리를 훈계하시고 책망하시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우리를 혼내시며 이래저래 잔소리를 하시는 걸까요? 그 이유가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명령=법=훈계의 책망’이 하나의 의미를 여러 단어로 표현한 것처럼, “등불”과 “빛”도 짝단어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밝은 빛과 같은 것이고 어둠을 밝히는 등불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 등불과 빛은 단순히 주위를 환하게 하는 것만이 목적이 아닙니다. 하반절의 “생명의 길”이 이 등불과 빛의 목적을 설명해줍니다. 생명으로 가는 길을 밝히 보여주는 빛이고 그 길로 인도하는 등불이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명령/법/훈계의 책망”을 따라야만 생명의 길로 갈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멸망과 죽음의 길로 간다는 뜻입니다. 왜 구약시대의 사람들이, 그리고 초기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알고자 목숨을 걸었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삶과 죽음, 생명과 멸망의 갈림길에서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미쉬나 1권 2장 페아(פֵּאָה)
초기 유대교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잘 알 수 있는 예 하나를 들어봅시다. 미쉬나 중 페아(פֵּאָה)라는 소제목이 붙은 부분인데, 그 단어 자체는 ‘모퉁이나 구석(corner)’ 혹은 ‘옆면이나 가장자리(side)’를 뜻합니다. 성경에서는 수염이나 구렛나루의 끄트머리를 가리키기도 하고, 물건의 옆면이나 동서남북 중 하나의 방향을 가리킬 때도 쓰입니다. 미쉬나의 페아가 다루는 구절은 레위기를 본문으로 합니다.
레위기 19:9-10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 모퉁이(페아 פֵאָה)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레위기 23:22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밭 모퉁이(페아 פֵאָה)까지 다 베지 말며 떨어진 것을 줍지 말고 그것을 가난한 자와 거류민을 위하여 남겨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하나님의 명령은 간단합니다. 추수할 때 자신의 밭에 나는 모든 곡식을 다 베어 가지 말고 일부를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남겨놓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이것을 실행하려니 여러 문제가 발생합니다. 네모난 밭일 경우에 네 모서리 모두를 남겨 두어야 하나? 남긴다면 대체 어느 정도를 남겨야 하나? 추수를 한꺼번에 하지 못할 때, 가난한 사람들은 밭 주인의 추수가 다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만약 밭의 소유주가 2명 이상인데, 그 소유주 중에 토라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이방인(미쉬나의 경우 주로 로마인을 가리킴)이 있을 경우에, 추수의 일부를 남기는 문제는 어떻게 해야하나? 단순한 명령을 실천하는 일은 전혀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곧 깨닫게 됩니다.
페아의 규정들 혹은 권고사항
미쉬나는 이러한 다양한 상황에서 레위기의 명령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에 대해 여러 랍비들의 의견을 나열합니다. 미쉬나 페아의 시작은 다음과 같습니다.
"측정단위가 없는 것은 다음과 같다: 페아, 맏물, 절기의 제물, 자비로운 행위, 토라 공부"(페아 1, 1: 미쉬나 1권, 107)
‘측정단위가 없다’는 것은 성경에서 그 상한선이나 하한선을 명시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밭 모퉁이를 남기고, 첫 열매(“맏물”)와 제물을 하나님께 바치고, 선행을 베풀고 하나님의 말씀(토라)을 배우고 익히라는 명령은 있지만 어느 정도까지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개인에 따라 많이 할 수도 있고 적게 할 수도 있습니다. 많이 하면 좋겠지만 그렇다고 무분별하게 많이만 한다고 좋은 것은 아닐 것입니다. 또 개인의 욕심이나 게으름으로 적게 하면 안 되기 때문에 랍비들은 오랜 세월 그 적당한 정도에 대해 논의를 해왔고, 그 논의들을 집대성한 것이 바로 미쉬나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적당한 정도’라는 것 또한 랍비들마다 견해가 다르다는 점입니다. 미쉬나는 이 다양한 랍비들의 견해들을 나란히 열거해 놓습니다. 이 랍비는 이렇게 말한다, 저 랍비는 저렇게 말한다는 식입니다. 누구 말이 옳고 누구 말이 틀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법률조항이 아닙니다. 법률적 강제성이 없고 또한 처벌 규정도 없습니다. 처벌 규정이 없다는 것이 미쉬나의 특징이며 미쉬나의 성격이 무엇인지 가장 잘 보여줍니다. 미쉬나는 결코 사람들을 억압하고 강제하기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자,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행하고자 몸부림치던 사람들이 제시한 다양한 의견들을 통해 신앙인 각자가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성경에 (모호하게) 기록된 하나님의 명령을 ‘건강한’ 방향으로 행할 수 있도록 돕는 문서입니다.
랍비들은 우선 페아의 하한선부터 설정합니다.
“페아는 [전체 곡식의] 1/60보다 적어서는 안 된다. 페아에 대한 측정단위가 없다고 말하지만 모든 것은 밭의 크기와 가난한 이의 수와 [추수하는 곡식의] 생산량에 맞추어 정해야 한다”(페아 1, 2. 미쉬나 1권, 108).
상한선은 언급하지 않고 60분의 1이라는 하한선만 설정해 놓은 것이 흥미롭습니다. 이보다 더 많이 할 수는 있지만 더 적게 하면 안 된다고 못을 박고 나서, 랍비들은 중요한 고려사항 세 가지를 언급합니다: 얼마나 큰 밭을 가지고 있는가, 그 밭의 생산량은 얼마인가, 그리고 얼마나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그 마을에 살고 있는가. 밭이 아무리 커도 생산량이 적을 수 있고, 작은 규모의 밭이라도 많은 소출을 낼 수 있다는 걸 고려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가난한 이의 수’입니다. 이 모든 명령과 규례가 가난한 이들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랍비들은 가능한 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다 고려합니다.
“집 주인이 이곳저곳을 여행하다가, 떨어뜨린 것과 잊어버린 것과 페아와 가난한 자를 위한 십일조를 취해야 했다면 그는 [그것들을] 취할 것이며, 그가 자기 집으로 돌아오면 그것을 되갚아주어야 한다. 엘리에제르 랍비의 말이다. [다른] 랍비들은 말한다. [여행하는] 때에 그는 가난한 이였기 때문에 [되갚을 필요가 없다]. (페아 5, 4: 미쉬나 1권, 141-142)
이 규정은 재산이 있는 사람이 자신이 머무는 곳을 떠나 타지에 간 경우, 그가 먹을 것이 없어 그 지역 사람의 밭에 있는 음식물로 배를 채운 경우를 상정합니다. 랍비 엘리에제르는 이 사람은 재산이 있는 사람이므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 뒤에 여행 중에 취한 것을 되갚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 주장에 모든 랍비들이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되갚을 필요가 없다는 다른 랍비들 의견도 있습니다. 이렇게 미쉬나는 다양한 해석들을 함께 열거합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어느 해석 어느 주장이 맞다고 편을 들어주지 않습니다.
“페아는 낫을 사용하여 자르거나 삽으로 퍼서도 안 된다. 그것으로 동료(이웃)들을 칠 수 있기 때문이다.” (페아 4, 4: 미쉬나 1권, 130)
밭 주인이 남긴 페아를 가난한 사람들이 취할 때 도구를 사용하면 안 된다는 규정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너무 많은 페아를 차지할까 봐 걱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음식물을 취하다가 서로 다치게 되는 상황을 염려하는 것입니다. 랍비들이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페아는 하루에 세 번, 아침, 점심, 저녁에 행할 수 있다. 가믈리엘 랍비는 말한다. 이것은 [페아 행위를] 줄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아키바 랍비는 말한다. [페아 행위를] 늘리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페아 4, 5: 미쉬나 1권, 131)
밭 주인은 가난한 사람들이 와서 페아로 남겨둔 곡식을 취할 수 있는 기회를 하루 세 번은 주어야 한다고 권고합니다. 페아를 하루 중 어느 특정한 시간으로 한정해 놓으면 가난한 사람들이 못 오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못된 밭 주인이 마음대로 페아의 시간을 한밤중이나 이른 새벽으로 정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동일한 권고에 대해 랍비들은 다른 이유를 제시합니다. 랍비 가믈리엘은 밭 주인이 인색하게 페아의 기회를 줄이지 못하도록 이런 권고사항이 필요하다고 말한 반면, 랍비 아키바는 반대로, 선배 랍비들이 이런 규정을 정해 놓은 것은 밭 주인이 너무 많은 시간에 밭을 개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해석합니다.
미쉬나 전체에서 페아의 위치가 주는 의미
미쉬나는 총 6개의 책(세데르)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 권인 제라임(씨뿌림)은 총 열한 가지 장(마세켓)으로 나뉘는데, 2번부터 11번까지가 모두 농경에 대한 것입니다. 페아는 제라임의 두번째 장에 위치합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중요한 문제이고, 그를 위한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이 밭에 씨를 뿌리는 것이니 제라임이 미쉬나의 첫번째 책이라는 것은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습니다. 제라임의 첫 장은 베라콧(‘복’)입니다. 이 장은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한 다양한 기도들을 다룹니다. 땅은 하나님의 것이고 거기서 무엇인가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니, 농사를 시작하면서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는 것 역시 지극히 당연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고 복 주시기를 바라며 이제 막 씨를 뿌려야 할 시점에 유대인들은 페아를 다룬다는 점입니다. 아직 씨를 뿌리기도 전에 가난한 사람들(난민, 고아, 과부 등)에게 어떻게 나누어야 할 지부터 염려한 것입니다. 이 점이 아주 이상합니다. 수확할 때 남겨두어야 하는 부분에 대한 언급은 곡식이 다 익은 후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그러나 미쉬나는 페아의 규정을 ‘봉헌’이나 ‘십일조’, ‘첫 열매(맏물)’보다 훨씬 먼저 위치해 놓습니다. 즉, 하나님께 무엇을 바칠 것인가, 십일조는 어떻게 드려야 하며 거룩한 것과 정결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기도 전에 자신의 소유물을 가난한 이웃들과 어떻게 나누어야 하는지부터 다루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를 올린 뒤(베라콧) 이들의 시선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이었습니다.
이번에 번역된 미쉬나 완역 중 1권의 번역과 주해를 담당한 권성달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세데르 『제라임』의 실질적인 내용 가운데 도움이 시급한 사람들을 언급한 것에서 유대인들의 결속성과 공동체성이라는 특징을 파악할 수 있다. 유대 공동체에 속하는 한 적어도 먹을 게 없어서 굶어 죽는 일은 없어야 하며 만일 그러한 일이 발생한다면 이는 유대 공동체 전체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성서 시대는 물론 기원후 70년 예루살렘 파괴와 132-135년에 발생한 바르 코크바 반란 이후 전 세계로 흩어져 디아스포라가 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페아』의 조항들은 그들을 하나로 묶는 힘의 원천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미쉬나 1권, 131)
“각자도생”이 올해의 사자성어처럼 되어버린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밭 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과 그 명령을 올바로 실행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초기 유대공동체의 집단지성이 주는 울림이 더욱 크게 느껴집니다.
참고: 미쉬나 전체가 우리나라 학자들에 의해 완역되었습니다. 미쉬나는 아주 압축적이고 함축적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좋은 안내자 없이는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미쉬나를 우리말로 번역하고 주해를 단 학자들은 유대학을 오래 공부하신 권위자들로서 믿고 추천할 수 있는 분들입니다. 관심 있는 분은 아래의 링크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미쉬나 번역 주해서 1-6 + 미쉬나 길라잡이 세트 http://aladin.kr/p/LqJfl